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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7장
마태복음 5~7장 소개 및 연대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산상수훈과 그 장소인 갈릴리의 언덕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곳에서, 지상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사람이 그야말로 가장 위대한 설교를, 즉 산상수훈을 전하셨습니다.”(“The Way Home,”Ensign, May 1975, 15) 구주께서는 갈릴리에서 성역을 시작하시며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마태복음 4:17) 선포하셨다. 또한 그분은 산상수훈에서(마태복음 5~7장 참조) 자신의 왕국에 속하는 사람들의 삶을 주관하며 행복과 온전함으로 이끄는 의로움의 교리와 원리들을 가르치셨다.
이 설교가 끝나자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태복음 7:28~29; 비슷한 설교를 누가복음 6장 17~49절과 제3니파이 12~14장에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그분이 말씀하신 내용과 그분의 태도에 모두 놀랐다. 그분은 서기관이나 랍비처럼 과거의 권위에 의지하고 전례를 인용하며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자로서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5~7장 주해
마태복음 5:1~12. 팔복
팔복은 마태복음 5장 1~12절에 나오는, 축복들에 대한 구주의 선언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해롤드 비 리(1899~1973)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자신의 완전한 인품에 관한 것을 나타내 주셨으며 …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 어느 것에도 비길 데 없는 이 산 위의 설교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여덟 가지 독특한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각기 ‘복이 있나니’라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 주님의 이 말씀은 기독교 세계의 문학에서 팔복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 그 안에는 실로 완전한 삶을 위한 헌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해롤드 비 리[2000], 200쪽)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해롤드 비 리 회장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궁핍한 사람, 즉 영적으로 너무나 가난하여 간절히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해롤드 비 리, 197쪽)라고 가르쳤다. 제3니파이에는 이 설교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심령이 가난하여 내게로 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제3니파이 12:3; 기울임체 추가)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해롤드 비 리 회장은 “애통하는 자”란 자신의 죄를 애통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또 애통하는 자들은 다 복이 있나니’(제3니파이 12:4; 또한 마태복음 5:4 참조) … 주님은 회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누구에게 올 약속에 대해 말씀하고 계실까요? ‘지극히 겸손하여져서’ 침례를 받고 성신의 은사를 받은 모든 사람입니다.(제3니파이 12:2 참조)”(The Teaching of Harold B. Lee, ed. Clyde J. Williams [1996], 112)
이 가르침에 대한 또 하나의 의미가 모사이야서 18장 9절에 나오는데, 이 성구는 교회 회원에게 필요한 한 가지 요건이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기꺼이 슬퍼하고, 또한 위로를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것임을 가르친다.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로우며, 겸손하고, 가르침을 잘 들으며, 인내하는 것”을 뜻한다. “온유한 자는 복음의 가르침을 기꺼이 따른다.”(경전 안내서, “온유한, 온유”; scriptures.lds.org) 온유함은 나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가 가르친 것처럼, 온유함은 “친절함과 부드러움[이]다. 그것은 확신과 힘과 평정을 반영[한]다. 건강한 자존감과 진정한 자제력을 반영[한]다.”(“Meekly Drenched in Destiny” [Brigham Young University devotional, Sept. 5, 1982], 2; speeches.byu.edu)
에이치 데이비드 버튼 감독은 교회의 감리 감독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우리가 온유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온유함은 우리가 영에 의해 가르침 받도록 해 줍니다.”(“거룩함도 더욱”, 리아호나, 2004년 11월호, 99쪽)
예수께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시편 37편 11절을 인용한 것이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마태복음 5:5) 해의 왕국을 상속받는다는 의미이다. 이 지구는 언젠가 “해의 영광을 받을 준비가 되도록 모든 불의에서 성결하게” (교리와 성약 88:18) 될 것이며,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받을(교리와 성약 88:17) 것이다.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배부를 것”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또한 “외양간의 가축을 먹이다 또는 살찌우다”라는 뜻이며, 완전히 만족할 때까지 먹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주님은 그들이 완전히 만족할 때까지 영적으로 먹이실 것이다. 제3니파이에는 이 설교에 “그들이 성신으로 충만함을 입을 것임이요”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제3니파이 12:6; 기울임체 추가)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우리가 남을 대하는 방식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구주의 거듭된 가르침이 또 한 번 나타난다.(마태복음 6:12, 14~15; 7:1~2; 18:23~35; 25:31~46)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이렇게 기록했다. “저는 우리의 모든 관계에서 더욱 연민 어린 마음과 강한 자비심을 호소합니다. 우리가 자비롭다면 최후의 심판자께서도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기 때문입니다. …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가 돕고, 먹이고, 돌보고, 양육하고, 축복하는 분들의 모습은 감동을 줍니다. 누군가가 그런 자비를 베풀 때, 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그 후손을 자비로 축복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느낍니다. … 다른 이들에게 자비로운 사람은 어김 없이 자비로 보상받게 됩니다.[마태복음 5:7]”(Standing for Something [2000], 75, 77)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타인을 용서하는 일에서 자비를 베푸는 것에 대해 말했다. “항상 자비의 원리를 실천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려는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우리의 형제를 용서할 준비를 하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형제, 그리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그들이 회개하거나 용서를 구하기 전에 용서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똑같이 자비로우실 것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 392쪽)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제럴드 엔 런드 장로는 칠십인으로 봉사하는 동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마음에 더러움이 없고 성령을 받아들인다고 설명했다. “구주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태복음 5:8] 어떤 것이 청결하다는 것은 그것이 오염되지 않았으며, 불순물로 더렵혀지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청결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감을 받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건들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의 마음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청결하지 못한 것들을 제거하고 마음 가운데 불순물들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가 더욱 노력할수록, 우리는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좀 더 열게 됩니다.”(“우리의 마음을 열어”,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33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마음이 청결한 것과 하나님을 보는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영혼이 청결하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들은 침례의 물에서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며, 침례 후에는 죄 사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생활한 자들이고, 성신의 권능으로 죄가 마치 불처럼 태워 없어진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영혼들이며, 청결하기 때문에 다른 청결한 존재들을 보고 그들과 교제할 자격이 있다. 이 청결한 존재들의 우두머리는 청결하신 주님이시다.”(A New witness for the Articles of Faith [1985], 492)
마태복음 5:13.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소금은 짠 맛을 내고 식품을 보존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또한 모세의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에도 뿌려졌다. 이렇게 소금은 기쁨, 영구성, 그리고 성약을 맺는 것과 연관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마태복음 5:13) 되라고 가르치셨을 때, 그 말씀은 그들의 삶이 주님과 맺은 성약을 반영해야 하고 세상 전반에서 방부제 역할을 다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칠십인 정원회 회장단의 카를로스 이 애시(1926~1999) 장로는 소금은 오염되면 그 맛을 잃으므로, 우리는 영적인 오염을 피함으로써 우리의 “맛”을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애시 장로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신권 소유자들을 대상으로 전한 것이었지만, 그 내용은 우리 각자 모두에게 적용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학자가 소금은 세월이 지나도 그 맛을 잃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불순물이 섞임으로써 맛을 잃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신권의 권능도 세월이 지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불순물이 섞임으로써 잃게 됩니다.
청년이나 성인 남자가 외설 문학에 생각을 쏟을 때 맛을 잃게 됩니다.
신권 소유자가 거짓말이나 불경스러운 말을 하면 맛을 잃게 됩니다.
우리 중에 대중을 따라 부도덕한 행위나 약물, 담배, 알코올 및 그 밖의 해로운 물질의 사용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맛을 잃게 됩니다.
불순한 생각으로 마음을 더럽히고, 진실이 아닌 말로 입을 속되게 쓰며, 악한 행동에 힘을 잘못 쓸 때 그 사람의 풍미와 특성은 사라져 버립니다. …
저는 특히 청년들이 자신의 맛을 보존하는 수단으로 삼도록 이 간단한 지침을 드립니다. 깨끗하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참되지 않은 것은 말하지 마십시오. 선이 아닌 것은 행하지 마십시오.”(“세상의 소금: 그 맛과 인간의 구원자들”, 성도의 벗, 1980년 11월호, 64쪽)
마태복음 5:14~16.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권유했다.
“우리의 빛을 비추어서 우리를 따라온 사람들이 구주를 따르게 된다면, 그것이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른 누군가를 안전히 집으로 데려오시기 위해 보내신 빛이거나, 영생으로 이어지는 곧고 좁은 길을 보여 주는 횃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빛은 횃불이므로, 타오르기를 멈추거나 집으로 가는 길을 찾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해서는 안 됩니다.”(“That Ye May Be the Children of Light” [Brigham Young University fireside, Nov. 3, 1996], 8–9; speeches.byu.edu)
마태복음 5:22. 라가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가라는 단어는 아람어에서 왔으며 “천치, 바보, 또는 머리가 빈 사람”을 뜻한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 단어에 담긴 더 넓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불경하고 천박한 표현들은 나라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이 말씀의 의도는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적절한 감정을 전달하는 모든 언어를 꾸짖기 위함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1:222)
마태복음 5:22. “노하는 자마다”
조셉 스미스 역, 마태복음 5장 24절에는 “이유 없이”라는 구문이 없다.[영어 성경에는 “without a cause”라는 문구가 있으나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음—옮긴이](또한 제3니파이 12:22 참조) 칠십인 정원회의 린 지 로빈스 장로는 이들 성구를 인용하며 우리의 생활에서 분노를 없애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사탄의] 전략의 교활한 점은 분노를 선택의지와 무관한 것으로 분리시켜서 우리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의 희생자라고 믿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 주님께서는 우리가 화를 내지 않겠다는 선택을 하기를 바라십니다. … 주님께서 ‘이유 없이’라는 구문을 없애신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변명의 여지도 남기시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
화는 우리의 자제력을 포기하고 사탄의 영향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적대적 감정이나 행위를 초래하는 생각의 죄입니다. … 선택의지와 분노 사이의 연관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생활에서 분노를 없애는 첫걸음입니다.”(“선택의지와 분노”, 성도의 벗, 1998년 7월호, 80~81쪽)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우리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상기시켜 주었다.
“화를 내는 것은 사탄의 영향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화 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영을 동반할 수 있도록 합당하고 싶다면 화를 내는 것을 삼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
… 우리 모두는 그대로 두면 분노로 이어질 수 있는 감정에 빠질 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불쾌감이나 짜증 또는 적대감이 생길 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통제력을 잃고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그 다른 사람은 종종 우리 가족, 즉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
그러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우리가 분노를 삼가기 위해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기를 바랍니다.”(“감정을 다스리십시오, 나의 형제여”, 리아호나, 2009년 11월호, 68~69쪽)
마태복음 5: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 사화하라”
데이비드 이 소렌슨 장로는 칠십인 회장단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을 고발하는 자와 사화하라는 말은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합의를 도출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구주께서는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마태복음 5:25]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불화를 조기에 해결하여 순간의 격정이 육체적 감정적 잔학 행위로 비화되는 것을 막고 노여움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원리는 특히 우리의 가족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용서를 통해 원한은 사랑으로 바뀝니다”, 리아호나, 2003년 5월호, 11쪽)
마태복음 5:27~28.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음욕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욕이 그토록 치명적인 대죄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육욕이 우리 영혼에 미치는 영향력은 영을 완전히 파괴시킬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필멸의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결하고 거룩한 관계를 더럽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러한 관계는 바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느끼는 사랑이며, 부부가 자녀를 가족 안으로, 영원히 지속되도록 계획된 가족 안으로 데려오려는 소망입니다. … 사랑을 하면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사람들에게 손을 내밉니다. 그러나 육욕은 경건함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자기 탐닉에만 빠져듭니다. 사랑에는 열린 손과 열린 마음이 동반됩니다. 그러나 음욕에는 채울 수 없는 욕구만 있을 뿐입니다.”(“내 영혼의 원수를 위한 자리는 없나니”, 리아호나, 2010년 5월호, 44~45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음욕을 일으키는 주범인 외설물이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설물은 이성 간에 정상적인 감정적, 낭만적, 영적 관계를 누리는 능력을 망가뜨립니다. 그것은 부적절하고 비정상적이거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항하는 도덕적 장벽을 좀먹습니다. 양심이 무디어짐에 따라 외설물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칠 영향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이 본 대로 행동하도록 이끌리게 됩니다.”(“외설물”, 리아호나, 2005년 5월호, 89쪽)
마태복음 5:29~30. “빼어 내버리라”
조셉 스미스 역에서는 구주께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글자 그대로 신체 일부분을 베어 버리거나 손상시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구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를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죄에 관한 비유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찍혀 불에 던지우지 않도록 너희 죄를 던져 버리라.”(Joseph Smith Translation, Matthew 5:34 )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던져 버리고 죄를 짓게 하는 장소, 사람들, 상황을 멀리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 강력한 비유를 사용하셨다.(마태복음 5:29~30; 18:8~9; 마가복음 9:43~48조셉 스미스 역, 마가복음 9:40~48[경전 안내서] 참조)
조셉 필딩 스미스(1876~1972) 회장은 “오른쪽 눈”이나 “오른쪽 손”이라는 말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는 신성한 계명에 정직하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힘써] 이끄는 가까운 친구나 친척들”을 의미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친구나 친척이 한 사람을 계명에서 멀어지도록 이끌려고 노력한다면 그를 따라 악한 행위를 하여 멸망으로 들어가기보다는 그 사람과의 우정과 관계를 버리는 편이 낫다.”Answers to Gospel Questions, 5 vols. [1957–66], 5:79)
마태복음 5:43.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지만, 구약전서에 원수를 미워하라고 명하는 성구는 없다. 구주께서는 당시에 흔히들 하는 말을 거론하신 것으로 보인다. 1946년에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는 그리스도 당시의 일부 유대인이 실제로 자기 지역 사회의 이웃들은 사랑하되 외부인은 미워하라고 가르쳤음을 밝혀 준다.(Dana M. Pike, “Is the Plan of Salvation Attested in the Dead Sea Scrolls?” in Donald W. Parry and Dana M. Pike, eds., LDS Perspectives on the Dead Sea Scrolls [1997], 93, note 19)
마태복음 5:44; 누가복음 6:12, 14~15.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제일회장단의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은 용서가 갖는 치유력에 대해 가르쳤다.
“[타인이 상해를 가할 때] 우리가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은 분노입니다. 어쩌면 우리나 우리의 가족에게 상해를 가한 누구에게든 ‘그대로 갚아주겠다’고 바라는 것을 정당화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가치관의 실현이라는 주제에 관해 권위자로 알려진 시드니 사이몬 박사는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용서를 훌륭하게 정의했습니다.
‘용서는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원한을 부여잡고 분노를 품으며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덧나게 하는 데 사용되었던 에너지를 더 나은 곳에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가지고 있었던 힘의 재발견이며,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무한한 능력을 되찾는 것이다.’[with Suzanne Simon, Forgiveness: How to Make Peace with Your Past and Get on with Your Life(1990), 19] …
… 그 일을 잊고 우리의 마음을 비워 점점 커지는 분노를 없애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구주께서는 그분의 속죄를 통하여 소중한 평화를 우리 모두에게 주셨지만 이것은 우리가 분노, 악의, 또는 복수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기꺼이 던져 버릴 때에만 올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Joseph Smith Translation, Matthew 6:13], 심지어는 심각한 죄를 범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속죄로 인한 평화와 위안이 오게 됩니다.
… 저의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교리와 성약 64:10]는 구주의 훈계에 따를 때 우리에게 올 수 있는 치유의 힘이 있음을 믿습니다.”(“용서가 낳는 치유의 힘”,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68~69쪽)
용서에 관한 구주의 가르침을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18:21~22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 너희도 온전하라”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장로는 마태복음 5장 48절에 사용된 온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했다.
“온전함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완전한’이라는 뜻의 텔레이오스(teleios)에서 번역되었습니다. … 이것을 부정사로 표현하면 ‘목적지에 도착함, 완전히 개발됨, 성취함, 끝마침’이라는 뜻의 텔레이오노(teleiono)입니다. 이 단어가 실수가 없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멀리 있는 목적을 달성함이라는 뜻임을 주목하십시오. …
온전함을 향한 가장 진지한 노력이 지금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온전함은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온전함은 부활한 뒤 주님을 통해서만 옵니다. 온전함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언젠가는 실현될 온전함”, 리아호나, 1995년 11월호, 86, 88쪽)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여러분이 사다리에 오를 때에는 아래부터 시작하여 한 계단씩 올라가야만 위에 이를 수 있습니다. 복음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시작하여 승영의 원리를 모두 다 배울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들을 모두 배우게 되는 것은 휘장을 통과하고 나서도 한참 후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무덤을 넘어서서도 우리가 구원과 승영에 대해 배울 것은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 , 268쪽)
마태복음 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여기서 “의[Alms]”라는 것은 의로운 행동 또는 종교적인 헌신을 말하며, 여기에는 봉사 활동이나 자선 활동이 포함된다.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우리의 봉사가 의로운 이유로 행해져야 한다는 구주의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적인 보상을 바라기 때문에 봉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수입을 늘리거나 부를 얻을 목적으로 더 높은 지위를 얻거나 인간관계를 넓히기 위해 교회 직책에서나 개인적으로 남을 돕는 일에서 열심히 봉사할 것입니다. 세상의 명예나 명성이나 권력을 얻기 위해 봉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이와 반대로 은밀하게 조용히 봉사하는 자들에게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드러내어 네게 갚으시리라.’ (제3니파이 13:18; 또한 마태복음 6:4 참조)라고 구주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사랑(charity)은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 (모로나이서 7:47)입니다. 몰몬경은 이 덕성이 ‘모든 것 중에 으뜸이 되는’ (모로나이서 7:46)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하는 봉사가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정화하여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한 이유인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으로 서로 봉사하기를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우리는 왜 봉사합니까?”, 성도의 벗, 1985년 1월호, 13~15쪽)
마태복음 6:5.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구주께서 마태복음 6장 5절에서 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기도의 유형에 대해 설명했다. “독실한 유대인들은 정해진 시간에 예루살렘으로 얼굴을 향하고 자신들의 머리를 덮고 눈은 아래로 보며 보란 듯이 기도 의식을 거행했다. 길가에 있을 때 기도 시간이 된다면 더 좋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독실함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남의 주의를 끌기 위해 회당에서 큰 소리로 개인 기도를 드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관습이 그러했다.”(The Mortal Messiah: From Bethlehem to Calvary, 4 vols. [1979–81], 2:147)
마태복음 6:7. “중언부언”
십이사도 정원회의 조셉 비 워스린(1917~2008) 장로는 “중언부언”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우리 기도에서 그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우리가 비슷한 말을 비슷한 방식으로 너무 자주 반복하여 기도가 의사소통이 아니라 암송이 될 때, 우리의 기도는 공허해집니다. 이것이 구주께서 ‘중언부언’(마태복음 6:7 참조)이라고 묘사하신 것입니다. …
때때로 우리의 기도가 똑같이 들린다고 느껴지십니까? 기도를 기계적으로, 즉 기계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듯한 말로 기도를 드려 본 적이 있습니까? 기도를 하면서 때때로 싫증을 느낍니까?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은 기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주의를 끌 가치가 있을까요? 자신이 상투적인 기도를 하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는 멈추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정말로 감사하고 있는 것들에 관해 잠시 동안 명상해 보십시오. 그것들을 찾아보십시오. 대단하거나 눈부신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
여러분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에 관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목표와 소망과 꿈을 주님께 가져가 그분 앞에 놓으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분에게 다가와 그분의 신성한 도움을 간구하기를 바라십니다.”(“우리의 기도를 향상시킴”, 리아호나, 2004년 8월호, 16, 18쪽)
마태복음 6:8.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아신다면 축복을 간구하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주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우리가 바라는 축복을 주님께서 주실 수 있다는 신앙을 발휘하며, 궁극적으로 모든 축복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한다. 우리가 적절하게 접근한다면,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을 평가하고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출 수 있게 된다.
데이비드 이 소렌슨 장로는 우리가 기도하는 한 가지 이유는 기도하는 과정이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는 이유는 기도라는 행위 자체가 우리를 향상시키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합니다. 분명히, 우리의 창조주이신 그분은 우리의 걱정과 염려와 기쁨과 고난을 우리가 그분께 알려드리지 않아도 이미 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요구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이 이미 아시지 않는 뭔가를 말씀드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기를 배우는 과정이 우리의 생활을 형성하고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기도”, 성도의 벗, 1993년 7월호, 31쪽)
우리는 또한 주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지만 우리에게 간구하도록 요구하시는 축복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기도는 아버지의 뜻과 자녀의 뜻이 하나로 모아져 일치하게 하는 행위이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및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미 기꺼이 허락하고자 하지만, 우리가 구해야만 얻을 수 있는 축복들을 받기 위한 것이다. 축복은 그것을 얻기에 앞서 우리가 해야 할 일, 또는 노력을 요한다. 기도는 일의 한 형태이며 모든 축복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을 얻기 위해 고안된 수단이다.”(Bible Dictionary, “Prayer”)
마태복음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러셀 엠 넬슨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은 주기도문을 소개하기에 앞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중언부언’[마태복음 6:7]을 피하고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태복음 6:9]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기도문은 따라야 할 기도의 모형을 제시하는 것이며 외우고 반복해서 암송해야 할 문장은 아닙니다.”(“주기도문에서 배우는 교훈”, 리아호나, 2009년 5월호, 46~47쪽)
마태복음 6:9.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기도에 사용하는 특별한 언어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을 드릴 때 특별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성전이나 교회에 가서 예배드릴 때, 우리는 평상복을 벗고 더 좋은 옷으로 단장합니다. 이렇게 옷을 갈아입는 것도 존경을 표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드릴 때, 우리는 일상적인 언어를 피하고 공손함과 존경이 담긴 특별한 언어로 말씀드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 회원들은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동료들이나 고용주, 고용원, 시장에 있는 점원 등에게 하는 것과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감받은 대화에서 사용되어 거룩하게 된 말들과 우리가 선지자와 영감받은 교사로 지지하는 분들이 권유하고 본보기로 사용한 말들을 사용합니다.
기도에 사용되는 이러한 특별한 언어는 언어마다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하지만, 그 원리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할 때, 어떤 언어든 간에 사랑과 존경과 경건함과 친근감을 느끼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기도의 언어”, 성도의 벗, 1993년 7월호, 15~16쪽)
마태복음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교회 회장으로서 성도들에게 현재 복음 선포가 금지된 지역들의 문이 열리도록 주님께 기도로 간구할 것을 요청했다.
“교회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178년 전에 조직된 이래로 그래왔습니다. … 그렇지만 세계 여러 곳에는 우리의 영향이 잘 미치지 않고 자유롭게 복음을 나누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지역들도 있습니다. 32년 전에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님이 그랬듯이, 저도 여러분에게 그러한 지역이 개방되어 그들과 복음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날이 오도록 기도하도록 촉구하는 바입니다. 그 당시에 우리가 킴볼 회장님의 간청에 따라 기도했을 때, 그 이전에는 교회에 대해 굳게 닫혀 있던 나라들이 하나씩 열리는 기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기도할 때 그러한 일들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대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리아호나, 2008년 11월호, 6쪽)
마태복음 6:13.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조셉 스미스 역을 보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시험으로 이끄시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버려두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조셉 스미스 역, 마태복음 6:14[경전 안내서]; 또한 야고보서 1:13 참조)
마태복음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조 제이 크리스턴슨 장로는 칠십인 회장단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이런 가르침을 전했다.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것에 시간과 돈과 생각을 투자하는지 평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탐욕과 이기심과 지나친 방종”, 리아호나, 1999년 7월호, 11쪽)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세상의 구주께서는 보물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복음 6:19~21]
약속된 상은 상아나 금은 보화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넓은 땅도 아니었으며 증권이나 주식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는 부, 즉 이 세상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내세의 영원한 행복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보물을 찾아서”, 리아호나, 2003년 5월호, 19쪽)
마태복음 6:22.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이 구절에 사용된 성하다[Single]라는 단어는 “건전한, 건강한, 단순한, 진지한”이란 뜻의 그리스어에서 왔다. 이 정의를 아는 것은 의를 행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과 관련하여 구주께서 주신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 또는 그 대상자에 대해 단순하고 진지하게 초점을 맞추어 행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볼 수 있다. 나는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 돌리기를 원하는가? 주님께 봉사할 때, 나는 주님이나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기 위해 그렇게 하는가? 사람들 앞에서 기도할 때, 나는 하나님께 이야기하는가, 아니면 청중에게 이야기하는가? (니파이후서 2:30; 교리와 성약 88:67~68; 모세서 4:2; 조셉 스미스—역사 1:46 참조)
마태복음 6:24.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재물[Mamon]이라는 단어는 “세상의 부” 또는 “재산”을 뜻하는 아람어에서 왔다.
마태복음 6:25~34. “염려하지 말라”
흠정역 마태복음 6장 25, 34절의 “염려하지 말라”라는 문구는 그리스어 원전에 따르면 과도하게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다.(또한 마태복음 6:27~28, 31 참조. 누가복음 10:41과 빌립보서 4:6~7의 동일한 의미와 비교) 이 성구를 조셉 스미스 역과 제3니파이 13장 25~34절에서 찾아보면, 이 가르침들이 구체적으로는 사도들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우리 각자에게도 또한 적용될 수 있다.(교리와 성약 84:81 참조) 주님께서는 세상적인 염려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잃거나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는 일에서 벗어나지는 말라고 가르치신다.
마태복음 6:33. 먼저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
에즈라 태프트 벤슨(1899~1994) 회장은 삶에서 다른 모든 것보다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을 우선으로 두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앞세울 때, 다른 모든 것들은 제자리를 찾아가거나 우리 삶에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애정과 시간을 바치는 것과 우리가 추구하는 관심사와 우선순위 등 모든 것을 좌우할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
우리는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우리 삶에서 독점적 최우선 순위를 드려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복리에 대해 부모로서의 권리를 갖고 계시며, 이는 지상에서나 내세에서 우리가 맺게 되는 다른 모든 유대 관계보다 우선합니다.”(“큰 계명 - 주님을 사랑함”, 성도의 벗, 1988년 7월호, 5쪽)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도 비슷한 말을 했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기를] … 구하라’[조셉 스미스 역, 마태복음 6:38]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그분의 사업을 우선순위에서 으뜸으로 두라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그분의 자녀에게 영생을 가져오는 것과(모세서 1:39 참조) 그에 수반된 모든 일을 뜻합니다. … 누군가 말했듯이, 먼저 하나님의 왕국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택하든 결과적으로 별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초점과 우선 순위”, 리아호나, 2001년 7월호, 100~101쪽)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12:30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6:34.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에 나오는 구주의 권고인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 6:34)라는 말은 “내일 일까지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오늘 할 일만으로도 충분하다.”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7:1. 의로운 비판을 하라
조셉 스미스 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주의 말씀을 명확히 밝혀 준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불의하게 비판하지 말고 의로운 비판을 하라.”(조셉 스미스 역, 마태복음 7:2[경전 안내서])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이 가르침과 그 적용에 대해 설명하며 다음 원리에 근간을 두었다. “비판, 또는 판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최종적인 판단은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내려야 할 것은 중간 평가이며, 이는 의로운 원리에 입각한 것이어야 합니다.
첫째, 의로운 판단은 그 정의상 중간 평가여야 합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승영을 보장받았다거나 지옥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을 금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승영을 위한 모든 기회를 상실했다거나 심지어 주님의 사업에서 유용한 역할을 할 모든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선언하는 것을 금합니다. 복음은 희망의 복음입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적절한 조건에 따라 개인의 죄를 씻어 주고, 용서를 가져오며, 삶을 개선시키는 속죄의 권능을 부인할 권한이 없습니다.
둘째, 의로운 판단은 주님의 영의 인도를 받으며, 분노, 복수, 질투, 또는 자기 이익을 따르지 않습니다. …
셋째, 중간 평가가 의로운 비판이 되려면 자신이 맡은 직분의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개인적 책임 범위 밖의 일에 대해 비판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
넷째, 가능하다면 우리는 사실을 충분히 알 때까지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 …
의로운 중간 평가의 다섯째 원리는 가능한 모든 경우에 우리는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피하고 오직 상황을 판단해야 합니다. … 우리는 자신과 가정을 위해 높은 표준을 세우고 실천하되, 그렇게 하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
여섯째, 용서는 [이] 계명의 짝이 되는 원리입니다. … 현대의 계시에서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나 주는 내가 용서할 자를 용서하려니와, 너희에게는 모든 사람을 용서할 것이 요구되느니라.’(교리와 성약 64:10)
일곱째, 의로운 판단의 마지막 요소 또는 원리는 의로운 표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Judge Not’ and Judging,”Ensign, Aug. 1999, 9–12)
마태복음 7:1~5. “비판하지 말라”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남을 향한 비판을 삼가야 할 필요성을 보여 주는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젊은 부부인 리사와 존은 어떤 지역으로 새로 이사를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던 중 리사는 창문으로 이웃이 빨래를 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리사가 외쳤습니다. ‘빨래가 깨끗하지 않잖아! 저 사람은 빨래할 줄을 모르나 봐!’
존은 잠자코 보기만 했습니다.
그 이웃이 빨래를 널 때마다 리사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몇 주 후, 리사가 창 밖을 내다보니 놀랍게도 이웃의 뜰에는 잘 세탁된 빨래가 널려 있었습니다. 리사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존, 여기 좀 봐요. 드디어 이웃 여자가 빨래를 제대로 하게 되었네요. 어떻게 배웠을까요?’
존이 대답했습니다. ‘여보, 그 답을 알려 줄까? 내가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우리 집 창문을 닦았거든!’
오늘 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더러운 창을 통해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판단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볼 때 무엇을 보십니까? 그 사람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립니까? …
우리 중에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불완전하면서도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남에게서 흠을 찾아내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 혹은 하지 않느냐를 판단합니다.
누군가가 비난받아야 마땅한 어떤 말이나 행동을 했다 치더라도 우리는 실로 그 사람의 마음이나 의도, 또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알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계명이 주어졌습니다. ‘비판하지 말라.’”(“사랑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122쪽)
마태복음 7:3~5. 티와 들보는 무엇인가?
티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아주 작은 점, 조각, 또는 파편을 가리킨다. 들보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집을 지을 때 쓰이는 커다란 나무 들보를 뜻한다. 구주께서 티와 들보를 들어 하신 말씀은 과장법, 즉 뜻을 전달하기 위해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는 하나의 비유법이다.(마태복음 5:29; 19:24와 비교) 이 성구에 나오는 구주의 가르침은 우리의 초점을 남의 잘못에서 나의 잘못으로 돌리게 한다.
마태복음 7:7. 구하고, 찾고, 두드리십시오
십이사도 정원회의 리차드 지 스코트 장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라고 가르쳤다.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에게 필요 사항과 소망을 당신께 표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타협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어떤 지시든지 그분의 뜻을 따르겠다는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을 것이요’(제3니파이 27:29)라고 하신 그분의 말씀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합당하다면, 여러분을 온전히 사랑하시고 여러분보다 더 여러분의 영원한 행복을 바라시는 아버지의 판단에 따라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는다는 뜻입니다.”(“주님을 신뢰함”, 성도의 벗, 1996년 1월호, 17쪽)
산상수훈의 대부분이 군중에게 주어진 것인 데 반해(마태복음 5:1 참조), 조셉 스미스 역에서는 마태복음 7장 1~28절에 기록된 구주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이었음을 알 수 있다.(조셉 스미스 역, 마태복음 7:1[경전 안내서] 참조)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우리가 단순히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공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쳤다.“예수께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자들에게 요구하신 개심에는(마태복음 18:3 참조) 그저 복음이 진실함을 증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훨씬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간증한다 함은 알고 선언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개심’할 것을 권유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행해야 하고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전적으로 복음 지식과 간증에만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 ‘개심’[누가복음 22:32 참조]하도록 권유받았던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축복은 받았으나 여전히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무엇인가 되어야 하는 과제”, 리아호나, 2001년 1월호, 41쪽)
마태복음 7:23.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는 문구는 조셉 스미스 역에서 “너희가 도무지 나를 알지 못하였나니”로 변경되었다.(Joseph Smith Translation, Matthew 7:33) 이와 비슷하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라는 문구는 조셉 스미스 역에서 “너희가 나를 알지 못하노라”로 변경되었다.(Joseph Smith Translation, Matthew 25:11) 우리는 이렇게 자문할 수 있다. “우리 마음속에서 복음이 활기를 띠지 않는데 교회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가능할까?”
마태복음 7:29.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구주께서 권세를 지니고 서기관들과는 다르게 가르치신 것에 대해 이해하려면 마가복음 1:22 주해를 참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