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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16장
로마서 9~16장 소개 및 연대
바울은 복음의 중심이 되는 많은 구원의 교리를 설명하고 나서(로마서 1~8장 참조), 복음을 교회와 사회 생활에 적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로마서 9~16장 참조)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택함을 받음, 복음에 대한 거부, 최종적인 구원을 다루었다. 하나님께서 고대에 아브라함 및 그의 자손과 성약을 맺기는 하셨지만,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은 주로 혈통이 아니라 성약에 대한 충실함으로 결정되었다. 교회 회원들은 충실하고 겸손하며 자비로운 생활을 함으로써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길을 준비할 수 있다. 로마서 12~15장에서, 바울은 교회 회원들에게 복음에 따라 생활하여 화평과 교회 화합을 이룩하라고 권고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하고, 주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관심사보다는 타인의 관심사를 우선에 두어야 한다. 바울은 서한을 마무리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로마 성도들에게 기도와 도움을 요청하며, 그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복음에 순종하라고 간청했다.
로마서 9~16장 주해
로마서 9~11장.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은 유대인 대신에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을 지칭하기 위해 이스라엘이란 단어를 사용했으며, 이는 그 시대에 구주를 거부한 대부분의 유대인과 대조를 이룬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당신의 성약의 백성이 되도록 선택하셨으며, 그들에게 구주를 보낼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로마서 9:4~5 참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셨을 때, 대부분 유대인들은 그분을 배척했으며 일부는 그분을 사형에 처하게 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스라엘 집의 일원인 유대인 지도자들의 지속적인 반대에 부닥쳤다. 바울이 로마서 9~11장를 쓴 목적 중 하나는 구주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척과 이런 배척에 따른 결과를 다루는 데 있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메시야의 약속을 받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더 많은 개종을 이끌어내지 못했는가?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복음을 거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했다.(로마서 9:6) 유대인이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다고 해서 복음 메시지가 무익하거나 효과가 없어지게 된 것은 아니었다. 바울은 혈통으로 이스라엘 자손인 사람들이 모두 다 이스라엘의 성약의 백성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로마서 9:6~11 참조)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와 같은 특권을 받고 태어나 선택된 자손으로 헤아림을 받은 후 [이스라엘 집]의 일부 사람들은 의로움의 행로에서 벗어나 육의 자녀가 된다. 즉, 그들은 세상의 방식을 좇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마련된 영적 축복을 거부한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2:276) 바울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복음을 거부한 것과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예언이 성취된 결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진실임을 입증한다고 말했다.(로마서 9:14~29; 에베소서 3:3~6 참조)
로마서 9:6~8. 혈통은 영적 상태를 결정짓지 않는다
바울은 이스라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모두 주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성약의 약속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로마서 9:6 참조) 바울은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성약은 이삭의 혈통을 통해서만 영속되며,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인 이스마엘의 자손을 통해서는 영속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바울은 이 실례를 사용하여, 충실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자손으로 헤아려지고 복음 성약의 축복을 받게 됨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준비시켰다.(로마서 9:8, 24~26; 10:12; 갈라디아서 3:27~29 참조; 또한 누가복음 3:8 주해 참조)
바울의 가르침은 또한 특권을 받은 혈통이나 큰 신앙을 지닌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복음 성약의 축복을 받을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마찬가지로, 후기 성도는 개인의 신앙과 순종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주님을 믿는 신앙을 발전시키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 우리 각자는 개별적으로 태어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는 개별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요한복음 3:3, 7] 구원은 개인적인 문제입니다.”(“구원과 승영”,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8쪽)
로마서 9:11; 11:5, 7, 28. “택하심”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에 수록된 Bible Dictionary[성경 사전]에서 우리는 택함[election]이란 단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자손을 선택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신학 용어로, 그들은 특권과 책임을 지닌 성약의 백성이 되며 그들을 통해 온 세상 사람들이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택함을 받는 이들은 ‘창세 전’에 선택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각자 스스로 복음을 듣고 주님의 종이 베푸는 복음 의식과 성약을 받아야만 한다. 택함을 받더라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 1절에서 표현했듯이 그의 택하심은 헛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교리와 성약 84편 98~102절과 로마서 11장 1~5절에 나오는 ‘은혜로 택하심’은 현세에서 처하는 상황으로서, 복음을 무난히 접하게 될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택함은 전세에서 이루어졌다. 필멸의 삶을 사는 동안 복음에 충실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자들은 훨씬 더 바람직한 택함을 얻고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가 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영원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히 입으리라는 약속을 받는다.(교리와 성약 84:33~41)”(Bible Dictionary, “Election”; 또한 앨마서 13:3~4 참조)
후기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집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전세에서 그 혈통으로 예임되었다고 가르쳤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하늘 아버지의 영의 자녀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크고도 중요한 재능 또는 능력은 영성이다. 이 재능을 얻은 사람들 대부분은 태어나기 전에 이스라엘 집의 일원으로 지상에 오도록 택함을 받았다. 그들은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모든 세대에서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축복들을 받도록 예임되었다. 이 예임이 바로 택함이다.”(A New Witness for the Articles of Faith [1985], 512)
로마서 9:11~13.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바울이 언급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라는 말은(로마서 9:11) 구체적으로 리브가의 자녀인 에서와 야곱을 말한다.(또한 창세기 25:21~26 참조) 그런 후 바울은 말라기 1장 2~3절에 나오는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로마서 9:13) 하나님께서 미워할 형제와 사랑할 형제를 선택하셔야 했다는 것은 이상하게 여겨진다. 사실,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미워하다”를 뜻하지만, “미워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어원을 보면, 거기에는 “거부”, “강한 불쾌감”, 또는 매우 일반적으로는 “덜 사랑함”을 포함하여 미묘하게 다른 의미가 많이 담겨 있었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로마서 9장 11~13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가 아직 리브가의 태내에 있는 동안에, 현세의 일에 관하여 두 사람 다 그 어떤 우선적인 지위를 얻기도 전에 먼저 야곱을 선택하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순전히 전세의 문제이다. 야곱은 에서보다 더 큰 영적 능력을 지니고 이 세상으로 왔다. 그는 특별한 일에 예임되었으며, 선택된 능력으로 봉사하도록 택함을 받았다.
그런 후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지혜와 미리 아는 지식으로 자신을 섬기려 하는 용감한 영들, 고귀하고 위대한 영들을 야곱의 혈통을 통해 지상으로 보내셨다. 덜 용감하고 헌신적인 영들은 에서를 통해 지상으로 왔다. 그러므로 당연히 야곱의 자손 중 많은 이들이 현세에서 의로웠으며, 에서의 자녀 중 많은 이들이 악했다. 그래서 약 1,500년 후에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은 사랑하고 에서의 자손은 미워했다고 주님의 이름으로 말했다. (말라기 1:2~3)”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277)
로마서 9:14~24.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바울은 이스라엘 자손의 예임에 관해 기록하면서, 일부 교회 회원들이 택함의 교리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여길 수도 있음을 인식했다. 이방인 성도들이 왜 하나님께서 고대에 당신의 성약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로만 제한하셨는지 의아하게 여긴 반면, 유대인 그리스도교인들은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교회로 받아들여서 이스라엘 집의 일원으로 헤아리시는지에 의문을 느꼈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하나님을 논박하지 말라고 권고했다.(로마서 9:20 참조)
로마서 9:17~18, 22~24. 하나님은 사람들을 완악하게 하시는가?
로마서 9장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을 보이기 위해 바로를 세우셨다는 출애굽기 9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했다. 바울은 또한 “하나님께서 …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라고 말했다.(로마서 9:18) 이 문구들은 하나님께서 바로나 다른 사람들을 사악하게 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얼마나 바라시는지에 관하여(디모데전서 2:4; 베드로후서 3:9; 모세서 1:39 참조),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택의지의 은사를 통해 우리가 그분을 따르거나 거부할지를 어떻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경전의 다른 부분에서 가르치는 진리들에 모순된다.(니파이후서 2:27; 10:23 참조) 바울의 말을 이해하려면 그가 출애굽기에 나오는 내용을 논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즉, 그는 바로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시는 일을 반대했다는 내용을 언급한 것이었다. 바울의 독자들이 잘 알고 있었을 이 출애굽기 기록에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고 나온다.(예를 들어, 출애굽기 9:12 참조) 하지만,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의 조셉 스미스 역에는 주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음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Joseph Smith Translation, Exodus 9:12 참조)
바울의 요지는 바로가 하나님에 맞서 싸웠을지라도, 그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 주님의 일이 좌절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심으로 주님의 권능이 드러났다.(로마서 9:17 참조)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도록 원인 제공을 하지 않으셨으며, 다만 그 일을 허용하셨을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반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 것이며(로마서 9:22), 그리하여 그분은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실 수 있었다.(로마서 9:23~24)
로마서 9:20, 25~26, 29. 바울이 구약전서의 내용을 인용했다
로마서 9장 25~26절에서 바울은 호세아 1장 10절과 2장 23절을, 그리고 로마서 9장 29절에서는 이사야 1장 9절과 29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했다.(또한 로마서 9:20 참조) 바울은 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언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자녀를 구원하기를 바라시며, 태생적으로 그분의 백성이 아닌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 성약으로 접목됨으로써 그분의 백성이 될 것임을 가르쳤다.
로마서 9:30~10:3.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가 아니라 “행위”로써(즉, 의례와 모세 율법 준수를 통해) 의를 추구했다고 기록했다.(로마서 9:32)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후기 성도들이 이따금 행위를 너무 많이 강조함으로써 이와 유사한 잘못을 한다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든, 얼마나 많이 순종하든, 현세에서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이 넘치는 그분의 은혜가 없다면 그것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교회 안에는 선행을 하는 데 너무도 열중한 나머지, 아무리 큰 선행을 할지라도 그것이 그리스도께 온전히 의지함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Building Bridges of Understanding,” Ensign, June 1998, 65)
로마서 10:1~4. “그리스도는 …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 성도들이 때로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계속해서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그들의 구원을 염려했음을 알 수 있다.(로마서 10:1~3 참조) 그는 많은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쓴다고 말했다. 이는 그들이 유대인의 규범에 따라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열심히 노력했음을 의미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참된 의로움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는, 복음을 거부했다. 로마서 10장 4절에서 마침이라는 단어는 “종결”, “성취” 또는 “궁극적 목적 혹은 기대하는 목표”를 의미할 수 있다. 모세 율법을 행하는 것은 율법의 “마침”에 해당하는, 구주와 그분의 속죄를 고대하는 행위였다.(갈라디아서 3:24~26; 모사이야서 13:28~33; 16:13~15; 앨마서 25:15~16 참조)
로마서 10:4~13. 구원을 받기 위해 모든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시인해야만 하는가?
일부 기독교인들은 로마서 10장 9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을 근거로,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말로 시인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경전 구절에서 보면, 바울은 회개하고, 침례와 성신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꼭 필요한 일이라고 가르쳤다.(사도행전 16:30~33; 19:1~6; 로마서 6:1~11; 갈라디아서 3:26~27; 5:13~25 참조)
로마서 10장 4~13절에서 바울의 목적은 구원의 과정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바울은 자신이 4절에서 말한 것, 즉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는 말의 요지를 뒷받침했다. 바울은 신명기 30장 12~14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거나 “무저갱에 내려”갈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로마서 10:6~7) 그 대신,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모든 사람은 구주를 시인하고 그분을 믿을 때 마음속에서 그분을 찾을 수 있다.(로마서 10:8~12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구원의 요건을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저는 전체적인 성경의 가르침과 현대의 계시를 통해 받은 설명에 근거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죄로부터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회개하고 침례받고 성신을 받으라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나타내 보여야 하는 신앙, 즉 죄 지은 사람 각자의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간증합니다.(사도행전 2:37~38 참조)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5; 또한 마가복음 16:16; 사도행전 2:37~38 참조) 이같이 권세 있는 자의 손으로 거듭남을 이미 받은 믿음 있는 자들은 이미 죄로부터 조건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필멸의 시험을 계속적으로 요구되는 회개와 충실함과 봉사와 끝까지 견딤으로 완수할 때까지는 궁극적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당신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성도의 벗, 1998년 7월호, 59~60쪽)
로마서 10:14~15.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
십이사도 정원회의 쿠엔틴 엘 쿡 장로는 로마서 10장 14~15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이 복음을 나누는 일의 중요성을 어떻게 강조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많은 훌륭한 [교회] 회원들이 그들의 이웃이나 동료들 사이에서 위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사람이며 무엇을 믿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더 많은 회원들이 회복의 메시지를 알리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4절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구주를 말함]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절에는 이사야서에서 언급된 훌륭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또한 이사야 52:7 참조)
회원들이 이 축복을 성취하려면 발을 움직이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두려움이 아닌 신앙으로 생활하십시오”,리아호나, 2007년 11월호, 72쪽)
로마서 10:17.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며”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이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은 안식일과 다른 교회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신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사도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찾는 첫 번째 단계는 그분의 종들, 즉 선지자들의 입으로 전해진 그분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들이 여러분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단지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또한, 구주 자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귀 있는 자는 들’어야 합니다.[마태복음 11:15] 바꾸어 말하면, 듣는 것에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 그것은 배운 것을 진실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주의 깊게 생각하며, 마음속에서 그것을 연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 이노스가 배운 것처럼, 복음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간증이 ‘[우리] 마음 깊이 스며’들게[이노스서 1:3]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찾음”, 리아호나, 2004년 11월호, 71~72쪽)
로마서 11:1~6. 이스라엘의 남은 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설명했다. 그 증거로서 바울은 자기 자신이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말했다.(로마서 11:1 참조) 계속해서 바울은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받아들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사악함으로 엘리야가 절망했음을 묘사하는 구약전서의 기록을 인용했는데, 그 백성 중 다수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같은 거짓 신들을 숭배했다. 엘리야는 자신이 이스라엘 자손 중 유일하게 남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셨다.(열왕기상 19:14~18; 로마서 11:2~4)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엘리야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시대에도 몇몇 이스라엘 사람, 현세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이도록 예임되고 택함받은 이들 중 몇 사람, 한때 위대한 나라의 남은 자들은 참되고 충실하였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285) 바울 시대에 이스라엘의 충실하게 남은 자들은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오랫동안 약속되어 온 메시야로 받아들인 유대인들이었다.
로마서 11:11~32. 이스라엘의 최종적인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바울은 이스라엘이 영속적으로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유지했으며, 그 시대에 “남은” 소수의 유대인 개종자와는 대조적으로 미래에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로마서 11:11~12 참조) 가르쳤다.(또한 고린도후서 3:14~16 참조) 몰몬경에 나오는 많은 예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주님의 계획이 언급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니파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의 집에 속한 자들[은] … 희미한 데서와 캄캄한 데서 인도되어 나와서 주께서 그들의 구주시요, 그들의 구속주 곧 이스라엘의 능한 자인 줄 알게 되리이다.”(니파이전서 22:11~12) 예수께서는 니파이 백성들에게 몰몬경의 출현을 포함하여 후기에 교회를 회복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고 구속하는 주님의 계획의 일부라고 가르치셨다. 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분의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가 될 것이었다.(제3니파이 21:1~7 참조)
로마서 11:13.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방인의 사도”라는 특별한 역할을 지닌 바울은 이제 이방인 개종자들을 향해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큰 책임을 느꼈다.(로마서 11:13)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부름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부름을 수행할 때 위엄 있게 행하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며, 모든 사람의 눈에 존경할 만하고 칭찬할 만하게 일하며, 부름을 확장하고 강화하며, 그 부름을 통해 하늘의 빛이 다른 사람에게 비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름을 영화롭게 합니까? 단순히 그것과 관련된 봉사를 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장로는 장로의 의무가 무엇인지 배운 다음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장로의 부름을 영화롭게 합니다. 장로의 경우처럼, 집사, 교사, 제사, 감독 등 신권 직분을 지닌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신권의 권세”, 리아호나, 2000년 1월호, 604쪽)
로마서 11:16~24. 감람나무의 비유
로마서 11장 16~24절에서, 바울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된 가지에 대해 가르쳤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집으로 입양된 이방인들을 가리켰다.(로마서 11:17, 19, 23~24 참조) 참감람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이며, 돌감람나무 가지는 이방인들이다. 이방인들(돌감람나무 가지)은 이스라엘의 집(가꾼 감람나무)으로 접목되어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되었다. 이 농예 비유는 자연 현상과는 반대되는 과정을 묘사했다. 자연계에서는 접목된 가지가 그 나무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가꾼 나무의 가지를 야생 나무에 접목하면 그 야생 나무는 가꾼 나무가 된다. 바울은 야생 나무의 가지가 가꾼 나무에 접목되고, 그 나무가 가꾼 나무로서 남게 되는 과정을 묘사했다.
바울이 이런 식으로 비유를 든 것은 무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서였다. 이방인들의 개종으로 이스라엘 혈통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혈통은 하나님의 왕국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성역을 베푸는 동안에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졌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선택된 종족이자 아브라함 성약의 수호자였다.
로마서 11:18~21, 30~31. 이방인 그리스도교인들은 겸손하고 유대인들에게 자비로워야 했다
바울은 교회의 이방인 회원들에게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는 그들에게 겸손하고 충실하며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훈계했다.(로마서 11:18~20 참조)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대인에게 자비와 친절을 보임으로써, 유대인들이 결국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자비를 얻도록 길을 예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로마서 11:30~31 참조) 만일 이방인 회원들이 교만하다면,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며 하나님의 왕국으로부터 차단될 것이다. 높은 마음, 즉 교만하지 말라는 이 경고는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면전에 돌아가기를 소망하는 모든 사람이 주의해야 하는 내용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바울의 권고를 따르지 못하고 유대인들을 강력히 거부하였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정치 권력을 보유한 다수 집단이 된 이후로 수백 년에 걸쳐 그들 사이에 증오에 찬 반유대인 표현이 생겨났고, 그 결과 유대인들을 향한 폭력이 초래되었다.
몰몬경의 선지자 니파이는 이렇게 기록했다. “너희 이방인들아, 너희는 나의 옛 성약의 백성 유대인들을 기억하였느냐? 아니라, 너희는 그들을 저주하였고, 그들을 미워하였으며, 그들을 회복하려 애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보라, … 나 주가 나의 백성을 잊지 아니하였음이니라. … 내가 내 말과 이스라엘의 집에 속한 내 백성을 대적하여 싸우는 자들에게 내가 하나님임과, 내가 아브라함과 성약하기를, 내가 영원토록 그의 자손을 기억하겠다고 하였음을 보여 주리로다.”(니파이후서 29:5, 14)
로마서 11:25. “이방인의 충만[함]”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방인의 충만[함]”이 의미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도록 정해진 시기 또는 때가 있었으며, 그 후에 이방인들이 먼저 복음을 접할 시기가 도래했다. 이방인의 때는 우선권에 따라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지는 시기이며, 이는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일 기회를 충분히 누릴 때까지, 다시 말해서 이방인의 충만함이 이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런 후에 복음 메시지는 다시금 유대인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대인은 하나의 국가이자 백성을 의미한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290) 이방인의 때에 관하여 더 많은 통찰을 얻으려면, 누가복음 21:24 주해를 참조한다.
로마서 12:1~2. “너희 몸을 … 산 제물로 드리라”
십이사도 정원회의 디 토드 크리스토퍼슨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 몸은 우리 영의 도구가 되므로 육신을 최대한 잘 보살펴야 합니다. 또한 타인에게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진척시키기 위해 육신의 힘을 성별해야 합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성별된 삶을 고찰하며”, 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17쪽)
바울은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동물을 제물로 바쳤던 구약의 관습에 빗대었다. 러셀 엠 넬슨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지금도 희생을 바치라는 계명을 받고 있으나 동물의 피를 흘려서 바치라는 계명은 받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좀 더 신성하고 거룩하게 할 때 가장 높은 차원의 희생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그러므로 순종과 희생의 율법은 뗄 수 없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 우리가 이런 계명과 또 다른 여러 계명을 지킬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우리는 단련받게 됩니다. 우리는 제자가 됩니다. 우리는 좀 더 신성하고 거룩하게 되어 우리 주님처럼 됩니다.” (“이브로부터 배우는 교훈”, 성도의 벗, 1989년 1월호, 96쪽)
로마서 12:3, 16.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바울은 교회 회원들에게 오만하거나 자기 자신을 높게 생각하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부류의 사람들과 기꺼이 어울리라고 권고했다.(로마서 12:3, 16 참조) 본부 청녀 회장단의 일원으로 봉사했으며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의 딸인 앤 엠 딥 자매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떻게 이런 이상의 본보기가 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아버지는 사회 각계각층에 친구분들이 계십니다. 아버지의 친구분 중 한 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데, 그분은 사람들이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고 여길 만한 분입니다. 그분의 성함은 에드 에릭슨이었습니다. 제 아버지보다는 거의 스무 살 정도 연상이셨습니다. 거의 백 년 전에 그분은 조산아로 태어나셨는데 그 때문에 몇 가지 합병증을 겪으셨습니다. 그분은 앞을 잘 보지 못하셨고,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배울 기회도 없었습니다. …
제 아버지는 그분의 충실한 친구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분이 자기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도록 적극적으로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아버지는 종종 그분에게 일거리를 주시려고 비둘기 장을 청소하고 우리 집의 넓은 뜰에서 허드렛일을 거들게 하셨습니다. … 그분은 체구가 컸고,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보였으며, 별로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저 맡은 일을 묵묵히 하셨고,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셨으며, 그런 후에 아버지는 그분을 집으로 데려다주셨습니다. 해마다 이런 일들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아버지께서 표를 구해 손주들을 데리고 서커스나 로데오에 가실 때면, 그 친구분도 늘 오셔서 우리와 함께 팝콘과 음료수를 드셨습니다. …
그분은 3년 전에 향년 96세로 별세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분의 장례식에 참석했더라면, 지금껏 이 세상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한 사람의 장례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그것은 제 아버지의 평생지기 친구인 에드 에릭슨의 장례식이었습니다.”(“My Father Is a Prophet” [Brigham Young University~Idaho devotional, Feb. 19, 2008], byui.edu)
로마서 12:4~8. 우리는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교회의 회원들이 어떻게 “한 몸에 많은 지체”인지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 관하여(로마서 12:4) 더 많은 통찰을 얻으려면, 고린도전서 12:12~30 주해를 참조한다.
로마서 12:9~21. 바울이 교회 회원들에게 주는 권고
구주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것과 유사하게(마태복음 5~7장 참조), 바울은 교회 회원들에게 권고를 하고 그리스도교인다운 삶을 사는 것에 관한 많은 원리를 가르쳤다. 로마서 12장 9~21절에는 각 절마다 그러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거짓이 없”는 사랑은 위선이 없는 사랑이다.(로마서 12:9; 교리와 성약 121:41)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는 바울의 권고는(로마서 12:16) 마태복음 5장 46~47절에 나오는, 세리들(경멸받은 사람들)에게까지도 친절하라는 구주의 훈계와 유사하다. 로마서 12장 14~15, 21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은 마태복음 5장 44절, 모사이야서 18장 9절, 교리와 성약 42편 45절의 가르침과 호응한다.
로마서 13:1~7.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로마서 13장 1~7절에 대한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의 조셉 스미스 역을 보면, 바울이 이 성구들에서 언급한 내용은 정부 당국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권세를 지닌 자들을 따를 때도 적용됨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조셉 스미스 역, 로마서 13장 1절에 “교회에서”라는 말을 추가하였으며,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교회에서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조셉 스미스 역, 로마서 13장 4절에는 “칼”이 “막대기”로 수정되었다. 조셉 스미스 역, 로마서 13장 6절에는 “조세”가 “헌납”으로 수정되었다.
이 성구들에는 또한 제자가 국민으로서 지는 책임에 대해 신약전서에 나오는 가장 명백한 서술 중 일부가 담겨 있다. 바울이 지역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라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권고한 데는 몇 가지 훌륭한 이유가 있었다. 로마 통치자들은 치안을 유지하고 사회 불안을 가라앉히는 데 높은 우선순위를 두었으며, 신속하고 폭력적으로 반란을 진압하였다. 바울의 성역 초반에, 로마에 있는 유대인 사회에서 일어난 소요로 한동안 그 도시에서는 모든 유대인이 추방되었다.(사도행전 18:2 참조)
바울은 감정이 폭발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교회가 해를 입지 않도록, 지역 사회의 의무에 대해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었다.(6~10, 13~14절 참조)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라는 바울의 권고는(로마서 13:1) 다음과 같이 신앙개조 제12조에 나오는 원리를 반영한다. “우리는 왕, 대통령, 통치자, 장관에게 복종할 것과, 법률을 순종하고 존중하며 지지할 것을 믿는다.” 바울은 정부 당국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와 “하나님의 일꾼”으로 묘사함으로써(로마서 13:1, 6), 권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만 권한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했다.(요한복음 19:11 참조)
로마서 13:12. “빛의 갑옷”
로마서 13장 12절에 나오는 바울의 비유는 에베소서 6장 11~17절에 나오는 비유와 유사한데, 그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라고 촉구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독자들에게 악행을 버리고 “빛의 갑옷”으로 무장하라고 훈계했는데, 아마도 여기서 빛은 세상의 빛이자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 같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형제 자매 여러분, 빛과 암흑의 이 마지막 최대의 격전에서 저는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 … 고난을’ 받는[디모데후서 2:3] 기회를 갖게 된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바울과 함께 저도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로마서 13: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시라. 참으로 결코 어두워질 수 없는 무궁한 빛’이시라는 것을[모사이야서 16:9] 특별한 간증으로서 전합니다.”(“어둠에서 나와 그의 놀라운 빛으로”,리아호나, 2002년 7월호, 79쪽)
로마서 13:14.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라는 바울의 권고는(로마서 13:14)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 유혹을 잘 견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진리를 반영한다. 도모[provision]로 번역된 이 그리스어 단어는 “사전에 고려함”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유혹에 굴복할 때, 그것은 종종 그들이 그 유혹에 대해 곱씹으며 죄를 범하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은 우리의 생각을 다스릴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유혹이 다가올 때 머릿속에서 그 유혹을 지워 버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찬송가를 부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주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정신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정신을 위한 도구입니다. 합당하지 못한 생각이 여러분의 정신을 파고들 때 여러분만의 방법으로 그 생각을 지워 버리십시오. 합당한 음악은 힘이 강력하여 여러분이 생각을 통제하는 데 유용합니다.”(“기도와 속삭임”, 리아호나, 2009년 11월호, 45쪽)
로마서 14:1~15:3. “의견을 비판”하는 문제에 대처함
바울은 교회의 일부 회원들이 “모든 것을 먹”는 반면, 다른 회원들은 “채소”만 먹는다고 설명했다. 채소만 먹었던 사람들은 유대인 개종자였을 것이며, 다른 음식들을 먹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이방인 개종자였을 것이다. 또한, 교회의 일부 회원들은 유대인의 관습과 풍습과 경축일을 따랐다.(로마서 14:5 참조) 개인적인 행위에 대한 이런 차이는 로마와 다른 여러 지역의 성도들 간의 분열로 이어졌다.(로마서 14:3; 고린도전서 8:1~13; 골로새서 2:16 참조)
이 문제에 응하여, 바울은 식습관과 그 밖의 행위에 관한 많은 개인적인 선택 문제가 특정한 계명으로 이야기된 적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개인과 주님 사이에서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로마서 14:6~8 참조) 바울은 우리가 사적인 해석을 교회 회원들에게 강요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로마서 14:10~15 참조; 또한 제3니파이 11:40 참조) 하지만 교회 회원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행위나 습관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고, 일부 행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영적으로 실족할 수도 있다면 그런 행동을 기꺼이 그만두어야 한다.(로마서 14:13~15, 20~22; 고린도전서 8:9~13 참조) 교회에서 화평을 조성하고 덕을 세우는 것이 개인의 선호도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우선한다.(로마서 14:19; 15:1~3 참조) 몇몇 행동과 우선순위는 그저 단순히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하다.(로마서 14:17, 19 참조)
로마서 15:1.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
바울은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로마서 15:1)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교회의 강한 회원들이 그들과 달리 약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를 전해 주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많은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낙담한 어떤 선교사와 접견을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는 봉사하는 지역의 언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할 마음을 잃고 집에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속했던 선교부에는 180명의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집에 돌아간다면 179명의 동반자들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의 친구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를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고, 그를 돕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었으며, 그와 함께 일하고, 그를 가르치며, 함께 기도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가 언어를 배우고 성공하도록 도와줄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다른 선교사들 모두가 그의 친구라고 확신시켜 준 것을 받아들였다는 보고를 여러분께 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그들은 그에게 도움을 주러 왔으며, 그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혼자라는 절망적인 느낌이 그에게서 떠나 버렸으며, 그는 자신이 승리하는 팀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그 후로 계속 지도자로 봉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모두 서로를 위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로마인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런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은 의미 깊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로마서 15:1)” (“서로를 강화함”, 성도의 벗, 1985년 6월호, 1~3쪽)
로마서 15:4. 경전은 배움과 위안, 소망의 원천이다
바울은 경전이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그리고 위안과 소망을 주기 위해 쓰였다고 말했다.(로마서 15:4) 그런 후 바울은 이 진리를 예증하기 위해, 구약전서에 나오는 몇몇 성구를 인용하며 성도들에게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 사업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확신시키고, 교회의 모든 회원에게 서로를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로마서 15:9~12 참조, 여기에 시편 18:49; 신명기 32:43; 시편 117:1; 이사야 11:10이 인용됨)
로마서 15:24, 28. 바울은 서바나로 갔는가?
바울은 언젠가는 서바나[스페인]로 가려고 했다.(로마서 15:24, 28 참조) 바울이 서바나로 갔는지 여부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이 소망을 성취했음을 암시하는 몇몇 증거가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주후 96년 무렵에 기록을 하면서, 바울이 ‘경계’ 또는 ‘서쪽의 한계’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는 로마보다는 스페인에 훨씬 더 잘 맞는 표현이다. 초기의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Fragment]에서도 바울이 스페인을 방문했다고 나오지만, 그 발언의 출처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Richard Lloyd Anderson, Understanding Paul, rev. ed. [2007], 311–12)
로마서 16:1~2. 뵈뵈
바울은 서한을 마치면서 뵈뵈라는 교회 회원을 추천했는데, 그녀가 바울의 서한을 로마 성도들에게 전달한 심부름꾼이었음이 확실하다. 바울이 뵈뵈를 표현한 말로 보아, 그녀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며 바울을 포함하여 많은 교회 회원들의 “보호자” 또는 후원자였음을 알 수 있다.(로마서 16:1~2) 뵈뵈는 교회에서 여성들이 하는 중요하고도 신뢰받는 역할의 본보기이다.
뵈뵈에 대한 바울이 작성한 서면 승인은 다른 그리스도교 회중에게로 갈 때 추천서를 가지고 가는 초기 그리스도교인의 관습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예이다.(고린도후서 3:1 참조) 이 관습은 회원 기록을 옮기고 성전 추천서를 휴대하는 교회의 현행 관습과 유사하다.
로마서 16:22. 바울이 서기를 부려 서한을 작성함
바울의 지시에 따라 이 서한을 작성한 서기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로마 성도들에게 전하는 자신의 인사말을 써 넣었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로마서 16:22; 베드로전서 5:12 비교) 바울은 자신의 서한 중 다수 또는 전부를 서기를 시켜 작성했을 것이다. 고대 서기는 자신이 쓴 기록에 다양한 영향력을 끼쳤다. 보내는 자가 구술하는 대로 단어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적는 서기가 있는가 하면, 발송인이 작성한 초안을 수정하고 손질하는 서기도 있고, 발송인이 준 메모나 지시를 사용하여 본문의 많은 부분을 직접 작성하는 서기도 있었다. 어느 방법이 사용되었든지 간에, 발송인은 최종본을 보면서 자신의 의도대로 기술되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몇몇 신약전서 학자들은 바울의 이름이 들어 있는 서한 중 일부가 실제로 바울이 쓴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여 왔다. 이런 논쟁 중 많은 부분은 그 서한 간에 드러나는 문체와 어투에서 보이는 미묘한 차이를 다룬다. 하지만 이런 차이 중 다수는 바울이 각각 다른 때에 각각 다른 서기를 부렸으며, 그들이 개인적으로 다양하게 관여했다는 점으로 설명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