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제36장: 로마서 4~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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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8장

로마서 4~8장 소개 및 연대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복음 성약을 맺어야 할 필요성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로마서 4~8장에서 그는 성약 안에서의 삶,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삶의 특성을 가르쳤다.(로마서 8:1) 바울은 의로움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오는 것이지 모세 율법의 행위로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면서(로마서 3:21~31 참조), 이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다.(로마서 4장 참조) 로마서 5장은 이 서한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데, 여기서부터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다. 복음 성약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간다.(로마서 5:1~2)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를 묵과하지는 않으나 죄를 극복할 힘을 준다고 분명하게 밝혔다.(로마서 6:1~8:13 참조) 침례를 통해 복음 성약을 맺는 것은 죄에 대한 우리의 죽음 및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새 생명”을 상징한다.(로마서 6:4; 또한 3~11절 참조) 그 성약 관계에 충실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가 된다.(로마서 8: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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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과 연대표

로마서 4~8장 주해

로마서 4장. 아브라함의 예(또한 갈라디아서 3:6~29 참조)

아브라함은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수천 년 전에 살았기 때문에, 그는 모세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 의롭게 된 사람의 이상적인 본보기이다.(또한 갈라디아서 3:6, 17 참조) 바울은 창세기를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믿는 신앙을 가졌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의롭게 된] 바 되었느니라”라고 말했다.(로마서 4:3; 또한 창세기 15:6 참조) 아브라함이 이런 확약을 받은 것은 할례를 받기 의 일이다.(로마서 4:9~12 참조) 이스라엘 백성의 남성들은 모세 율법에 따라 할례 의식을 행함으로써 “성약의 책임을 받아들였다.”(경전 안내서, “할례”, scriptures.lds.org 참조) 그래서 바울은 이를 통해 개개인이 모세 율법에 순종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것을 경전 구절을 통해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아브라함을 언급함으로써 신앙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를 가르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견고하여”졌으며(로마서 4:20) 유대인(할례자)과 믿음을 지닌 이방인(무할례자)에게서 충실한 자들의 “조상”으로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로마서 4:11~12, 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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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아브라함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있는 아브라함, 그랜트 알 클로슨

로마서 4:2, 4~5. 의롭게 되는 것은 은혜의 은사이다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 로마서 4장 2~5절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사라고 밝혀 준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의 율법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기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에게서는 없느니라.

성경에서는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행위의 율법으로 의롭게 된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부채로 여겨지거니와

행위의 율법으로 의롭게 되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지 않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니라.”

바울은 만일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면 그는 자랑할 이유가 있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니까 그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는 상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은 되겠지만 은혜의 은사는 아니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사람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영생을 상속받는 것을 포함하여 속죄의 축복은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속죄의 무조건적인 축복과 조건적인 축복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주어질 수 없습니다. 속죄의 무조건적인 축복이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며, 그렇다고 해서 조건적인 축복이 전적으로 우리의 노력으로만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충실하게 생활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추가적인 특권을 누릴 수 있으나, 그러한 특권은 여전히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지 기술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몰몬경은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거룩하신 메시야의 공덕과 자비와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 면전에 거할 수 있는 육체가 하나도 없음[이라.]’[니파이후서 2:8]”(“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리아호나, 2008년 3월호, 36쪽)

로마서 4:4, 16; 5:2, 15~21; 6:1~2, 14~15. 은혜

로마서 4~6장에서, 바울은 그리스어 charis(“은혜”로 번역됨)와 charisma(로마서 5:15~16절에서 “선물”로 번역됨)를 반복해서 언급하며 자신이 앞서 소개한 은혜의 교리를(로마서 3:24 참조) 상세히 설명했다.

“은혜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주어진 도움 혹은 힘을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부활할 것이며 우리의 영은 우리의 육체와 결합하여 다시는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은 또한 그분의 복음대로 사는 사람들이 회개하여 용서받을 수 있게 해 주신다.

은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은사이다. 경전에서 사용되는 은혜란 말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통해 주어지는 가능케 하는 힘과 영적인 치유를 나타낸다. …

… 이 가능케 하는 힘을 받기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해야만 한다. 그것은 그분을 믿는 신앙을 가지는 것과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침례를 받고 성신의 은사를 받으며 남은 생애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노력하는 것들을 포함한다.(에베소서 2:8~9; 야고보서 2:17~22; 니파이후서 25:23; 31:20 참조)

하나님의 은혜는 날마다 우리를 돕는다. 그것은 우리가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선행을 하도록 우리를 강화시킨다. 주께서는 우리가 그분 앞에 스스로를 낮추고 그분을 믿는 신앙을 갖는다면 그분의 은혜로 우리의 모든 개인적 약점을 극복하도록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이더서 12:27 참조)”(lds.org/topics/grace; 은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로마서 3:23~24 주해를 참조한다.)

로마서에 나오는 은혜에 관한 가르침

성구

설명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 로마서 3:24.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해졌다. (로마서 3:23~24 주해 참조)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 로마서 4:4, 16.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부채로 여겨지거니와 … 그러므로 너희는 은혜를 통하여 신앙과 행위로 의롭게 되나니”(16절은 경전 안내서에 나옴)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빚을 져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우리 행위만으로 얻는 그런 것도 아니다.(로마서 3:23; 5:8 참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듯이, 구원은 그분이 우리에게 자비롭게 제공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지님으로써 이 은사를 얻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구원의 은사를 얻기 위해 해야 할 모든 일을 다한 후에도,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이다.(니파이후서 25:23 참조)

로마서 5:1~2.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서 있는”이란 말은 어떤 상태에 있으면서 굳건히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에 두고 복음 성약을 맺을 때 우리는 (1)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상태에 있으면서 (2)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받아 충실히 남아 있게 된다.

로마서 5:20~21.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궁극적인 표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타락의 결과를 온전히 이겨 냈으며(로마서 5:14~21 참조), 그것은 죄를 극복하고 용서받을 수 있게 하는 힘으로 차고 넘친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은혜는 “족하”다.(고린도후서 9:8; 이더서 12:26~27; 모로나이서 10:32; 교리와 성약 17:8 참조)

로마서 6:1~2, 14~15.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묵과하지 않으며, 죄를 극복할 힘을 준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게 한다.(로마서 6:2)

로마서 4:16. 참된 신앙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로마서 4장 16절에 대한 조셉 스미스 역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은혜를 통하여 신앙과 행위로 의롭게 되나니”라고 나온다.(경전 안내서) 이 성구는 신앙이 개인의 행위, 충실 또는 품성에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그저 수동적인 믿음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킨다. 바울은 신앙을 행동의 원리로 여겼다. 바울이 “신앙”(pistis)과 “신앙을 갖다” 또는 “믿다”(pisteuō)에 대해 사용한 그리스어는 개인적인 헌신과 행동으로 귀결되는 강한 신념을 암시한다. 여기에는 신뢰, 확신, 충실함, 순종 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바울은 “믿어 순종하”는 것, 즉 신앙에서 비롯되는 순종(로마서 1:5; 16:26), “복음을 순종하”는 것(로마서 10:16), “순종[으로] 의에 이르”는 것에 대해 기록했다.(로마서 6:16)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지닌 사람은 당연히 회개하고, 침례 의식과 성신을 받으며, 신앙으로 견딘다.(사도행전 16:30~33; 19:1~6; 로마서 6:1~11; 고린도전서 6:9~11; 고린도후서 10:5 참조) 마찬가지로 십이사도 정원회의 조셉 비 워스린(1917~2008) 장로는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모방의 신앙, 즉 약하고 힘 없는 신앙일 뿐”이라고 말했다.(“인자가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리아호나, 2002년 11월호, 83쪽) 참된 신앙이 어떻게 개인의 행동에서 드러나는지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야고보서 2:14~26 주해를 참조한다.

로마서 4:18~22. 아브라함의 신앙

아브라함은 100세의 나이에, 아직 아들 이삭을 낳지도 않았으면서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줄기차게 믿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로마서 4:20), 가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로마서 4:18~21 참조)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교회 회원들에게 아브라함처럼 계속 희망을 품고 신성한 약속을 신뢰하라며 격려했다.

“애쓰고 있을 분들께 저는 견디어 내라고 말씀드립니다. 계속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모든 일들이 나아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더 좋은 약속’의 미래를 가지고 그분의 ‘더 아름다운 직분’으로 여러분에게 오십니다. 그분은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입니다.

저는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서 거부와 실망, 그리고 적어도 처음 얼마 동안은 향수병을 겪게 될 새로 부름받은 선교사들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저는 여전히 학교에 다니면서, 아니면 이제야 학교를 끝내고 언젠가는 보다 나은 재정적 상태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서 수입 범위 내에서 생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젊은 어머니, 아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

또 결혼을 하고 싶어 하나 아직 못한 분, 자녀를 갖기를 바라나 그러지 못한 분, 아는 사람은 있으나 친구는 별로 없는 분, 죽음으로 슬픔을 겪거나 질병으로 아프신 분들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저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나 되돌아올 길이 있고 행복을 되찾을 수 있음을 알 필요가 있는 분들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저는 쓸쓸하고 억압받으며 삶을 허비했다고 여기거나 이제 삶이 끝나기를 바라는 분들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이 모든 분들과 다른 분들에게 저는 여러분의 신앙에 의지하라고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소망에 의지하십시오. ‘항상 기도하[고] 또 믿으’십시오.[교리와 성약 90:24] 참으로 바울이 아브라함에 대해 기록한 것처럼,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며 또 ‘믿음이 없어 … 의심’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견고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로마서 4:18, 20~21] …

… 어떤 축복은 곧 오며, 어떤 축복은 나중에, 그리고 어떤 축복은 하늘에 이를 때까지 오지 않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그것이 옵니다.”(“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 리아호나, 2000년 1월호, 42, 45쪽)

로마서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은(로마서 5:5)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에 대해 품는 소망이 실현될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성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성신을 통해 오는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로마서 5:6~8. 과분한 은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경전에는 은혜를 우리가 행한 일의 결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몇몇 성구에서는 우리의 행동에 따라 우리가 은혜 안에서 성장하거나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요한복음 1:16; 갈라디아서 5:4; 베드로후서 3:18; 교리와 성약 93:12~13, 19~20 참조) 그러나 다른 성구들에는 은혜가 우리의 행동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로마서 5장 6~8절 역시 그러한 성구 중 하나이다. 이 성구에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건이다.(로마서 5:8; 또한 요한복음 3:16; 요한1서 4:19 참조) 속죄는 우리가 얻거나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로마서 5:6), 즉 우리가 완전히 무력하고 속수무책일 때 주어진 “은사”였다.(로마서 5:15)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물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과분한 은총과 도움으로, 은혜의 한 예가 된다.

로마서 5:9~10, 15, 17, 20. “더욱”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은혜와 속죄의 축복이 우리의 영적 필요 사항을 해결하고도 남을 만큼 풍성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더욱”이란 말을 반복해서 사용했다. 로마서 5장 6~10절에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즉 우리가 죄가 많고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가 그분과 “화목하게” 될 수 있게 하셨다고 가르친다. 이제 우리는 화목하게 되었으므로, 즉 구주의 속죄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성약 관계를 맺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일하실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로마서 5장 15, 17절에서는 아담의 타락으로 이 세상에 사망이 있게 되고 우리 모두가 영향을 받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더욱 큰 영향을 미치는 은혜가 이 세상에 임하게 되었다고 가르친다.

로마서 5장 20절에서는 우리의 죄가 넘칠지라도 속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넘치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모든 죄와 연약함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가르친다.(또한 이더서 12:27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은 이렇게 확언했다. “지옥의 길을 따르기로 한 소수 외에, 완전한 용서의 약속에서 제외될 습관, 중독, 반항, 범법, 배도나 범죄는 없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약속입니다.”(“용서의 밝은 아침”, 성도의 벗, 1996년 1월호, 20쪽)

로마서 5:11. 신약전서에 나오는 속죄라는 단어

로마서 5장 11절은 흠정역 신약전서에서 속죄[atonement]라는 단어가 유일하게 사용된 성구이지만[개역개정판 한글 성경에는 “화목”으로 번역되어 있음–옮긴이], 관련된 용어인 화목[reconciliation]은 신약전서의 다른 부분에도 나온다.(로마서 5:10; 11:15; 고린도후서 5:18~20; 에베소서 2:16; 골로새서 1:20~21 참조) 이 두 단어는 적대적인 관계에서 우호적인 관계로의 변화, 끊기거나 어긋난 관계의 회복, 두 당사자의 재화합을 의미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화목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화목이란 죄와 영적인 어둠의 상태에 있는 인간을 속량하며 하나님과 화합 및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회복시키는 과정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2:422) 신약전서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언급하기 위해 대속물[redemption] 또는 속량[ransom]이란 용어들도 사용했다.(마가복음 10:45; 로마서 3:24; 8:23; 에베소서 1:7, 14; 골로새서 1:14; 히브리서 9:12, 15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장로속죄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탐구했다.

속죄란 말의 깊은 의미에 대해 상고해 봅시다. 영어로 이 말을 이루는 부분들을 살펴보면, 속죄(at-one-ment)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화합한다는 의미를 시사합니다. 다른 언어에서는 보상이나 화해를 의미하는 단어들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보상(Expiation)은 ‘죗값을 치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죄는 라틴어 어원에서 유래한 화해(Reconciliation)라는 영문 단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문 단어 화해는 문자 그대로 ‘다시 한자리에 앉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의 셈어를 연구해 보면, 속죄란 말이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히브리어에서 속죄를 뜻하는 기본적인 단어는 kaphar로서 ‘덮다’ 또는 ‘용서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아람어와 아랍어에서 이와 유사한 단어는 kafat인데, 이는 ‘꼭 끌어안는다’는 뜻[입니다.] …

저는 그 모든 것들의 중요함을 깊이 생각하면서 기쁨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구속받는 것은 속죄받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표현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그분과 일치한다는 표현으로 꼭 끌어안아 주시는 것입니다.”(“속죄”, 성도의 벗, 1997년 1월호, 34~35쪽)

로마서 5:12~21. 아담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속죄

“오실 자의 모형”이었던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 또는 예시였다.(로마서 5:14)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바울은 아담이 가져온 타락의 결과를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속죄의 결과와 비교했다. 바울은 신약전서에서 속죄가 어떻게 타락의 결과를 극복하는지를 상술한 유일한 저자였다.(또한 고린도전서 15:21~22, 45~49 참조) 그리고 몰몬경에서도 몇몇 선지자가 이 개념을 가르쳤다.(니파이후서 2:25~26; 9:6~7, 21; 앨마서 42:2~15; 몰몬서 9: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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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이브, 그리스도와 마리아

왼쪽: 아담과 이브, 더글라스 엠 프라이어
오른쪽: 예수께서 그녀에게 “마리아”라고 말씀하셨다, 윌리엄 에프 휘테커 이세

로마서 6:1~11. 침례의 상징

바울은 교회 회원들에게 그들이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았으며, 그 침례를 통해 그들이 그리스도와 성약 관계를 맺었음을 상기시켰다.(로마서 6:1~4 참조)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을 선택한 교회 회원들은 그 성약 관계와 양립할 수 없었다. 더욱이, 바울은 침례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가 됨을 상징한다고 가르쳤다.(로마서 6:4, 11) 침례는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침례의 물에서 나오는 것으로 상징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살아 있는 영혼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거듭나서 하나님 왕국의 회원이 되어야만 하며, 이 두 가지 탄생에는 모두 물과 피와 영이라는 공통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모세서 6:59~60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엘 톰 페리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침례는 … 우리가 물의 무덤으로 내려갔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로마서 6:4)으로 일어서는 것을 상징합니다. 침례 의식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며,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46쪽)

게다가, 바울이 침례를 매장에 비유한 것은 침례가 침수로 행해졌음을 암시하며, 예수께서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침례를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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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침례 요한

예수께 침례를 베푸는 요한, 해리 앤더슨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침례에 수반되는 “새 생명”에(로마서 6:4) 대해 이렇게 가르쳤다.

“교회의 많은 회원들이 침례의 물로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죄 사함의 놀라운 은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더 있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을 침례받을 때 영원히 변화된다는 것을 이해합니까? …

침례를 받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받듭니다. 그분의 이름을 받드는 것은 이생에서 우리가 하는 가장 중대한 경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러한 경험을 거칩니다.

우리의 자녀 중 얼마나 많은 수가, 또한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가 침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이름뿐 아니라 순종의 법까지도 받든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

저는 그분 왕국의 일원인 우리 모두가, 우리의 침례와 확인이 그분의 왕국에 들어가는 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왕국에 들어갈 때 우리는 그분의 왕국에 속하겠다는, 그것도 영원히 속하겠다는 성약을 맺는 것입니다.” (“침례 성약: 왕국 안에 있으며 왕국에 속해 있음”, 리아호나, 2001년 1월호, 8~9쪽)

로마서 6:12~23. 죄의 종 또는 의의 종

바울의 기록에서 흔히 “종”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노예”를 의미하기도 하며, 바울은 죄를 선택했을 때 따르는 영적 결과를 가르치기 위해 노예 신분을 비유에 사용했다. 노예 제도는 로마제국에서 흔하게 행해졌기 때문에, 바울의 독자들은 종이 주인에게 복종하듯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로마서 6:13 참조), 또는 죄의 종이 되는 것과(로마서 6:17, 20 참조) 같은 비유를 쉽게 알아들었을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 노예들은 자신의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를 얻거나 주인에 의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바울은 계속해서 노예에 대한 비유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통해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대가를 치르셨다고 가르쳤다.(로마서 3:24) 그러나 자유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삶에서 죄를 버리고 “의에게 종”이 될 때(로마서 6:18) 성취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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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갑

한 쌍의 옛 수갑(사진 촬영: 존 루크; 영화 Impressions of a Prophet[선지자에 대한 인상]에 나오는 장면) 바울은 우리가 죄에 굴복할 때의 결과 또는 하나님께 복종할 때의 결과를 가르치기 위해 노예 상태를 비유로 들었다.

로마서 6:12~15.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침례를 받고 나면 우리의 주인은 의로워야 하며,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속량과 생명을 주는 속죄의 권능을 통해 죄라는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중독 행위를 포함한 많은 죄는 죄인을 “주장하”는[지배하는] 경향이 있다.(로마서 6:14) 예를 들어, 러셀 엠 넬슨 회장은 중독성 물질에 대해 말씀하면서, 무해하게 보이는 실험이 예속적인 습관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런 경향은 다른 많은 죄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처음에는 시험해 본다는 사소한 생각에서 악순환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시도가 습관이 됩니다. 습관에서 의존으로, 의존에서 중독으로 발전합니다. 점차적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습관은 노예의 굴레처럼, 너무도 사소해서 중단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 습관이 확고해진 후에야 비로소 감지됩니다. … 중독은 이후에 선택할 자유를 굴복시킵니다.”(“중독을 원하는가 자유를 원하는가”, 성도의 벗, 1989년 1월호, 6~7쪽)

로마서 6:16~23. 죄의 보상과 의의 보상

로마서 6장 16~23절에서, 바울은 죄의 보상과 의의 보상을 설명했다. 죄는 영적 사망을 낳지만 “하나님의 은사는 … 영생”이다.(로마서 6:23) “하나님의 왕국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은사 중 가장 큰 것이니라. 무릇 구원의 은사보다 더 큰 은사가 없음이니라.”(교리와 성약 6:13)

로마서 7:1~4. 두 가지 혼인 관계에 대한 비유: 모세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짐, 그리스도와 결합함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매여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한때 모세 율법에 매여 있었음을 설명하기 위해 혼인 관계를 비유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모세 율법이 성취되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여야 한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와 혼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로마서 7장 1~4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율법에 헌신하는 것을 아내가 남편에게 헌신하는 것에 비유한다. 남편이 살아 있는 한, 아내는 남편에게 매여 있으며 그가 정한 법에 순종해야만 한다. 만일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한다면 그녀는 간음을 범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는 더는 아내에게 어떤 행동을 지시할 수 없으며, 아내는 자유롭게 다른 남자와 혼인할 수 있다. 아내는 이제 죽은 남편에게 예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도 마찬가지다. 율법이 존속하고, 그런 까닭에 효력을 발휘하는 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과 혼인 관계에 있으므로 그 규정에 순종해야 한다. … 그러나 이제 율법은 성취되어 더는 존속하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바 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다른 사람, 곧 그리스도와 혼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253–54)

로마서 7:5~14; 8:3~4. “율법이 … 할 수 없는 그것”

몇몇 독실한 유대인들은 바울이 모세 율법에 반대하여 모독적으로 말한다고 그를 비난했다.(사도행전 21:28 참조) 로마서 7~8장에서, 바울은 모세 율법은 훌륭했으나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규정해 준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되었으므로 율법은 신성한 것이었다.(로마서 3:20; 7:7, 12~13 참조) 그러나 율법은 인간을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리게 만드는 타락의 결과를 극복할 수 없으며(로마서 7:14), 율법만으로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문제를 바로잡거나 사람들이 영을 통해 변화하도록 방편을 제공할 수도 없었다.(로마서 8:3~4; 갈라디아서 3:21 참조)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얻게 된 은혜가 필요하다.

로마서 7:14~27. 명확한 설명

조셉 스미스 역, 로마서 7장은 이 어려운 성구들에 대해 다수의 명확한 설명을 제공한다.(경전 안내서 참조)

14 무릇 우리는 계명이 영적인 줄 아노라. 하지만 내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나는 여전히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음이니라.

15 그러나 이제 나는 영적이니 이는 내가 행하라 명 받은 바를 행하며 또 허락되지 아니하도록 명 받은 바를 나는 허락하지 아니함이니라.

16 이는 내가 알기에 옳지 않은 것을 나는 행하려 하지 않음이요 죄가 되는 것은 내가 미워함이니라.

17 그러할진대 만일 내가 허락하려 하지 아니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면 나는 율법이 선하다 함에 동의하는 것이니 나는 정죄받지 아니하느니라.

18 그러하면 이제 를 짓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도리어 나는 내 안에 거하는 그 죄를 굴복시키려 하는도다.

19 무릇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알며, 무릇 의지는 내게 있으나 선한 것을 행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으니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뿐이라.

20 무릇 내가 율법 아래 있을 때 행하였을 선은 선하지 않음을 내가 알게 되었나니 그러므로 나는 이를 행하지 아니하노라.

21 그러나 내가 율법 아래에서 행하고자 아니한 악은 내가 선함을 알게 되었나니 이를 나는 행하는도다.

22 이제 만일 내가 그리스도의 도움을 통하여 율법 아래에서 행하고자 아니한 것을 행하면, 나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니, 더 이상 내가 잘못 행하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 안에 거하는 죄를 굴복시키기를 구하노라.

23 그리하여 율법 아래에서 내가 안 것은 선을 행하고자 할 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라 이는 내가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함이니라.

24 그리고 이제 나는 다른 율법을 보나니 곧 그리스도의 계명이라, 이는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도다.

25 그러나 내 지체는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도다.

26 만일 내가 내 안에 있는 죄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육신을 따라 죄의 법을 섬길진대 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14~8:13. “육신”과 “속사람” 간의 싸움

로마서 7~8장에서, 바울은 “속사람”과 “육신” 간의 싸움에 대해 기록했다.(로마서 7:22, 25; 또한 갈라디아서 5:17 참조)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율법에 반하는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감정과 욕구를 이따금 경험한다.(니파이후서 2:29; 이더서 3:2 참조) 바울은 이 성구들에서 “나”, “ 육신”, “ 속에 거하는 죄” 등의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생활하려 애쓰는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겪는 내적 갈등을 묘사한다. 다른 고대 기록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상황을 논하기 위해 때로 일인칭으로 수사학적 기록을 했다.(로마서 3:7; 고린도전서 13:1~3 참조)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는 바울의 말은(로마서 7:25) 바울이 육신의 유혹에 굴복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의 육신이 그와 대립했음을 의미했다. 중요한 점은 바울이 육신의 연약함으로부터 구조받을 수 있는 근원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이사야 6:6~8; 니파이후서 4:19~20 비교)

러셀 엠 넬슨 회장은 우리의 육신과 관련된 시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의 시기에서 육신이 유혹이나 시련이나 고통을 겪지 않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제심을 키운다면, 육체의 욕망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그러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할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22:42)

큰 시련이 여러분에게 닥칠 때 구주의 영광스러운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요한계시록 3:21)” (“극기” 성도의 벗, 1986년 1월호, 37쪽)

로마서 8:1~13.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라]”

로마서 8장 1~13절에서, 바울은 “영”과 “육신”을 누차 언급했다. 이라는 단어로는 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로마서 8:2),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과 모세 율법 이후에 확립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칭했다. 육신이라는 단어로는 주로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한(로마서 8:3) 모세 율법을 지칭했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로마서 8장 1~13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생명과 평안은 모세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하는 은혜를 통해 온다. 모세 율법에 따른 행위는 세속적인 것, 육신의 것, 죽음의 것을 다룬다. 거기에는 속죄하고, 속량하고, 구원하고, 현세에서는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주고 내세에서는 영생을 가져다줄 권능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적인 것, 영의 것,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을 다룬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의의 일을 행하는 자는 자기 상을 받으리니, 곧 이 세상에서는 평화를, 장차 올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으리라.’ (교리와 성약 59:23)”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259–60)

로마서 8:13. 영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임]”

기독교 내 일부 단체와 다른 종교적 관례에서는 육신의 욕구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육체적 즐거움을 온전히 삼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많은 육체적 즐거움은 죄가 되지 않으며, 유익하다. 바울은 성령을 동반하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의도하신 목적에 따라 사용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영은 “몸의 행실을 죽이[억제하]”고 영적 삶을 전해 줄 수 있다.(로마서 8:13; 또한 갈라디아서 5:16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팔리 피 프랫(1805~1857) 장로도 다음과 같이 이와 유사한 가르침을 주었다. “성신의 은사는 … 모든 자연적인 정열과 감정을 정화하고, 지혜의 은사를 통해 그것들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도록 조절해 준다.”(Key to the Science of Theology [1978], 61)

로마서 8:14~16.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

경전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로마서 8:16) 언급될 때는 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첫째,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영의 자녀들이다.(말라기 2:10; 사도행전 17:29; 히브리서 12:9; “가족: 세상에 전하는 선언문”, 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129쪽 참조)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나타내고, 회개하고, 침례와 성신의 은사를 받을 때, 우리는 성약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요한복음 1:12; 갈라디아서 3:26~29; 모사이야서 5:7; 교리와 성약 11:30; 모세서 6:65~68 참조)

로마서 8장 16절에서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한 것은 맥락상 두 번째 의미인 성약 관계를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와 맺는 성약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았다.(로마서 8:14) 성신의 동반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약의 자녀이며 우리가 충실할 경우 언젠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리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는 것이다.(로마서 8:16~17)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말한 축복, 즉 “하나님의 상속자”(17절), 우리를 위한 영의 중재,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의 충만한 표현 등과 같은 축복은 하나님의 성약의 자녀들이 누리는 것이지만, 그분의 모든 영의 자녀가 반드시 누리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 8:15. “양자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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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 아구스도의 조각

가이사 아구스도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던 시기에 로마의 통치자였던 가이사 아구스도는(누가복음 2:1 참조) 그의 전임자였던 가이사 율리어스에게 입양된 사람이었다. 입양은 로마제국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바울의 독자들에게 그 용어는 친숙한 개념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합법적으로 입양한 사람은 친자녀가 누리게 될 모든 권리와 특권을 입양된 사람에게 주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 성약을 맺음으로써 “양자의 영”을 받을 때(로마서 8:15),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된다.(로마서 8:17)

로마서 8:15.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구주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또는 “나의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람어 Abba[아빠]라는 말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셨다.(마가복음 14:36 참조) 구주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그들도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마태복음 6:9; 누가복음 11:2 참조)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라는 바울의 말은(로마서 8:15) 초기 기독교인들이 구주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불렀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아버지”라는 칭호가 자신들이 하나님과 함께 친밀하고도 개인적인 관계를 누리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모든 칭호 중에서도 “아버지”는 그분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당신을 부를 때 사용하라고 하신 칭호이다.

로마서 8:17.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로마서 8:17) 의미하는 바를 이렇게 설명했다. “함께 상속자가 된 사람은 주된 상속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상속자들과 함께 동등하게 상속받는다. 함께 상속자가 된 각각은 모든 것의 전체를 나누지 않고 동등한 몫으로 취한다. 만일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안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한 사람이 모든 권능을 지닌다면, 그와 함께한 모든 상속자들도 마찬가지이다.”(Mormon Doctrine, 2nd ed. [1966], 395)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렇게 가르쳤다. “회복된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신학에서 볼 때, 지상 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우리의 운명을 실현하도록, 즉 그분처럼 되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 성경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묘사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고(로마서 8:16~17) 묘사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로마서 8:17) 하며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된다라고(요한1서 3:2)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지상 생활의 목적은 육신을 얻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복음의 율법과 의식에 순종함으로써, 승영 또는 영생으로 불리는 영화로운 부활된 해의 왕국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것임을 믿습니다.”(“배도와 회복”, 성도의 벗, 1995년 7월호, 85쪽)

로마서 8:17.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구주께서 속죄 희생의 일부로 겪으신 고통을 우리도 겪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고통을 그분과 함께 겪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마태복음 11:28~30 참조) 칠십인 정원회의 키스 알 에드워즈 장로는 이런 식으로 고통을 대처하면 구주를 더 잘 알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고난, 슬픔, 비통함을 대처할 때 그리스도에 초점을 둠으로써 우리는 영적인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옛 선지자 바울은 우리가 고난을 통해 구주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된다고 기록했습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로마서 8:16~17]

그렇다고 일부러 어려움이나 고난을 찾지는 마십시오. 이 성구가 가르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주를 더 잘 알게 해 주는 것은 우리가 어떤 태도로 우리에게 주어진 어려움과 고난에 대처하느냐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

고난이 고의로 온 것이든 무심코 온 것이든, 우리가 고난을 견뎌야 할 때 우리는 남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며 우리가 선택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당하셨던 고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됩니다. …

… 우리는 … 그분이 겪으신 고통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감사할 수 있으며, 그분의 영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우리의 구주를 매우 실제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그리하여 그들이 당신을 알도록”, 리아호나, 2006년 11월호, 99~101쪽)

로마서 8:26~27. “성령이 …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라”

다른 사람을 위해 간구하거나 행하는 것을 중보라고 한다. 로마서 8장 26~27절에서, 바울은 때때로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가르쳤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영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성신은 “충실한 이들을 인도하며 그들이 주님의 마음과 뜻을 알고 말하도록 이끈다. 완전한 기도는 언제나 영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기도이며, 그런 기도는 늘 응답된다. 영은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을 미리 알려 주기 때문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266; 또한 교리와 성약 50:29~30 참조)

로마서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칠십인 정원회의 제임스 비 마르티노 장로는 바울이 로마서 8장 28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한 말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마 성도들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를 받기 불과 몇 년 전에 사도 바울은 흥미로운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로마서 8:28]라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또 완전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좀 더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데 필요한 속성과 성품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경험을 겪게 하십니다. 시련은 여러 가지 형태로 오지만, 우리가 경험에서 유익을 얻는 방법만 깨닫는다면 각 시련은 우리가 조금 더 구주와 같이 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 교리를 이해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확신하게 됩니다. 이생에서 왜 그런 일을 겪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경험을 통해 성장하리라는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리아호나, 2010년 5월호, 101쪽)

로마서 8:29.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누구의 형상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들, 즉 무죄하고 순진하며 결점 없는 남자와 여자, 하나님과 똑같은 속성과 형상을 지닌 사람들을 창조하셨습니다.[창세기 1:26~27 참조] 인간은 타락했을 때 그 형상을 잃지 않았으며, 그의 속성은 그의 창조자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또한 아버지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히브리서 1:3 참조] …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 그리고 복음에 대한 순종을 통해 우리는 다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르게 될 것이며[로마서 8:29 참조], 그 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 및 속성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 52쪽; 또한 고린도후서 3:18; 요한1서 3:2; 앨마서 5:14 참조)

로마서 8:29.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로 언급했다.(로마서 8:29; 또한 히브리서 2:17 참조) 구주를 형[오빠]으로 부르는 것은 어떤 면에서 정확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구주요 창조주이며 아들이신 하나님으로서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할 존경을 의도치 않게 축소하게 될 수도 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일부 후기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그분이 아들이시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상 가족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그분을 자녀, 아들, 형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개인적인 관계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자녀이며, 아들과 딸이고, 형제와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분을 하나님으로 언급하는 것이 좀 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분에 대해 다정하고 개인적인 감정을 발전시키려는 시도에서, 일부 사람들은 그분에게 인간성을 부여하며 때로는 그분의 신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점을 분명히 합시다. 예수님이 전세에서 우리의 맏형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세에서 우리가 복음 성약 안에서 그분의 아들과 딸로서 ‘거듭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우리는 믿습니다.”(“Building Bridges of Understanding,” Ensign, June 1998, 67)

로마서 8:29~30. 예정설

로마서 8장 29~30절에서, 미리 정하다[predestinate]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미리 지명하다’라는 뜻이며,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의거하여 일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과 같이 되도록 예임되는 것을 나타낸다.(또한 에베소서 1:3~4; 베드로전서 1:2 참조) “예임은 개인이 특정한 부름이나 책임을 받게 된다고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기회는, 예임이 전세에서의 의로움의 결과로 왔듯이, 이 세상에서 선택의지를 의롭게 행사한 결과로 온다.”(“예임”, 신앙에 충실함: 복음 참고서[2004], 142쪽; 또한 앨마서 13:3~4 참조)

로마서 8:31~32.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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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림

십자가형 중에 깃든 어둠, 폴 구스타브 도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바울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와 우리의 영원한 행복에 전념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속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도 교회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십자가에 달리심과 속죄의 무한한 대가를 생각해 볼 때, 저는 그분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실 것임을 여러분에게 약속할 수 있습니다. …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역경이 무엇이든지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고쳐야 하는 부서진 것들”, 리아호나, 2006년 5월호, 71쪽)

로마서 8:37.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장 37절에서, “넉넉히 이기느니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바울이 로마서 5장 9~20절에서 “더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성구들을 반영하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가능해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담의 타락에 따른 결과보다 더욱 강력함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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