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누가복음 18~22장
누가복음 18~22장 소개 및 연대
누가복음 18~22장은 구주의 지상 성역 마지막 주간에 그분이 예루살렘을 향하신 과정과 거룩한 성에 도착하신 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전한다. 이 장들은 누가복음 15장에 소개된 중요한 주제,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오셨다는 주제를 보조한다.(누가복음 19:10; 또한 누가복음 15:6, 9, 24 참조) 따라서, 이 장들은 사회와 하나님에게서 스스로 멀어진 개인들에 대한 그분의 동정심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과부는 사회의 가장 취약한 사람에 속하며 세리는 가장 경멸을 받는 계층 중 하나인데도, 누가복음에 유일하게 기록된 구주의 두 가지 비유에서 그들은 긍정적인 본보기로 나온다.(누가복음 18:1~14 참조) 또한 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타락해서 구속받을 수 없다고 여겨졌던 세리장 삭개오의 개종을 기록했다.(누가복음 19:1~10 참조) 누가복음 18~22장은 구주께서 겟세마네에서 겪으신 고통으로 끝이 난다. 그 고통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이다.(니파이전서 10:6 참조)
누가복음 18~22장 주해
누가복음 18:1~8. 끈질기게 조르는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
누가는 끈질기게 조르는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에 담긴 주요 메시지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소개했다.(누가복음 18:1) “낙심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무엇에 대해 낙담하거나 지치거나 싫증이 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비유에서는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을 재판장에게 불의를 바로잡아 달라고 계속해서 호소하는 과부로 묘사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외롭고 쓸쓸하며 힘든 시기가 찾아올 때, 우리는 견디며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주께서 끈질기게 조르는 과부의 비유에서 주신 메시지였습니다. … 계속 문을 두드리십시오. 계속 애원하십시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며 여러분의 고통을 아신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분은 여러분의 아버지이시며, 여러분은 그분의 자녀입니다.”(“Lessons from Liberty Jail,” Sept. 2009, 30) 끈기는 신앙과 소망이라는 기본 복음 원리를 뿌리로 한다. 끈기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 우리 삶에 주님의 축복이 임할 것이라는 신앙을 나타낸다.
이 비유는 구주께서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사람의 불완전함과 대비함으로써 그분의 완전성에 대해 가르치신 또 하나의 예이다.(누가복음 11:5~8, 11~13; 누가복음 11:5~10 주해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만약 사악한 판사가 불쌍한 과부에게 관심조차 없는데도 결국에 그녀의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렸다면, 당신의 성도들을 사랑하시는 온 지상의 재판관께서도 분명 당신이 오실 때에, 그 복수의 날에 당신의 택함받은 백성을 위해 모든 적에게 복수해 주실 것이다.”(The Mortal Messiah: From Bethlehem to Calvary, 4 vols. [1979–81], 3:289)
누가복음 18장 3, 5, 7~8절에서 “원한[avenge]”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정의를 베풀다, 정의가 실현되게 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주께서 재림에 관해 가르치면서 언급하신 이 비유는 주님이 재림 때와 그 후 복천년 동안 성도들을 위해 정의가 실현되게 하실 것임을 뒷받침한다.(누가복음 17:20~37; 18:8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이생에서 받지 못한 아주 중요한 많은 축복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합당한 자녀를 위한 위대한 행복의 계획에서 불완전한 모든 것이 성취될 복천년 기간에 바로잡혀질 것입니다.”(“위대한 행복의 계획”, 성도의 벗, 1994년 1월호, 75쪽)
누가복음 18: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누가는 구주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누가복음 18:9) 사람들에게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이야기하셨다고 기록했다. 아마 이 비유를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일반적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율법에 매우 순종하는 사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세금 징수관이었던 세리들은 미움받고, 배척당했으며, 타락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창녀나 죄인과 같은 부류로 분류되곤 했지만, 많은 세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흔쾌히 받아들였다.(마태복음 21:31~32; 마가복음 2:15~16; 누가복음 15:1 참조) 사복음서에는 구주께서 기꺼이 듣고, 가르침받으며, 자신의 삶을 영원히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신 사례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분은 독선적이거나 교만하거나 위선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 비유에서 하셨던 것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단호하게 그들의 행동을 맹렬히 비난하셨다. 구주께서는 교만과 겸손에 관한 비유의 교훈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 18:14; 또한 교리와 성약 52:15 참조)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 회장은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감사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으며, 바리새인과 세리의 대비는 겸손과 통회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고 가르쳤다.
“이 두 사람의 기도에서 크게 대조되는 것이 있습니까? 바리새인은 자신이 보통 사람이라고 여긴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가 더 훌륭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따로 섰습니다. 세리도 따로 섰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 합당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을 죄인으로 여겼으나, 세리는 자신이 죄인인 것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단지 자신의 의로움에만 의존했습니다. 세리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와 자비를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누가복음 18:14) 다시 말해서, 주님은 그가 용서받고, 사함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겸손함이란 진실한 성도들이 지니고 있는 신의 성품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실패하는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는 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 교만한 사람은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 그는 이미 더 이상 빛 가운데서 거하지 못하게 됩니다. …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졌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는 어디나 바리새인과 세리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으로 우리도 불리게 될 것입니다.”(“바리새인과 세리”, 성도의 벗, 1984년 7월호, 99쪽)
누가복음 18:15~43. 이 교재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주해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구주의 성역 중에 있었던 가르침과 사건의 다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나온다. 이런 가르침과 사건에 대한 주해를 이 학생 교재의 어느 부분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다음 도표에서 확인한다.
누가복음에서 각 주제가 나오는 위치 |
이 교재에 나오는 주해 |
---|---|
누가복음 18:15~17. 구주께서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셨다. | |
누가복음 18:18~30. 구주께서 부유한 관리에게 말씀하셨다. | |
누가복음 18:31~34. 구주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셨다. | |
누가복음 18:35~43. 예수께서 맹인을 고치셨다. |
누가복음 19:1~10. 삭개오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었다. 여리고를 지나실 때, 그분은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셨다. 삭개오는 선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으며, 필요한 경우 모세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네 갑절”이나 배상해 주었다.(레위기 5:16; 민수기 5:7 참조)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진실하고 결연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들”의 전형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는 멸시받는 세리였을 뿐만 아니라 “세리장”의 위치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유대인인 세리들에게서 아브라함의 선택된 후손이 되는 권리가 박탈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삭개오를 친근하게 대하고 구원을 주셨으며,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확언하셨다. 구주께서 하신 다음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구주께서 그를 어떻게 여기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1~10 참조)
구주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신 것에 대해 더 많은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마가복음 2:15~17 주해를 참조한다.
몰몬경의 선지자 니파이가 간증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두에게 그에게로 나아와 그의 선하심에 참여하도록 권하시며, 또 그는 그에게로 나아오는 자는 … 아무도 거절하지 아니하”신다.(니파이후서 26:33)
누가복음 19:11~27. 므나의 비유
므나의 비유와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는 몇 가지 유사점을 보인다. 두 비유 모두 먼 나라로 떠나는 주인이 종들에게 다양한 액수의 돈을 맡기며 그 돈을 유용하게 쓰게 한다. 주인이 돌아와 종들과 결산할 때, 자신이 준 선물을 잘 사용하여 이윤을 남긴 종들에게는 보상해 주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이들은 꾸짖는다. 그러므로, 두 비유는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책임을 잘 활용하여 그분이 돌아오실 때를 잘 준비할 것을 가르친다.(또한 마태복음 25:14~30 주해 참조)
하지만 므나의 비유에서는 주님께서 앞으로 복천년 동안 통치하실 것에 대한 또 다른 진리를 가르친다. 이 비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서 거절당하실 것이며(누가복음 19:14 참조), 왕으로서 그곳을 당장 다스리시지는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누가복음 19:11 참조)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 비유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셨다. 그분은 약 십 일 후에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것이며, 대부분의 유대인에게는 그분이 약속된 메시야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 실패하신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메시야 왕이 통치자로서 모든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정치적인 왕국이자 ‘당장에 나타날’ 복천년 왕국을 의미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기 위해, 예수께서는 므나의 비유를 주셨다. …
귀인은 그리스도이고, 먼 나라는 하늘 나라이다. 그곳에서 그가 받은 왕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이다.(마태복음 28:18) 그가 약속한 귀환은 영광스러운 재림으로, 그때가 되면 글자 그대로 눈에 보이는 실제 왕국이 지상에 세워질 것이다. … 종들은 주님의 사명을 띠고 그분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포도원에서 일하라는 명을 받았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965–73], 1:571–72)
누가복음 19:28~21:33. 이 교재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주해
누가복음 19~21장에 나오는 구주의 성역 중에 있었던 가르침과 사건의 다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요한복음 그리고 조셉 스미스—마태에도 나온다. 이런 가르침과 사건에 대한 주해를 이 학생 교재의 어느 부분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다음 도표에서 확인한다.
누가복음에서 각 주제가 나오는 위치 |
이 교재에 나오는 주해 |
---|---|
누가복음 19:28~40. 승리의 입성 | |
누가복음 19:41~44. 예루살렘에 대한 구주의 탄식 | |
누가복음 19:45~48.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 | |
누가복음 20:1~8. “무슨 권위로”? | |
누가복음 20:9~18. 사악한 농부들 | |
누가복음 20:19~26. 가이사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 |
누가복음 20:27~38. 부활 때의 결혼 | |
누가복음 4:41~44. 다윗의 자손과 하나님의 자손 | |
누가복음 20:45~47. 서기관들에 대한 비난 | |
누가복음 21:1~4. 과부의 렙돈 | |
누가복음 21:5~38. 예루살렘의 파괴와 재림 |
누가복음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제일회장단의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장은 누가복음 21장 19절의 의미를 이렇게 가르쳤다. “인내는 온전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구주께서도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21:19 참조] 다른 그리스어 번역본에는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의 참 주인이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내는 우리가 받는 것보다 기다리는 과정 속에서 더 많이 성장한다는 것을 알고, 신앙을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구주의 시대에도 그러했고, 이는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후기에 우리도 ‘너희가 온전하게 되기까지 계속하여 인내하라’라는 계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교리와 성약 67:13]”(“계속 인내하십시오”, 리아호나, 2010년 5월호, 59쪽)
누가복음 21:24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의 때”라는 문구가 성경에서는 누가복음 21장 24절에 유일하게 나오며, 후기의 계시에도 세 차례 등장한다.(교리와 성약 45:25, 28, 30 참조) 신약 시대 때 복음은 먼저 유대인에게, 그런 다음 이방인들에게 전해졌다.(로마서 1:16 참조) 후기에는 회복된 복음 메시지가 먼저는 이방인 나라에 전해지고, 그런 다음에는 유대인들에게 전해지게 된다.(교리와 성약 133:8 참조) 이방인들이 우선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이방인의 때”라고 부른다.
조셉 필딩 스미스(1876~1972)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방인의 때는 우리 구속주께서 돌아가신 직후에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곧 복음을 거절했으며, 그러고 나서 바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 이방인의 때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었다.”(Church History and Modern Revelation, 2 vols. [1953], 1:196) 또한 스미스 회장은 이방인의 때가 찬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모든 나라로 흩어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힐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1:24) 교리와 성약 45편 24~29절에 나오는 유대인들에 관한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짓밟힌 예루살렘은 더는 짓밟히지 않을 것이며, 유대인들의 고향이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고 있으며, 이로써 우리는 이방인의 때가 거의 끝나감을 알 수 있습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66, 13)
누가복음 21:34~36.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
누가복음 21장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재림에 관한 구주의 가르침 중 다수는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 및 조셉 스미스—미태에도 나온다. 하지만, 오직 누가만이 다음과 같은 구주의 경고를 기록했다. 만일 사람들이 “방탕함[욕구에 탐닉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걱정과 스트레스]로 마음이 둔하여지[면][짓눌리면]”(누가복음 21:34), 그들은 그분의 재림을 위한 준비를 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시대에 방탕함과 술취함에 관한 이 경고는 구주의 다음 선언과 유사하다. 마지막 시대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던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다.(마태복음 24:37~39) 후기에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지혜의 말씀을 계시하셨는데, 여기에는 술과 해로운 약물을 삼가라는 계명이 포함되어 있다.(교리와 성약 89:4~7, 18~21 참조) 이 계명에 순종하면, 신체적 건강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구주를 만날 준비를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장은 생활의 걱정과 스트레스에 압도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를 가르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현명한 사람들은 “매일 미친 듯이 인생을 질주하고 싶은 유혹에 저항합니다. 그들은 ‘인생에는 속도를 높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라는 조언을 따릅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들에 초점을 맞춥니다.”(“가장 중요한 것들”, 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20쪽)
누가복음 21:37~38. 성전에서 가르치다
사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자주 가르치셨음을 입증하는 성구가 많이 나온다. 그분은 지상 생활의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매일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마태복음 26:55; 마가복음 14:49; 누가복음 19:47; 22:53 참조)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모범을 따라 계속해서 성전에서 가르쳤다.(사도행전 2:46; 5:42 참조)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 점에서도 예수는 우리에게 완전한 모범이 되신다.
누가복음 22장. 이 교재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주해
누가복음 22장에 나오는 구주의 성역 중에 있었던 가르침과 사건의 다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요한복음에도 나온다. 이런 가르침과 사건에 대한 주해를 이 학생 교재의 어느 부분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다음 도표에서 확인한다.
누가복음에서 각 주제가 나오는 위치 |
이 교재에 나오는 주해 |
---|---|
누가복음 22:1~6.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으며, 유다는 그분을 배반할 준비를 했다. | |
누가복음 22:7~18. 최후의 만찬이 베풀어졌다. | |
누가복음 22:21~23. 예수께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셨다. | |
누가복음 22:24~27.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자인지에 대한 다툼을 벌였다. | |
누가복음 22:33~38. 예수께서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예언하셨다. | |
누가복음 22:47~53. 유다가 구주를 배반했다. | |
누가복음 22:54~62.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했다. | |
누가복음 22:63~71. 대제사장들 앞에서 재판이 열렸다. |
누가복음 22:19~20.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누가와 바울은 둘 다 구주께서 빵과 포도주의 상징을 소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가르치셨다고 기록했다.(누가복음 22:19; 고린도전서 11:24) 조셉 스미스 역은 성찬의 목적이 구주를 기억하도록 하는 데 있음을 뒷받침한다. 조셉 스미스 역에는 “기억하라”와 “기념하여”라는 용어가 덧붙여져 있다.(조셉 스미스 역, 마태복음 26:22, 24~25[경전 안내서]; 조셉 스미스 역, 마가복음 14:20~25[경전 안내서]; 제3니파이 18:7, 11 참조) 유대인의 언어와 관습에서,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회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다시 경험하고, 다시 확인하며, 다시 결심한다는 뜻이었다.
유월절 식사가 그랬듯이, 유대인의 관습에 깃든 주된 목적은 기억하는 것이었다. 유월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님께서 조상들을 속박에서 구해 주신 것을 기념했는데, 상징적인 식사와 그에 따르는 구출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유월절을 기념함으로써 그들은 각자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또한 주님과 그분의 백성들에 대한 개인적인 충실함을 언명했다. 마찬가지로, 구주께서 유월절에 제정하신 성찬은 유월절 식사를 대신하는, 기억하기 위한 상징적인 “식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성찬을 취함으로써 그분이 이루신 속죄의 축복을 다시 경험하며, 그분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충성심을 재확인하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다시 할 수 있다. 성찬의 상징에 관하여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마태복음 26:26~28 주해 및 누가복음 26:26~29 주해를 참조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성찬식 동안 기억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몇몇 진리들을 이렇게 말했다.
“만약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주된 과제라면, 그 평범하고도 귀한 상징물이 전달될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기억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구주의 전세 생활과 하늘과 땅과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신 위대하신 여호와께서 행하셨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 회의에서조차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매우 강하셨으며, 우리는 그곳에서도 그리스도의 권능과 어린 양의 피에 대한 우리의 신앙으로 승리를 거두었음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요한계시록 12:10~11 참조)
우리는 …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그분의 육신의 탄생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기적과 가르침, 치유와 도움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맹인에게는 시력을, 못 듣는 자에게는 청력을 주셨으며,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마르는 병에 걸린 자들에게는 활동의 능력을 주셨음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성장이 정지되거나 우리의 기쁨과 안목이 흐려진다고 느낄 때에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과 소망의 완전한 밝은 빛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믿는 굳건함을 지니고 힘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니파이후서 31:19~20 참조)
구주께서는 자신에게 장엄한 사명이 주어졌지만, 삶에서 기쁨을 찾았고, 사람들과 즐거워했으며, 제자들에게는 안심하라고 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마치 현관에서 위대한 보물, 즉 매우 진귀한 진주를 실제로 발견한 사람들이 기뻐하듯 우리도 복음을 기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친구라 하셨으며, 친구란 외롭고 절망적일 수 있는 시기에 우리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일들과 ‘선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모로나이서 7:24) …
언젠가 우리는 그분께서 받으신 몰인정한 대우, 그분께서 경험하신 거부, 그리고 그분이 견디셔야 했던 불공평을 기억해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그러한 것들을 겪을 때 그리스도께서도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셨음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고린도후서 4:8~9 참조)
그런 어려운 시기가 닥쳐올 때 우리는 예수께서 만물 위로 오르시기 전에 그 아래로 내려오셨으며, 고난과 고통과 온갖 종류의 유혹에 시달리시면서 자비로 충만해지셨고 어떻게 연약한 백성들을 도울 수 있는지를 알게 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교리와 성약 88:6; 앨마서 7:11~12 참조)
그분은 비틀거리고 흔들리는 사람들 곁에 항상 계시며 그들을 강화하십니다. 결국,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곳에 계시며, 이 모두를 위해 그분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
이 모든 것이 바로 제사 신권을 소유한 어린 형제들이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를 항상 기억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구할 때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입니다.”(“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성도의 벗, 1996년 1월호, 68~69쪽)
누가복음 22:28~30.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누가복음 22장 28절은 광야에서 받은 세 가지 시험이 구주께서 유혹과 시련, 시험을 직면한 유일한 시기는 아니었음을 상기시킨다.(마태복음 4:1~11; 누가복음 4:1~13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셨다.(히브리서 4:15) 지상 생활의 끝이 다가오자, 구주께서는 사도들에게 자신이 유혹과 시험을 받을 때 그들이 자신과 함께했다는 것을 상기시키셨다.(누가복음 22:28 참조) 그분의 성역 초기에 그들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이 질문으로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려 한 일들을 목격했다. 그들은 그분이 고향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롱받으실 때,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분노한 폭도들이 돌을 던져 그분을 죽이려 했을 때도 옆에서 이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그분이 지치고, 시장하며, 슬퍼하실 때에도 그분과 함께 있었다.
구주께서는 자신과 함께해 온 사도들에게 고마움을 표하신 후, 그들이 자신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며,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누가복음 22:29~30 참조)
누가복음 22:31.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누가복음 22장 31절에서, “너희”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대명사는 복수형으로, 구주께서 이 경고를 모든 제자에게 주셨음을 나타낸다. 밀을 까부르면 낟알과 겉껍질로 분리된다. 귀중한 낟알은 보관되지만, 하잘것없는 껍질은 버려진다. 만일 성도들이 유혹에 굴복하여 세상의 죄를 짓는다면, 그들은 세상과 구별되는 특수성을 잃어버려 껍질처럼 된다.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님은 사탄이 우리를 밀 까부르듯 하려 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 이 말은 사탄이 우리를 주변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만들려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고귀하고 특별한 ‘세상의 소금’이 되고(마태복음 5:13) 온 인류에게 빛을 가져다주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복음 5:14, 16; 제3니파이 18:24 참조)”(“비이기적인 봉사”, 리아호나, 2009년 5월호, 94쪽)
누가복음 22:32. “너는 돌이킨 후에 …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누가복음 22장 32절에 기록된 마지막 만찬에서 구주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개심하는 것의 중요성을 재차 확인하셨”다고 언급하며 “심지어 진리에 대한 간증을 가진 사람에게도 그 중요성이 조금도 덜하지 않다.”라고 설명했다.
“형제들을 굳게 하기 위해, 즉 하나님의 양들을 돌보고 인도하기 위해 삼 년이나 예수님을 따랐고, 거룩한 사도의 권세를 받았고, 그리스도 복음의 용감한 교사요 증언자였으며, 자신의 간증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복되다는 칭찬을 받은 그였지만, 여전히 그러한 그도 ‘개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자들에게 요구하신 개심에는(마태복음 18:3 참조) 복음이 진실함을 증거할 만큼 변하는 것 이상의 훨씬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간증한다 함은 알고 선언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개심’할 것을 권유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행함과 됨됨이가 요구됩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전적으로 복음 지식과 간증에만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 ‘개심’하도록 권유받았던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축복은 받았으나 여전히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강한 간증을 갖고 있으나 그 간증을 좇아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개심하지 않는 누군가를 알고 있습니다. …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 각자가 자신의 개심을 향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것을 향해 일할 때입니다.”(“무엇인가 되어야 하는 과제”, 리아호나, 2001년 1월호, 41쪽)
누가복음 22:39~44. 구주께서 겟세마네에서 겪으신 고통에 대한 상세한 사항
몇몇 현대 성경에는 누가복음 22장의 43~44절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모든 고대 그리스어 필사본의 누가복음에는 이 성구들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 증거로 볼 때, 사도들이 사망한 후 수 세기에 걸쳐 몇몇 필경사들이 이 성구들을 삭제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 필경사들은 그리스도의 고뇌가 묘사된 것을 당혹스러워했다. 이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고통을 겪는 대중적인 헬레니즘 이상과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성경 본문에 그러한 변경을 가한 것은 몰몬경의 선지자 니파이가 했던 다음 간증이 진실임을 증명해 준다. “그들이 어린 양의 복음에서 명백하고 극히 귀한 많은 부분들을 제하여 버렸음이요.”(니파이전서 13:26) 후기의 경전과 선지자들은 누가복음 22장 43~44절에 기록된 내용의 진실성을 증언한다.(모사이야서 3:7; 교리와 성약 19:18 참조) 겟세마네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기도와 고뇌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26:36 주해, 마태복음 26:37~39 주해 및 마가복음 14:32~36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22: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누가는 구주께서 겟세마네에서 고통을 받으실 때 천사가 나타나 그분에게 힘을 더하였다고 기록했다.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천사가 구주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왔다고 가르쳤다.
“누가복음에는 주님이 무릎을 꿇고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물리치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Joseph Smith Translation, Luke 22:42)
… 하나님 아버지의 응답은 독생자의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속죄는 조금도 흠이 없는 어린 양에 의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아들의 탄원은 거절되었지만 그분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Joseph Smith Translation, Luke 22:43)
하늘로부터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한 힘을 얻은 구주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성취하셨습니다.”(“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성도의 벗, 1994년 7월호, 99쪽)
그러나 마침내 천사도 구주를 떠났다. 그분 혼자서 위대한 속죄 희생을 완수하는 것이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후기에, 구주께서는 자신이 영광을 띠고 지상에 올 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신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나는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고 모든 백성에게 심판을 가져 왔나니,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교리와 성약 133:50) 구주께서는 죄와 사망을 완전히 극복하셨다.
누가복음 22:44.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제일회장단의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은 우리의 모든 기도는 진실하며 “마음에서 나오는 가장 진지한 느낌으로”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구주께서 겟세마네에서 고뇌하셨을 때 했던 기도처럼 어떤 기도는 다른 기도들보다 더욱 열성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예레미야는 온 마음과 생각을 다하여 기도할 것을 권고했습니다.[예레미야 29:13 참조] 이노스는 어떻게 자신의 영혼이 굶주림을 느껴 하루 종일 기도하였는지를 자세히 설명했습니다.[이노스서 1:4 참조] 기도는 그 강도에 있어서 매우 다양합니다. 구주의 경우 격심한 고통의 시각에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44 참조] 어떤 기도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계속되는 축복을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는 한편 그러한 축복을 간구하는 간단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커다란 아픔이나 필요 사항이 있는 경우에는 단순한 간구 이상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 기도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축복은 때로 우리 자신의 일과 노력과 부지런함을 필요로 합니다.”(“기도라는 구명 밧줄”, 리아호나, 2002년 7월호, 62, 67쪽)
누가복음 22:44.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는 구주께서 겪으신 고통 중에는 “떨어지는 핏방울”도 있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한 유일한 복음서 저자이다.(누가복음 22:44) 온 인류의 무한한 죄와 슬픔, 죄책감을 짊어져야 하는 극심한 압박감으로 비할 데 없는 고통이 임했고, 구주의 몸은 혈한증이라고 알려진 신체 상태를 일으켰다. 이 상태는 피부 표면 바로 아래에서 모세 혈관의 파열을 초래하여, 피부에서 피가 섞인 땀을 흘리게 한다. 보통 사람들은 이 상태라면 모든 땀구멍에서 피를 흘리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나 구주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우리를 위해 이 극심한 고통을 견디실 수 있었다.
다른 경전 구절들도 구주께서 모든 땀구멍에서 피를 흘리신 일의 진실성과 원인에 대해 통찰을 더해 준다. 몰몬경에서 베냐민 왕은 이렇게 간증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 이르는 것을 제외하고,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과 육신의 고통, 주림, 갈증과 피로를 겪으리니, 이는 보라, 피가 모든 땀구멍에서 나옴이라, 그의 백성의 사악함과 가증함으로 인한 그의 고뇌가 그처럼 크리라.”(모사이야서 3:7; 강조체 추가)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죄와 싸우되 …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셨음을 기억하여 충실히 남으라고 권고했다.(히브리서 12:4) 주님께서도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신 것에 대해 친히 말씀하셨다.(교리와 성약 19:16~19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구주께서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뇌를 겪으신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게 하는 아픔을 느끼게 한 육체적 고통도 정신적인 고뇌만도 아니었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경험하실 수 있는 영혼의 영적인 고뇌였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무리 강인한 인내력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그러한 고통을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인체 기관이 지탱할 수 없게 되어 무의식과 망각의 가사 상태에 빠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고뇌로 괴로워하던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사탄, ‘이 세상 임금’이 위협하는 모든 공포에 직면하여 이를 극복하셨다.”(예수 그리스도, 613쪽)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구주께서 겟세마네에서 겪으신 고통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그분이 겟세마네에서 무엇을 견디셨는지는 우리도 조금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에서 하신 일을 완전하게 알지도 못하고, 말할 수도 없으며, 인간의 마음으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아버지께서 주신 쓴 잔의 찌꺼기를 남김없이 마시고,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신 일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이르는 것을 제외하고 육신으로나 영으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고통받으셨음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 그분의 고난이 공의의 요구를 충족시켰고, 회개하는 영혼을 죄의 고통과 형벌로부터 구속했으며,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자비가 임하도록 해 주었음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죄의 무게로 고통과 고난을 받아 땅에 엎드려 떨며, 가능하면 쓴 잔을 마시지 않으려 하기까지 하셨음을 압니다.
우리는 고된 시련을 받고 있는 그분께 힘을 주고자 영화로운 곳에서 한 천사가 내려왔음을 압니다. 우리는 그 천사가 육신을 입은 사람이 존재하게 하려고 가장 먼저 타락한 미가엘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러한 무한한 고뇌, 비할 데 없는 고통이 서너 시간 계속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겟세마네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힘”, 성도의 벗, 1985년 7월호, 11쪽)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겟세마네에서 고뇌를 겪으시는 동안 온 인류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으셨다. 이에 더하여, 그분은 우리의 모든 고통과 고난, 아픔, 슬픔, 질병에 대해 고뇌하는 짐도 지셨다.(이사야 53:4~5; 앨마서 7:11~12 참조) 칠십인 회장단의 태드 알 콜리스터 장로는 지상 생활의 몇몇 경험도 예수께서 지셨던 극심한 무게에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무수한 환자의 상처를 계산해 본다고 할 때 저울에 올려진 아픔의 무게는 얼마나 되겠는가? 이제, 거기에 사회 요양소에서 그저 바깥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기억해 주는 카드 한 장, 방문 한 번, 전화 한 통을 몹시 갈망하고 있는, 잊힌 노인들의 외로움을 더해 보자. 굶주린 아이들의 상처와 기근, 가뭄, 전염병에 시달리는 고통도 계속해서 더해 보자. 속을 썩이는 자녀가 집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매일 눈물로 간구하는 부모들의 심적 고통도 더해 보자. 모든 이혼에 따른 정신적 충격과 모든 낙태의 비극도 포함하자. 어린 나이에 죽은 모든 자녀와 결혼 직후에 배우자를 여의고 겪는 회한도 더해 보자. 넘쳐나는 감옥, 초만원의 사회 복귀 훈련 시설과 정신병자 수용 기관들의 비참함도 더해 보자. 여기에 세계 역사상 모든 세기에 겪었던 모든 아픔과 고통, 그리고 끝없이 창조된 다른 많은 세상의 것도 곱해 보자. 이 모든 고통을 더해도 구주께서 짊어지신 고통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이처럼 태산같이 거대한 시련을 견딜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의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결단코 그 누구도 견딜 수 없다.”(The Infinite Atonement [2000], 105)
구주께서 겟세마네에서 겪으신 고통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26:36 주해 및 마가복음 14:32~36 주해를 참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