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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28장
사도행전 21~28장 소개 및 연대
사도행전 21~28장에 기록된 바울의 성역 중의 사건들과 구주께서 지상에서 베푸신 성역의 마지막은 중요한 측면에서 유사점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은 똑같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했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에 그곳에서 겪게 될 고난을 예언했으며, 예루살렘에서 일부 유대인들에게 살해될 음모에 직면하고, 그들에게 체포되어 이방인 당국에 넘겨진 후, 유대인 평의회와 로마 총독에게서 재판을 받았다. 바울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사도행전 주제의 일부분을 차지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랐던 사도들 간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이 장들에서, 바울은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 종교 및 행정 당국자들 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는 연설을 다섯 차례 했는데, 마지막으로 아그립바 왕 앞에서 훌륭하게 자신을 변호했다.(사도행전 22:1~21; 23:1~10; 24:10~21; 25:8~11; 26:1~29 참조) 바울은 이런 기회를 활용하여 부당한 고발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간증 또한 나누었다. 이 연설은 바울이 왕과 통치자들 앞에서 간증하게 되리라는 주님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사도행전 9:15 참조) 또한, 바울이 로마로 간 것은 사도들에게 “땅 끝까지”(사도행전 1:8)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성취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도행전 21~28장 주해
사도행전 21:1~12. 바울이 세 번째 선교 여행을 마치다
바울은 세 번째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중에 여러 도시를 들렀다. 가이사랴에서 그는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렀다.(사도행전 21:8) 신약전서에서 말하는 전도자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다.(에베소서 4:11 주해 참조) 빌립은 일찍이 사도들을 도와서 교회 회원들의 어려움을 보살피도록 사도들에게서 부름을 받은 바가 있다.(사도행전 6:5; 8:5~13 참조) 바울과 동료 사역자들이 빌립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찾아와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다면 결박되고 말 것이라고 예언했다.(사도행전 21:10) 아가보가 주님의 영을 동반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결박되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21:33 참조)
사도행전 21:13. “나는 … 결박 당할 뿐 아니라 …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은 한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일에 동의한 사람이었지만(사도행전 8:1~3; 9:1; 22:4, 20; 26:9~11 참조),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고 죽음도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동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반대에 부딪히게 되리라는 느낌을 받았다.(로마서 15:30~31 참조) 그렇지만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기부금을 전달하기 위해 직접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바울의 결심에서 우리는, 인생의 어떤 행로를 따를 때 비록 역경이 닥쳐 오더라도 그 길이 계속해서 따라가야 할 올바른 길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다. 또한, 우리는 결과에 상관없이 주님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도 배운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1899~1994) 회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나타내 보이는 확신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변화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을 것입니다. … 그들은 자신의 뜻을 단념하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5:30 참조) 그리고 항상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합니다. (요한복음 8:29 참조) 그런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도 하며,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분을 위해 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Born of God,” Ensign, Nov. 1985, 6)
사도행전 21:17~21. 유대인 기독교도들과 모세 율법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많은 유대인 개종자들이 자기가 선교 여행을 하면서 했던 말, 즉 모세 율법, 특히 할례 의식에 반대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 고민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세 율법에 관하여 예루살렘 회의에서 내린 결정의 의미를(사도행전 15:6~31 참조)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 회원들이 많았다.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에 나오는 Bible Dictionary[성경 사전]에 따르면, “베드로와 십이사도가 이끄는 교회는 영의 인도를 받아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는 의무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교회의 유대인 회원들이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해야 하는지 여부에 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 문제에 관하여 경전을 읽는 독자에게는, 진짜 문제는 할례만이 아니라 교회 회원들이 모세 율법을 계속 준수해야 하는가 하는 더 큰 문제가 있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교회 회원, 특히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회원들은 모세 율법의 의례와 의식을 중지하는 것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 했던 것으로 보인다.(사도행전 21:17~25) 이는 니파이인들 사이에 세워진 교회와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을 알고서 모세 율법을 즉시 중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3니파이 15:1~4; 모로나이서 8:8)”(Bible Dictionary, “Circumcision”)
사도행전 21:21~37. 유대인의 정결 의식
사도행전 21장 21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모세 율법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했음이 분명하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는 필수 요건이 아니라고 가르쳤지만, 그들은 유대인 개종자들이 할례를 행하거나 모세 율법의 다른 규정들을 준수하는 것을 말리지는 못했다.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계속 성전에서 경배를 드렸으며(사도행전 2:46; 3:1; 5:19~25, 42 참조), 바울은 여전히 자신을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으로 여겼다.(사도행전 22:3; 로마서 11:1; 고린도후서 11:22; 빌립보서 3:4~6 참조)
바울을 향한 나쁜 감정을 없애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들이 이방 땅을 여행한 후 관례상 행하는 일주일간의 성전 정결 의식에 참여하도록 권했다. 바울이 이 성전 의식을 공개적으로 준수하는 것은 그가 소문처럼 모세 율법이나 성전에 반하는 가르침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줄 것이었다. 시드니 비 스페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도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교회의 유대인 그룹과 이방인 그룹이 함께 단합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기에, 중재자 역할을 맡기로 기꺼이 합의했다. … 성전 의례에는 7일간의 정결과 희생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희생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 어린 양 네 마리와 비둘기 여덟 마리를 구입했을 것이며, 그 네 사람은 함께 성전에 가서 의례에 참여했을 것이다. … 그렇게 하여 사도 바울은 부득이 이방인의 구역과 여인의 구역을 가로질러 이스라엘의 구역으로 들어가, 마침내 번제 제물이 준비된 제단에 다가갔을 것이다. 그는 지지자나 반대자가 다 볼 수 있는 이러한 성전 구역들을 반드시 지나가야만 했다.”(Paul’s Life and Letters [1955], 208–9)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의 제의에 따라 성전으로 가서 유대인의 정결 의식에 참여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서 그에게 반대하여 소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그가 모세 율법과 성전에 반대하는 가르침을 전하고, 이방인의 출입이 금지된 성전 안뜰로 이방인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다고 비난했다.(또한 에베소서 2:12~14, 18~19 주해 참조) 바울은 이 비난에 대하여 결백하였지만(사도행전 21:29) 그런 행위는 사형죄에 해당했으므로, 군중은 그를 성전 밖으로 끌어내어 때리기 시작했고, 바울은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사도행전 21장 34, 37절에 나오는 “영내”라는 말은 안토니아 요새를 의미하며, 이는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는 군대 막사였다.
사도행전 21:38. “네가 … 애굽인이 아니냐”
후에 글라우디오 루시아로 밝혀진 로마 천부장과(사도행전 23:26 참조) 여러 군인들이 바울을 폭행하는 폭도들 속으로 들어가 그를 체포했다. 천부장은 바울을 애굽인 반란자로 오해하여 그를 심문했다. 그때로부터 약 삼 년 전, 애굽인인 유대인이 광야에서 수많은 추종자들을 모아 감람산까지 진입했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자신들이 예루살렘 성벽으로 다가가면 성벽이 무너져 로마 군인들을 쉽게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로마 총독이었던 벨릭스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격퇴했지만, 그 선봉자를 생포하지 못했으며 그는 여전히 도피 중이었다.
사도행전 21:39~22:23. 바울이 자신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다
바울이 반란자가 아님을 알게 된 로마 천부장은 바울이 자신을 폭행했던 군중을 대상으로 말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성전에 있던 군중은 바울의 개종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을 하자 그들은 적개심을 드러내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렸다. 이런 행동은 유대인들이 보통 분개와 혐오를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사도행전 22:24~30. 바울이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언급하다
로마 천부장은 아람어로 전하는 바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왜 군중이 바울에게 화를 내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천부장은 바울을 채찍질하고 심문하라고 명했다. 채찍이란 작은 금속 조각이나 뼛조각이 촘촘히 박힌 여러 가닥의 긴 가죽끈을 나무 손잡이에 고정하여 만든 것으로, 사람을 불구로 만들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고문용 무기였다. 이 명령에 대해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고 항변했으며, 그렇게 해서 고문을 통해 심문을 받는 것은 면하게 되었다. 로마 시민권은 사도행전 22장 24~30절에 기록된 대화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중요한 특권을 수반하며,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도행전 22:30~23:10. 바울이 유대인 공회 앞에 나타나다
바울이 유대인 공회 앞에 섰을 때, 대제사장은 바울의 얼굴을 치라고 명했다. 이는 유죄로 판명이 날 때까지 피의자를 체벌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유대인의 법률을 어기는 행위였다. 바울의 성난 반응은 고의로 대제사장에게 무례를 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동은 단순히 대제사장을 알아보지 못한 데서 비롯한 것일 뿐인데, 그것은 아마도 그가 오랫동안 예루살렘을 떠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대제사장을 매도했음을 깨달은 바울은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니었더라도 그 직책에 대해서는 곧바로 경의를 표했다.
공회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구성되었음을 인지한 바울은 재치 있게 공회의 두 당파가 서로에게서 등을 돌리도록 자신이 바리새인이며 부활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공회의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에게 맞서 바울을 옹호하였다.
사도행전 23:10~11. 바울이 구주의 방문을 받다
천부장은 바울이 화난 군중에게 “찢겨질까” 두려워 그를 데려가서 감시하며 보호했다.(사도행전 23:10 바울이 로마 군인들에게 구금되어 있는 동안, 부활하신 구주께서 그를 방문하셔서 그가 살아서 로마에서 간증을 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셨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이 방문을 이렇게 논했다. “바울은 박해를 받아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상태였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안과 확신이 필요했다. 그에게 그런 위안과 확신이 어떻게 주어지겠는가? 주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실 수 있었다. 그분은 성신의 권능으로 바울의 영혼에 말씀하실 수 있었다. 또는 여러 하늘을 열어 다시금 영원한 세상의 경이로운 것들을 보여 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울의 용감한 봉사, 지치지 않는 헌신,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 덕분에 하늘의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시는 축복이 내려졌다. 예수께서 그의 옆에 서셨다. 틀림없이 많은 말씀을 하셨고 많은 일이 있었겠지만, 우리를 위해 기록된 말은 주님의 특별한 사도가 장차 로마에서 주님을 증거하리라는 약속뿐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1973], 2:191)
사도행전 23:12~15.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
한 무리의 유대인들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였다.]”(사도행전 23:12) 이 음모는 몰몬경에 기록된 비밀 결사와 유사한 것이다. 비밀 결사는 비밀리에 활동하며 정식으로 맹세를 하고, (살인을 포함하여) 폭행과 약탈로 사람들을 위협하며, 이득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앨마서 37:25~31; 힐라맨서 6:16~31; 이더서 8:13~26 참조)
사도행전 23:16~24:21. 바울이 벨릭스 앞에서 재판을 받다
바울의 조카가 바울을 죽이려는 비밀 음모를 듣고서 재빨리 바울에게 소식을 전했으며, 바울은 그를 보내어 로마 관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알았기에, 바울이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 재판을 받도록 군사들을 파견하여 바울을 가이사랴까지 호송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제사장 여러 명이 가이사랴에서 열린 바울의 재판에 참석했으며, 그들은 로마 변호사이자 연설가인 더둘로를 고용하여, 벨릭스에게 바울의 범법 혐의를 확신시키려 했다.
바울은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골칫거리라는 뜻으로) “전염병 같은 자”이며, 불온한 무리의 우두머리이고, 성전을 모독했다는 혐의를 받았다.(사도행전 24:5~6 참조) (구주께도 이와 유사한 선동죄가 부과되었다. 누가복음 23장 2, 5절 및 요한복음 18장 30절을 참조한다.) 더둘로의 능변을 정중하게 경청한 바울은 자신에 대한 비난을 능숙하게 피하며 자신이 고발된 지 12일이나 지났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믿을 만한 증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자신은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다고 단언했으며, 자신은 단지 구호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왔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목적이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지 반란을 선동하는 것이 아님을 알렸다.
사도행전 24:14~15. “도”
사도행전에서, “도[Way]”는 보통 기독교를 말할 때 사용된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길, 또는 나아가는 방향을 나타낸다.(사도행전 9:1~2; 19:9, 23; 22:4; 24:22 참조) 기독교인의 중심이 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길”이시며(요한복음 14:6) 그분을 통해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는 교리이다.(요한복음 5:28~29; 고린도전서 15:21~22 참조)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반대하는 진짜 이유가 자신이 부활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사도행전 24:14~15 참조)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전하는 부활의 메시지는 이단이 아니라 유대 민족이 오랫동안 소망해 왔던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사도행전 26:6~8; 28:20 참조)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모두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보편적인 희망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 때 오는 눈물과 시련을 통해, 두려움과 슬픔을 통해, 마음의 고통과 외로움을 통해서 삶은 영원하다는 확신이 옵니다. 우리 주님이신 구주께서는 그 사실에 대한 살아 계신 증인이십니다.
제 온 마음을 다해 영혼의 간절함으로, 저는 특별한 증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소리 높여 간증하고 선언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의 독생자이십니다. 우리의 구속주이시며, 그분은 우리와 아버지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우리 죄를 속죄하시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그분이시며, 그분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내 구주 살아 계시다!”,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25쪽)
사도행전 24:16. “앙심에 거리낌이 없[다]”(또한 사도행전 23:1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회장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언젠가 우리 각 사람은 주님께 보고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 해 전 임종을 목전에 둔 친한 친구와의 진지한 대화에서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친구에게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의 대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용기와 확신을 갖고 그가 말했습니다. ‘내 인생은 조사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가노라. 그러나 나는 여름 아침처럼 고요하도다. 나는 하나님께 대해서나 모든 사람에 대해서 양심에 아무 거리낌이 없도다.’[교리와 성약 135:4]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마지막 접견을 준비할 시간입니다.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기꺼이 십일조를 내고 있는가? 지혜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저속한 말과 욕을 하지 않는가? 도덕적으로 의로운가? 부활할 수 있게 해 주고 영생의 가능성까지 가져다준 속죄에 대해 나는 정말로 감사하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게 영원히 인봉해 주는 성전 성약을 존중하는가?’” (“개인의 신권 책임”, 리아호나, 2003년 11월호, 44~45쪽)
사도행전 24:24~26. “내가 틈이 있으면”
벨릭스가 로마 총독으로 통치했던 시기는 잔인함과 부도덕함으로 얼룩져 있다. 벨릭스는 돈을 갈취할 생각으로 바울을 2년간이나 구류하였다.(사도행전 24:25~26 참조) 벨릭스는 부도덕한 사람이었지만,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을 듣고 깊이 감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틈이 있으면”(사도행전 24:25) 바울을 부르겠다고 말하면서 더 알아보는 일을 미뤘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교회 회원들에게 단지 편의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에 의거하여 결정을 내리라고 조언했다. “때로 우리는 성약에 따라 살기보다는 편의에 따라 살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복음의 표준에 따라 생활하고 진리를 옹호하며 회복을 증거하는 것이 항상 편한 것만은 아닙니다.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늘 편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교회의 부름에 응하는 것도 언제나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약을 맺었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뜻깊은 방법으로 봉사하는 기회는 편한 때에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편안한 생활만 하는 것에는 아무런 영적인 힘이 없습니다. 그 힘은 우리가 성약을 지키는 데서 나옵니다.”(“꺼지지 않는 불길처럼”, 리아호나, 1999년 7월호,102쪽)
사도행전 24:27; 25:9.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벨릭스는 바울을 석방하는 대신에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그를 2년간 구류하였다.(사도행전 24:27 참조) 벨릭스의 후임자인 보르기오 베스도도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보였는데, 그는 적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예루살렘으로 그를 보내자고 청했다.(사도행전 25:3, 9 참조) 제일회장단의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은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인정만을 구하는 행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무리로부터 주목을 끌거나 인정받으려고 애씁니다. 동년배로부터 받는 그러한 압박은 평상시라면 그들이 하지 않을 일들을 하게 합니다. 그러한 행위는 강함이 아니라 연약함에서 나옵니다.”(“극기의 힘”, 리아호나, 2000년 7월호, 52쪽)
사도행전 25:11.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다
바울은 베스도가 제언한 대로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재판을 받는다면 목숨이 위태로우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바울은 대신 가이사에게 상소하기로 했다. 바울은 로마 시민으로서 로마에 있는 가이사 앞에서 직접 재판을 받도록 상소할 권리가 있었다.
사도행전 25:13~22. 헤롯 아그립바 이세
헤롯 아그립바 이세(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로도 불림)는 유대인을 통치했던 헤롯 왕조의 일곱 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그는 주후 55~93년 무렵에 갈릴리 바다 북동쪽 지역을 통치했다. 그는 야고보를 사형에 처하고 베드로를 투옥한 헤롯 아그립바 일세의 아들이었고(사도행전 12:1~4 참조), 침례 요한을 참수시킨 헤롯 안디바의 손자였으며(마태복음 14:1~12 참조), 베들레헴의 유아들을 학살하도록 명한 헤롯 대왕의 증손자였다.(마태복음 2:16 참조)
아그립바의 왕국은 베스도가 통치하는 지역의 북쪽에 있었다. 아그립바와 그의 누이인 버니게(어떤 이들은 두 사람이 근친상간을 했다고 믿었음)가 가이사랴에 있는 베스도를 찾아왔을 당시에 바울은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 송사에 대해 로마인인 베스도보다는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베스도는 아그립바가 바울이 왜 고소당했는지를 자신에게 설명해 주고, 가이사에게 보내는 상소문을 작성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길 바랐다.(사도행전 25:24~27; 26:3 참조)
사도행전 25:23~26:29.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바리새인으로서 기독교인을 어떻게 박해했는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어떻게 시현을 보았는지, 그리고 그 후 복음을 어떻게 전파했는지를 들려주었다. 바울은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 말했을 때와는 다른 접근 방식으로 아그립바에게 자신을 변호했다.(사도행전 24:10~21 참조) 바울은 총독에게 자신이 선동죄를 범하지 않았음을 강조했는데, 그 혐의는 로마 통치자가 가장 관심을 두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그립바는 유대인이었으므로, 바울은 그에게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충실했음을 강조하였다. 아그립바가 유대인 선지자들의 기록을 믿는다는 점을 알았던(사도행전 26:27 참조) 바울은 자신이 선지자들의 전통에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가르쳤다고 설명했다.(사도행전 26:22~23 참조; 이사야 42:6; 49:6 비교)
사도행전 26:19~21, 24~25.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시현에 관해 했던 이야기들 간의 차이
바울은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자신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구주를 본 시현 이야기를 자세히 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의 시현에 관한 이야기가 몇 번 나오는데, 이야기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사도행전 9:3~20; 22:4~21; 26:9~19 참조; 또한 갈라디아서 1:15~16 참조) 예를 들어, 이야기마다 “빛”에 대한 묘사가 조금씩 다르다.(사도행전 9:3; 사도행전 22:6; 사도행전 26:13 참조) 오직 사도행전 9장 17절에서만 아나니아가 안수례로 바울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었음을 알려 주고, 사도행전 26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바울과 함께한 사람들이 했던 경험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
더욱이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했던 이야기에서, 다음 세 가지 계시를 마치 하나인 것처럼 결합해서 전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이 바울에게 하신 말씀(사도행전 26:14~16을 사도행전 9:4~6 및 22:7~10과 비교), 후에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했던 말(사도행전 26:16을 사도행전 22:15과 비교), 주님께서 한참 후에 예루살렘에서 시현으로 바울에게 하신 말씀.(사도행전 26:17을 사도행전 22:21과 비교) 이런 차이는 각각 청자가 다르고 각 이야기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비평가들은 첫번째 시현에 대해 기록된 몇 가지 이야기에서 서로 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비난했다. 그러나 바울과 마찬가지로, 이런 차이로 선지자 조셉이 하나님 아버지와 구주에 대한 시현을 보았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없애지는 못한다.
사도행전 26:19.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 거스르지 아니하고”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자신이 받은 하늘의 시현에 충실하였다고 말했다. 우리도 바울처럼 성신의 속삭임, 경전의 말씀, 또는 살아 있는 선지자들의 음성 등 주님에게서 받는 지시에 순종해야 한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인생의 큰 시험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들을 시험하여 주 그들의 하나님이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들이 다 행하는지를 보리라.’[아브라함서 3:25]
인생의 큰 과제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그러고 나서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계명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큰 계명—주님을 사랑함”, 성도의 벗, 1988년 7월호, 4쪽)
사도행전 26:21. 바울과 조셉 스미스 둘 다 박해를 받았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자신이 첫번째 시현을 본 후에 겪었던 박해를 사도 바울의 경험에 비교했다.
“나는 … 바울과 매우 비슷하게 느꼈[다.] … 그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그가 빛을 보고 음성을 들었을 때 그에게 있었던 시현에 대하여 이야기했어도, 그를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일부는 그가 거짓말 한다고 하였고, 다른 이들은 그가 미쳤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조롱당하고 욕설을 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의 시현의 실재성을 파괴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시현을 보았고 자기가 보았음을 알았으며, 하늘 아래 어떠한 핍박도 그것을 변경시킬 수 없었다. 비록 사람들이 그를 핍박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할지라도, 그는 자신이 빛을 보았으며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의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알고 있었을 것이며, 온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로 하여금 다르게 생각하게 하거나 믿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나는 실제로 빛을 보았고 그 빛 가운데서 두 분을 보았으며, 그분들은 실제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비록 내가 시현을 보았다고 말함으로써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 내가 그것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알고 계심을 내가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조셉 스미스—역사 1:24~25)
사도행전 26:26.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바울은 베스도와 유대인이었던 아그립바 왕 모두에게 복음을 증거하고(사도행전 26:18 참조) 구주의 죽음과 부활을 간증했다.(23절 참조) 베스도가 그의 가르침을 거부한 후(24절 참조),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26절) 왕은 자신이 가르치는 바를 알고 있다고 담대히 말했다. 복음 진리는 감춰지거나 “한쪽 구석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덕 위에서 비치는 빛이다. 구주의 시대와 바울의 시대에, 그리고 우리 시대에도 그것은 참이다.
사도행전 26:22~31.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사도행전 26장 22~29절에서는 바울이 가르치는 방식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모세를 포함하여 모든 선지자들이 가르친 것,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겪고 돌아가신 후 “죽은 자 가운데서 … 다시 살아나”신 것을 가르쳤다.(사도행전 26:23; 또한 야곱서 4:4; 교리와 성약 52:9 참조) 바울은 아그립바 왕도 이 가르침이 참임을 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며, 그래서 그는 왕이 진리에 온전히 전념하기를 바랐다.(사도행전 26:27, 29 참조) 그러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는(사도행전 26:28) 답변에서, 아그립바는 바울이 진리를 가르쳤음을 알았지만 그 지식에 따라 행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해롤드 비 리(1899~1973) 회장은 순종에 대해 변명하려 하는 교회 회원들에게 아그립바 왕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적용했다.
“한 훌륭한 감독님은 자신이 아는 가장 슬픈 말이라고 칭한, 어떤 높은 위치의 사람이 했던 말에 대해 흥미로운 지적을 했습니다. 그 말은 사도 바울의 시대에,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개종에 대해 힘 있는 간증을 했을 때 나온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사도행전 26:28) 그런 후, 감독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왕은 진리를 알았으나 그에 따라 요구되는 일을 행할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 ’
그러면서 [감독님은] 짧지만, 힘 있는 설교로 자신의 와드에서 발견한 몇 가지 것들을 설명했습니다. ‘주님께서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마가복음 10:21) 하신 말씀에 대해 어떤 회원들은 똑같지는 않지만 거의 이렇게들 말합니다. “저를 권하여 정직한 사람이 되게 하려 하시는군요. 그러나 저는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부정행위를 해야 해요.” …
‘저를 권하여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게 하려 하시는군요. 그러나 일요일에 운동하는 것이 재미있어요.
저를 권하여 이웃을 사랑하게 하려 하시는군요. 그러나 그 사람은 비열해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수용하게 하려 하시는군요. 그러나 그들은 전적으로 틀렸어요. … 가정 복음 교육을 가게 하려 하시는군요. 그러나 오늘 밤은 너무 춥고 습해요. 십일조와 헌금을 내게 하려 하시는군요. 그러나 우리는 텔레비전을 새로 사야 해요. … 하게 하려 하시는군요! 하게 하려 하시는군요! 하게 하려 하시는군요!’” (Conference Report, Apr. 1964, 23–24)
칠십인 정원회의 브루스 시 하펜 장로는 이렇게 강조했다. “만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어야 한다면, 거의 모든 것을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계명을 거의 지킨다면, 우리는 축복을 거의 받습니다.”(“속죄: 모두를 위한 모든 것”, 리아호나, 2004년 5월호, 9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했던 답변은 때로 다음처럼 번역되기도 한다. “네가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가?” 또는 “단시일에 네가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겠군!” 다양한 번역본을 보면, 아그립바가 바울의 논거가 설득력이 있다고 느낀 것이 암시되어 있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바울의 말을 믿는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도행전 27:9.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아그립바, 버니게, 베스도는 함께 상의하여 바울이 무죄라고 결정했으나, 그가 아직 가이사의 재판을 받지 않았기에 그를 석방할 수는 없었다. 아그립바는 베스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사도행전 26:32)
바울과 그의 동반자들은 로마 백부장의 호위를 받으며 배를 타고 로마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가 위험한 시기였다.(사도행전 27:9) “금식하는 절기”는 아마도 속죄일이라고 부르는 유대인의 성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날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절기에는 맹렬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지중해를 여행하는 것이 위험한 일로 여겨졌다. 속죄일은 보통으로 9월 하순이나 10월 초순에 있었다.
사도행전 27:10, 21~22, 31. 바울이 선견자의 은사를 행사하다
바울은 자신이 타고 있던 로마행 배에 닥칠 위험을 예견했다. 그는 항해가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며 끝날 것이고(사도행전 27:10),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으며(사도행전 27:22), 승객들이 배 안에 머문다면 모두 안전할 것임을 간파했다.(사도행전 27:31 참조) 이 성구들에는 바울이 선견자로서 일한 한 가지 예가 기록되어 있다. 몰몬경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선견자는 지난 일과 또한 장차 올 일에 대하여 알 수 있으며, 그들에 의해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인 바, … 감추인 일들이 밝혀질 것이요, … 또한 달리 알려질 수 없는 일들이 그들에 의해 알려질 것이니이다.”(모사이야서 8:17)
십이사도 정원회의 존 에이 윗소(1872~1952)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선견자는 영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호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파악한다. 따라서 그는 영원한 진리를 해석하고 명확히 밝히는 사람이다. 선견자는 과거와 현재로부터 미래를 내다본다. 그는 주님의 권능으로 이 일을 행한다. … 간단히 말해 선견자는 주님의 빛 안에서 걸으며 눈을 크게 뜨고 보는 사람이다.”(Evidences and Reconciliations, arr. G. Homer Durham [1987], 258)
사도행전 27:10~44. 선지자의 권고를 따를 때 오는 안전
바울이 임박한 위험을 경고했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무시하였다. 헨리 비 아이어링 회장은 오늘날 선지자가 주는 권고를 무시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영감받은 권고를 따르는 것을 미루거나, 나는 그 권고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마다 제 자신이 위험 속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의 권고를 듣고, 기도를 통해 그 권고를 확신하고 따랐을 때마다 저는 제가 더욱 안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길을 따라가는 동안, 저는 그 길이 저를 위해 준비되었으며, 험한 곳이 평탄해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전에 준비하신 사랑의 보살핌으로 저를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권고에서 안전한 길을 찾음”, 성도의 벗, 1997년 7월호, 25쪽)
사도행전 27:11~12. 사도들의 권고를 거절함
사도행전 27장 11~12절에서는 사람들이 때로 사도나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의 권고를 거절하는 몇 가지 이유를 보여 준다. (1) 세상의 경험 및 교육.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천막을 만드는 사람인 바울의 권고보다 더 ”믿[었던]” 것처럼(사도행전 27:11),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때로 선견자나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거절한다. 그들의 권고가 세상의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의견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2) 편리. 선원들은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사도행전 27:12), 즉 겨울철을 나기에 편리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에 항해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교회 지도자들의 권고에 순종하는 것은 때로 우리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3) 다수의 사고방식. 승객의 “더 많[은]” 수가 백부장에게 “떠나[야]” 한다고 조언했다.(사도행전 27:12)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종 한 사람이 전하는 인기 없는 말에 동의하는 것보다 다수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은 선지자의 가르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선지자는 어느 때든지 어떤 주제에 대해 말씀하거나 어떤 문제에 대해 행동을 취할 때 특별한 세속적인 훈련이나 자격증을 갖춰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어떤 주제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이 같은 주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주시는 하늘의 지식보다 우월하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선지자가 자신들과 똑같은 지상의 자격증이나 훈련을 받아야만 지상의 학문과 모순될 수도 있는 선지자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선지자는 항상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
우리가 알아야 하지만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살아 있는 선지자가 말해 줄 때,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우리의 충실함에 대한 시험이 됩니다. …
… 선지자는 세상적이든 영적이든 모든 일에 관해서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Fourteen Fundamentals in Following the Prophet,” Brigham Young University 1980 Speeches [1981], 3–4; speeches.byu.edu)
사도행전 27:14. “미항”과 “유라굴로”
바울은 배를 관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레데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미항”이라 불리는 곳에 남도록 권했으나(사도행전 27:8), 그들은 바울의 권고를 거절했다. 배가 출발한 후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는데(사도행전 27:14), 이 지중해의 격렬한 폭풍은 배에 탄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협했다. 이 일은 사람들이 사도의 권고를 거절하고 자기 방식대로 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들은 영적 안전이라는 잔잔한 바다를 떠나 영적인 생명을 위협하는 거센 폭풍 속으로 나아간 것이다.(모사이야서 8:20~21; 몰몬서 5:18 참조)
사도행전 27:20~36. 선지자가 주는 확신
바울은 선원과 승객들에게 그들이 폭풍 속에서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었다. 그의 말은 희망을 완전히 잃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다.(사도행전 27:20 참조)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에도 숱한 시련과 역경이 존재하지만, 우리도 현대의 선지자와 선견자가 전하는 말씀에서 희망과 확신을 찾을 수 있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사회의 도덕성은 계속 퇴락하고 있으며 그 도덕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종종 조롱받고 공개적으로 반박과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전쟁, 자연재해, 개인의 불운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 미래에 대해 냉소적으로 변하며, 심지어 앞으로 닥칠 일들을 두려워하게 되기 쉬울 것입니다. …
이 때가 찬 경륜의 시대에 교회의 역사에는 고난을 겪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의 중심으로 삼으면서 끝까지 굳건하며 기뻐했던 사람들의 경험들로 가득합니다. 이런 태도는 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가 견딜 수 있게 도와줍니다. 물론 그 태도가 우리의 고난을 없애 주지는 않겠지만 그 역경들에 굳건하게 맞서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
우리에게 약속된 축복들은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고난이 폭풍우처럼 몰려올지라도, 역경이 우리 머리 위에서 비처럼 쏟아질지라도 우리의 복음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올바로 걷고 계명을 지키는 한 우리를 지탱하게 하고 위로해 주며 우리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좌절시킬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십시오. 미래는 여러분의 신앙만큼 밝습니다.”(“기뻐하라”, 리아호나, 2009년 5월호, 89, 92쪽)
사도행전 28:1~5.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다
승선한 사람들은 멜리데 또는 말다라고 알려진 섬에서 구조되었다. “원주민”이란(사도행전 28:2) 잔인한 악한이 아니라 생소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을 뜻한다. 배가 난파된 후, 바울과 다른 승객들은 안전하게 상륙했다. 이후에, 바울은 바닷가에서 불을 지피다가 독사에 물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사도행전 28:3~5 참조) 이 사건으로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뱀을 집어올리며” 그들이 “해를 받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이 성취되었다.(마가복음 16:18)
사도행전 28:17~31.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다
바울은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으며 바라던 대로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로마서 1:11; 15:23~24 참조) 우리가 아는 바로는,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한 첫 번째 선교사였다. 바울은 다른 도시에서 그랬듯이 먼저 유대인에게 전파했는데, 그들 중 일부는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를 믿었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에게 오는 사람 [모두에게]”(사도행전 28:30) 관심을 돌렸는데, 아마 이방인이 다수였을 것이다. 바울은 가택 연금 중에 “옥중 서한”이라고 불리는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레몬서, 빌립보서를 썼다. 바울은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2년을 보낸 후에 재판을 받고 석방되었으며, 그 이후 로마에서 다시 투옥되기 전까지 아시아와 헬라[그리스], 그리고 아마 스페인에서 성역을 베풀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구전에 따르면, 그는 네로 황제가 박해하던 주후 64~68년 사이 어느 시기에 죽임을 당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6~8절에서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