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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20장
사도행전 16~20장 소개 및 연대
누가는 사도행전 16장부터 사도행전 끝까지 다른 사도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더 적지 않고 오로지 바울의 성역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사도행전 16~20장에는 바울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선교 여행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바울은 영의 인도를 받아, 오늘날 유럽으로 알려진 곳을 처음으로 여행하였으며,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많은 사람들을 찾았다. 그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에 교회를 세웠다. 이 장들에서는 특히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한 설교가 유명하다.(사도행전 17장 참조) 거기서 바울은 아덴에 널리 퍼져 있던 철학과 대조되는 복음 진리를 가르쳤다. 에베소에서 지역 상인들과 아데미 여신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바울의 성공적인 노력에 위협을 느껴, 도시 전체에 걸쳐 그에 대항하는 소동을 일으켰다.(사도행전 19장; 20:1 참조) 바울은 세 번째 선교 여행을 마칠 즈음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아시아를 떠나면서,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에게 임박한 위험과 배도에 대해 경고했다.(사도행전 20:29~30 참조)
사도행전 16~20장 주해
사도행전 16:1~2. 바울의 두 번째 선교 여행
바울의 두 번째 선교 여행은 사도행전 15장 36절~18장 22절에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이 선교 여행을 떠날 때 마음에 품었던 몇 가지 목적은 다음과 같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세웠던 교회 지부들을 돌보고 강화한다.(사도행전 15:36 참조) 예루살렘 회의에서 내린 결정 사항을 성도들에게 전한다.(사도행전 16:4 참조)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달할 기부금을 모으기 시작한다.(로마서 15:25~26 참조) 안디옥에서 바울은 실라를 선교 동반자로 택했으며(사도행전 15:40 참조), 그 후 두 사람은 루스드라로 갔다. 그곳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만났으며, 그는 바울과 실라의 선교 여행에 합류했다.(사도행전 16:1~3 참조) 디모데는 바울이 가장 신뢰하는 조력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사도행전 16:1~3. 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는가?
이방인 개종자들은 구원받기 위해 할례를 받거나 모세 율법에서 요구하는 다른 의식들을 준수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디모데와 함께 선교 사업을 행하기에 앞서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사도행전 16:3, 또한 사도행전 15:1, 5, 24 주해 및 사도행전 15:22~28 주해 참조) 디모데는 할례를 받은 후, 할례를 받지 않은 선교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에 대한 존중심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선교 사업을 할 수 있었다. 효과적인 선교사들은 그들이 봉사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어떤 면에서는 처신을 달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여 처신을 달리하고자 할 때라도, 선교사들은 모든 복음 원리를 순종할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다가가기 위해 상황에 따라 처신을 달리했다.(사도행전 21:20~26; 고린도전서 9:20~22 참조) 또한 그는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비록 계명에 어긋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유대인들이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는 행동이라면 자발적으로 삼가라고 가르쳤다.(로마서 14:13~15; 고린도전서 8:9~13 참조)
사도행전 16:4~10. 영이 바울을 유럽으로 인도하다
바울과 실라, 디모데는 여러 지부를 다니면서 성도들의 신앙을 강화했다.(사도행전 16:4~5 참조) 그 당시 영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금했으므로, 그들은 드로아로 갔다. 드로아는 아시아(현대 터키)의 서쪽 해안에 있는 지역이다. 그 이동 거리는 800킬로미터로, 도보로 6주 정도 걸리는 여정이었다.(사도행전 16:6~8 참조) 선교사들은 드로아에서 최초로 유럽으로 건너갔으며 현대의 그리스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성역을 시작했다.(사도행전 16:1~2 주해에 실린 지도 참조) 사도행전 16장 6~10절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음을 알 수 있다. 유럽으로 건너간 이 여행은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파 사업에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는 선교사들이 곧 자신들의 이야기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힘 있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도들도 영의 인도를 따름으로써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다. 1840년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이었던 윌포드 우드럽(1807~1898) 회장은 잉글랜드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는 중에 잉글랜드 남부로 가라는 영의 인도를 받았다. 그를 포함하여 함께 봉사하던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헤리퍼드셔, 우스터, 글로스터 지역에서 약 2천 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개종하였다. 윌포드 우드럽 회장은 자신의 생애에 있었던 이 경이로운 시기를 회상하며 이렇게 기록했다. “헤리퍼드셔 선교 사업의 전체 역사는 하나님의 고요하고 작은 음성과 성신의 계시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그곳에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들은 빛과 진리를 위해 기도했으며, 주님은 저를 그들에게 보내셨습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윌포드 우드럽[2004], 91쪽)
사도행전 16:9; 18:9. 한밤의 시현
계시의 한 형태인 영감 어린 꿈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2:12~13, 19, 22 주해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16:10. “우리”가 나오는 성구
사도행전에 나오는 우리라는 대명사는 사도행전 16장 10절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는 이 기록에 나오는 일들이 누가가 직접 목격한 것임을 시사한다. 누가는 드로아나 그 근방에서 바울 및 다른 선교사들과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누가가 어떻게 바울의 성역에 관해 많은 것을 상세히 알고 있었고, 왜 그가 바울에 대해 중점적으로 기록해 나갔는지가 설명된다. 바울과 실라가 영의 인도를 받아 드로아로 갔던 한 가지 이유는 아마 누가가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도행전 16:12~15. “자색 옷감 장사 … 루디아”
바울과 동반자들은 빌립보에서 성역을 베푸는 동안 루디아라는 이름의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는 자색 옷감으로 유명한 두아디라 출신이었다. 최상의 천연 자색 염료는 조개 껍데기에서 추출되었으며, 가공할 때 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러므로 고대에 자색은 왕족이나 숭고함과 관련이 깊었다. 루디아는 자색 옷감을 염색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였다. 그녀는 바울의 첫 번째 유럽인 개종자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바울의 두 번째 선교 여행 결과로 교회에 가입한 사람들 중 첫 번째로 이름이 언급된 사람이다. 그녀는 집과 “그 집”의 종들을 소유한 부유한 여인이었던 것 같다.(사도행전 16:12~15 참조) 후에, 믿는 사람들이 그녀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가르침을 받았다.(사도행전 16:15, 40 참조)
사도행전 16:16~18. 바울이 악령이 들린 여종을 꾸짖다
바울과 동반자들은 빌립보에 있는 동안 “점치는 귀신”이 들린 여종 한 명을 만났다.(사도행전 16:16~18 참조) 점을 친다는 것은 주술 행위를 통해 미래를 예언하거나 예언하는 척하는 행위이다. 주님의 백성들에게는 점을 치는 것이 과거에는 물론 현재에도 금지되어 있다.(신명기 18:9~14; 여호수아 13:22 참조)
여종에게 들린 악령은 바울과 그의 동반자들이 하는 신성한 사업에 대해 증언하였으나, 그들은 그 악령을 꾸짖고 여종에게서 내쫓았다. 경전에는 또한 악한 영들이 구주의 신성과 그분의 제자들에 대해 증언했음에도 그들에게 꾸짖음을 당한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다.(마가복음 8:30 주해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주님과 그분의 종들이 악한 영들의 간증을 거절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악령 들린 여종의 간증은 사실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선지자들이었으며, 그들에게 구원의 말씀과 권능이 있었다. 그러나 사탄의 종이 전하는 참된 간증은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한다. 여종은 사실상 다음처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예수를 믿어라. 그들과 그들의 주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나도 안다. 이 점에서 우리가 서로 일치하니, 너희는 나를 계속 따르면서 내 점괘의 혜택도 누려 봄이 어떠냐.’ 그곳에는 거짓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더 많은 사람이 흔쾌히 자신들을, 그리고 ‘구원하는’ 은혜에 대한 자신들의 주창을 따르도록 예수님과 그분의 교리에 대해 입에 발린 지지를 보냈다. 예수께서 자신이 쫓아낸 악마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간증하지 못하게 하신 것도 바로 앞서 설명한 그런 이유에서였다.(누가복음 4:41)”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2:149)
사도행전 16:19~26. 감옥 문이 열리다
바울과 실라가 지진으로 감옥에서 구출된 일은 사도행전에 세 번째로 등장하는 기적적인 감옥 탈출의 기사이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다루는 주제 중 하나로, 즉 사도 베드로처럼 바울도 주님의 개입으로 수혜를 입었음을 보여 준다.(사도행전 5:18~20; 12:3~11 비교) 주님께서 자신의 종들을 감옥에서 구출하신 경전 기록을 더 찾아보려면, 앨마서 14장 25~29절과 힐라맨서 5장 27~50절을 참조한다.
사도행전 16:30~34.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경전에 실린 바울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고려해 볼 때, 그가 간수에게 한 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요구되는 바가 완전히 다 설명되어 있지는 않음이 분명하다.(사도행전 16:30~31 참조) 이는 바울이 간수와 그의 가족들을 계속 가르쳤으며(사도행전 16:32 참조), 그런 후에 그들에게 침례를 주었다는 사실에서(사도행전 16:33 참조) 드러난다. 분명히, 가르침을 받고 침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였다.(또한 사도행전 2:37~38; 19:1~6; 갈라디아서 3:26~27; 로마서 10:4~13 주해 참조)
사도행전 16:35~39. 바울을 때렸다는 말을 듣고 상관들이 두려워하다
바울과 실라가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다음날 아침, 상관들은 그들을 평안히 떠나게 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과 실라가 조용히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그들이 로마 시민이었으며, 먼저 재판을 열지도 않고 때린 것은 로마법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상관들은 그 말을 듣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바울을 때리고, 가두며, 차꼬에 채운 일은 빌립보 교회에 유익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을 학대해서 곤란해진 로마 관리들이 교회 회원들을 학대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을 공산이 크다. 빌립보의 교회 지부는 초기 교회의 가장 강한 지부 중 하나로 성장했으며, 이곳은 바울이 특별히 애정을 쏟은 지부이기도 하다. (빌립보서 1:3~11; 4:1 참조)
사도행전 17:1~3. 바울이 경전에서 가르치다
바울과 그의 동반자들은 데살로니가의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과]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사도행전 17:2) 모든 복음 교사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를 세웠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 부활하셨다고 증언했다.(사도행전 17:3 참조) 증언하다[allege]의 고전적 의미는 증거를 제시하다, 단호하게 자기 주장을 하다, 또는 선언하다이다. 바울은 경전 구절을 언급하여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선언하였다. 즉, 그는 증거를 제시하였다. 메시야(그리스도)께서 고통을 겪으시고 돌아가셔야 했음에 대한 유대인 기독교도들의 이해에 대한 통찰을 얻으려면, 마가복음 8:27~32 주해 및 누가복음 24:13~35 주해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17:5~10.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박해 때문에 데살로니가를 떠났다. 그는 후에 데살로니가에 서한을 보냈으며, 그 서한들은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로 알려졌다. 이 서한들의 배경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제46장에 나오는 “데살로니가전서 소개”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17:11~12. 그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데살로니가에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서 박해를 받은 바울과 그의 동반자들은 베뢰아로 갔으며, 그곳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그곳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움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으며, 바울의 가르침이 참된지 알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 회장은 매일 경전을 공부하면 더 큰 영적 이해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매일 경전을 연구하는 사람은 하루에 상당히 많은 양을 읽고 며칠씩 쉬는 사람보다 훨씬 더 앞서게 됩니다. 매일 연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규칙적인 시간을 별도로 정해야 합니다. … 하루에 한 시간 정도로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아주 완벽히 이상적이겠습니다만, 매일 30분만 규칙적으로 시간을 낸다 해도 상당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15분은 비교적 짧은 시간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하나의 주제에 대해 매우 의미 있는 많은 지식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경전 읽기”, 성도의 벗, 1980년 3월호, 94~95쪽)
사도행전 17:15~31. 바울이 아덴에서 전파하다
그리스의 수도인 아덴[아테네]은 고대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바울이 방문했을 당시는 쇠퇴기였으나, 예전에 아덴은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 철학적 지혜, 화려한 건축물이 다른 어느 고대 도시보다도 더 많았다. 그곳 주민들은 비록 쇠퇴기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가진 눈부신 유산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바울이 방문할 당시 아덴은 일부 사람들에게 우상 숭배의 중심지로 칭해지기도 했다. 아덴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그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사도행전 17:16 참조) 많은 그리스 사람들은 (여러 신을 믿는) 다신교도였다. 아덴의 최고위층 사람들은 매일 장터에 모여서 논쟁을 경청하고, 상거래를 하며, 새로운 것을 습득했다.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가 그들에게는 새로운 것이었기에 청중은 그의 말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마침내 사람들은 바울을 그 유명한 “마르스 언덕”으로 데리고 가서 최고 사법 위원회(아레오바고) 앞에 세우고, 그가 가르치는 “새로운 가르침”을 설명하게 했다.(사도행전 17:19~21 참조) 바울은 하나님의 본질,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지는 책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설교했다. 바울은 유대인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 했던 것처럼 유대인의 역사나 성구를 열거하지 않았다.(사도행전 13:16~41 참조) 그 대신에, 그는 아덴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먼저 서로 공통된 분야를 언급하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 철학 및 여타 종교의 기본적인 믿음과 상반되는 참된 교리로 청중을 이끌어 갔다.
사도행전 17:18.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
아덴에서 바울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을 만났다.(사도행전 17:18 참조) 에피쿠로스 철학은 에피쿠로스(주전 341~270년)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것으로, 그의 철학에 따르면 세상은 아무런 목적이나 계획도 없이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신봉자들은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신들은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 않으며, 행복은 걱정과 고통 없이 적당히 쾌락을 즐기는 가운데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스토아 철학은 제논(주전 333~264년)이라는 사람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었다. 스토아 철학은 모든 것은 신성한 이유에서 창조되고 질서를 이루며 운행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사람이 이성의 불꽃을 지녔으며, 모든 것에서 하늘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정념을 극복하며, 도덕적이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사도행전 17:21. “새로운 것을 … 듣는 것”
고대 아덴 주민들처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말하기를 추구한다. 칠십인 정원회의 케빈 알 던컨 장로는 우리 시대에 수많은 자료에서 정보와 조언을 폭넓게 이용할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 문제에 대한 답을 주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신 것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세상은 수많은 자기계발 서적과 자칭 전문가와 어떤 분야이든 모든 문제에 대해 조언과 권고를 줄 수 있는 수많은 이론가, 교육자,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발달한 기술 덕분에 컴퓨터 자판을 한 번만 쳐 봐도 무수한 주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방법부터 행복을 찾는 길까지 모든 분야에서 ‘육신의 팔’[교리와 성약 1:19]에 의지하려는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 정보 중 일부는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만, 교회 회원인 우리는 순수한 진리의 근원인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분의 선지자를 통해 계시하신 말씀을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때 우리는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우리의 생존”, 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35쪽)
사도행전 17:22~25. “알지 못하는 신”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종교심이 많[다]”며 칭찬을 했는데, 이는 그 사람들이 “매우 신앙심이 깊었다”, 즉 “신성한 것들을 신중히 하였다”는 뜻이다. 다른 사료에서는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23절) 위해 세운 제단이 알 수 없는 신 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모든 신을 위한 제단으로 언급된다. 아덴 사람들은 알려지지 않은 몇몇 신을 거스르거나 경시하지 않도록 이 제단을 세운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이 제단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을 정말로 알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바울은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라고 말하고 나서, 아덴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알려진 것 중 몇 가지를 가르쳤다.(23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셨으며]”, 그분이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신다]”라고 가르쳤다.(사도행전 17:24; 또한 사도행전 7:48~50 참조)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만물을 지으신 위대한 창조주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이 지은 성전에는 거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성전에서 사람들이 드리는 경배를 받으시며, 이따금 그 거룩한 집을 방문하신다. 그리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은 그 성스러운 성전에서 그분의 영을 항상 찾을 수 있을 것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76)
사도행전 17:26. “거주의 경계”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가르쳤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뜻한다. 조셉 필딩 스미스(1876~1972) 회장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신명기 32장 7~8절에 나오는 모세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7장 26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에서도 “옛날에 주님이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이스라엘 자녀들의 수효가 이미 알려져 있었고 그들의 거주의 경계가 한정되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의 세계에서도 인간의 영이 나누어져 있었고, 이스라엘 자녀로 정해진 자들은 특별한 상속을 받기 위해 분리되어 준비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구원의 교리, 브루스 알 맥콩키 편, 제1권, 56쪽)
사도행전 17:28~29. “우리가 …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바울은 마르스 언덕에서 했던 유명한 설교에서 길리기아의 시인, 아라투스가 쓴 현상론의 내용을 이렇게 인용했다.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사도행전 17:28) 이전에 클레안테스라는 시인이 쓴 “제우스 찬가”에도 거의 똑같은 문구가 나온다. 아라투스와 클레안테스는 둘 다 스토아 철학자였다. 바울은 이 시인들의 시를 인용하면서, 청중들과 공통된 믿음의 토대를 확립하고 그들이 권위가 있다고 여기는 출처를 인용하여 그들을 설득하려고 하였다.(앨마서 18:24~32 비교)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사도행전 17장 29절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혔다. “아레오바고에서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사도행전 17:29]이라고 말했습니다. 필멸의 부모에게서 우리의 육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는 바울이 한 이 말씀의 의미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영과 몸이 곧 사람의 영혼이니라’[교리와 성약 88:1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소생은 바로 영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을 ‘영의 아버지’[히브리서 12:9]라고 했습니다.”(“인생이라는 경주”, 리아호나, 2012년 5월호, 91쪽)
“세상에 전하는 선언문”에서도 이 중요한 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모든 인간, 즉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사람은 모두 하늘 부모의 사랑하는 영의 아들과 딸이며, 따라서 각각 신성한 품성과 운명을 지니고 있다.”(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129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우리 자신을 다른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여러분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몇몇 현세적인 자질로 여러분을 특징짓거나 규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특징지어야 하는 단 하나의 자질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은 인종, 직업, 신체적 특징, 명예, 종교 등 여타 모든 특징을 초월합니다. …
우리에게는 선택의지가 있기에 우리를 규정할 특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원한 관점에서 일시적이고 사소한 특징들로 스스로를 정의하거나 나타내려고 할 때, 자신에 관해 가장 중요한 것은 경시하며 상대적으로 하찮은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되며 우리의 영원한 발전이 저해될 수 있습니다.”(“Be Wise” [devotional address given at Brigham Young University–Idaho, Nov. 7, 2006], byui.edu/presentations)
사도행전 17:32~34. 어떤 이들은 조롱하고, 다른 이들은 믿다
바울이 마르스 언덕에서 설교를 마친 후에, 몇몇 그리스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조롱했다.(사도행전 17:32 참조) 주후 1세기 동안, 그리스에서 인기 있던 철학은 사람의 영혼을 불결하게 만드는 것 중에 신체도 포함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에 따르면, 사람의 영혼은 육신에 갇혀 있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한 몸을 가지고 계신다는 가르침이 많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졌을 것이다.(고린도전서 1:23 참조) 왜냐하면 그들은 신은 순수하고 완전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했을 것이다. “왜 신이 육신이라는 한계를 다시 받아들이겠는가?” 또한, 신은 무감각하다는(신은 고통을 받거나 아픔을 느낄 수 없다는) 플라톤의 견해를 토대로 많은 그리스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몸을 입고 지상에 오셔서 아픔과 질병과 사망에 예속되고 인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사도행전 17:34. 디오누시오
디오누시오는 바울의 가르침을 믿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사도행전 17:34 참조) 그는 “아레오바고 관리”로 불렸는데, 이는 아마 그가 아레오바고, 즉 마르스 언덕에서 열리는 사법 위원회의 일원이었음을 뜻한다. 전해 오는 바에 따르면, 그는 아덴에 있는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이후에 디오누시오의 이름을 딴 교회가 언덕의 북쪽 기슭에 세워졌는데, 그 유적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사도행전 18:1~3. 천막을 만드는 사람
바울은 고린도로 갔으며, 그곳에서 생계를 위해 천막 만드는 일을 했다. 그는 자신이 돌보는 성도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여러 도시에서 일을 했을 것이다.(사도행전 20:33~34; 고린도전서 9:13~18; 고린도후서 11:9; 데살로니가후서 3:7~10 참조)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목수였고, 베드로는 어부였으며, 마태는 세리였고, 브리검 영은 목수이자 도장공 및 유리 끼우는 일을 했으며, 히버 제이 그랜트는 사업가였고, 데이비드 오 맥케이는 교사였으며, 바울과 아굴라는 천막 만드는 일을 했다. … 일은 고결하며, 참으로 사람이 지상에서 치르는 시험 중 필수적인 부분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163)
사도행전 18:6; 20:26. 바울이 옷을 털다
고린도에 있는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거절하자, 그는 옷을 털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사도행전 18:6)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라 자신이 가르친 사람들의 죄에 대해 자신의 결백을 나타내는 행동을 취했다. 몰몬경에서도 이런 행위가 언급되어 있다.(니파이후서 9:44; 야곱서 1:19; 모사이야서 2:27 참조) 바울이 “[나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라고 공표한 것은 복음을 가르칠 때 더는 유대인들이 최우선시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사도행전 18:6)
사도행전 18:12~17. 바울이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마치다
바울은 18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성역을 베풀었다.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이로써 사도행전 18장 9~10절에 기록된 주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그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 한 유대인 무리가 바울이 전파하는 것을 막으려고 로마 관원인 “아가야 총독” 갈리오에게 그의 범법 행위를 고발했다.(사도행전 18:12~17 참조) 하지만 갈리오는 그들에게 바울에 대한 그들의 고발이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며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냈다.]” 바울은 얼마 동안 고린도에서 계속 성역을 베풀었고, 그 도시를 떠남으로써 두 번째 선교 여행도 끝이 났다.
사도행전 18:23. 바울의 세 번째 선교 여행의 시작
바울의 세 번째 선교 여행은 사도행전 18장 23절~21장 15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여행 기간(3년 반에서 4년, 주후 54~58년 무렵)과 거리(5,600킬로미터 이상) 면에서 가장 긴 선교 여행이었다. 바울은 두 번의 선교 여행에서 자신이 세운 교회들을 방문했고, 이전에 방문하지 않은 지역인 에베소에서 3년을 보냈다.(사도행전 19:10; 20:31 참조) 바울의 세 번째 선교 여행에 대한 기사에서는 신학자, 전도자, 작가,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으로서 더 커져 가는 바울의 영향력과 유능함이 묘사되어 있다. 이 선교 여행 동안 바울은 고린도전서 및 고린도후서, 로마서, 그리고 아마 다른 서한들도 썼을 것이다. 두 번째 선교 여행에서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모금을 해야 할 필요성을 널리 전파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선교 여행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는 이 기부금을 모으는 데 있었다.
사도행전 19:1~6. 침례 후에 반드시 성신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사도행전 19장 1~6절에 기록된, 바울이 고린도에서 겪은 일에 대한 이해를 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침례는 [제자들이] 이를 통해 성신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필수적인 의식이었다. … 어떤 유대인 교파에서는 요한처럼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고 있었으나 그들이 따라야 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불과 성신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알리는 것을 잊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개종자들이 처음 받았던 침례는 적법하지 않은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기쁘게 침례를 받았으며, 안수를 받은 후에 약속에 따라 여러 은사를 받았고, 방언과 예언을 했다.”(“Baptism”, Times and Seasons, Sept. 1, 1842, 904에 실린 사설; 조셉 스미스는 이 정기 간행물의 편집장이었음)
사도행전 19:11~12. 손수건에 닿아서 치유됨
사도행전 19장 11~12절에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펼치신 놀라운 치유의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병자들은 바울이 지녔던 물건을 받음으로써 치유되기도 했다. (이와 유사한 치유에 대한 기사는 사도행전 5장 14~16절을 참조한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병 고침은 신앙의 힘으로 온다. 천이나 다른 물건은 바울이나 예수님 또는 다른 어떤 사람의 소유라 해도, 병을 고치는 힘과 권능이 없다. 그러나 의식과 물건을 신앙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사용할 수는 있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169)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충만했던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주었을 때 질병이 치유되었다. 우리 시대에는, 병자에게 성별된 기름을 붓는 의식이 있어 그 사람의 신앙을 북돋고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를 청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생애에서 있었던 이와 유사한 경험이 후기 성도 역사에 실려 있다. 1839년 7월 22일에 한 기적적인 치유가 있었다. 그날 선지자 조셉은 아이오와주 몬트로즈의 작은 마을 근방에서 많은 사람을 치유한 후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윌포드 우드럽 회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나룻배를 기다리는 동안, 교회 회원이 아닌 한 남자가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조셉 스미스]에게 다가왔다. 그는 생후 5개월 된 자신의 쌍둥이들이 생명이 위독하니 조셉에게 함께 가서 그 아이들을 낫게 해 줄 수 없겠냐고 청했다. 그들은 몬트로즈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았다. 이에 선지자는 그곳에 갈 수 없다고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는 아이들을 낫게 할 사람을 보내 주겠다고 말했다. 조셉은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남자와 함께 가서 그의 아이들을 치유해 주십시오.’ 그는 주머니에서 붉은 비단 손수건을 꺼내어 주면서, 내가 의식을 집행할 때 그 손수건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닦아 주면 그들이 치유될 것이라고 말했다. … 나는 그 남자와 함께 가서 선지자가 명한 대로 했으며, 그 아이들은 치유되었다.”(Wilford Woodruff, Leaves from My Journal [1881], 65)
사도행전 19:13~20.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에베소에 있는 제사장의 아들들인 거짓 교사들은 한 남자에게서 악한 영을 쫓아내려고 했다. 이에 그 악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사도행전 19:15) 그 악령 들린 사람은 거짓 교사들을 공격하여 제압했다. 이 사건은 사탄을 추종하는, 몸이 없는 영들도 신권 권세를 인식한다는 원리를 가르쳐 준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제로는 신권 권능이 없는) 거짓 성직자들이 사람들에게서 악마를 쫓아내는 참된 권능을 모방하여 마술로 악마를 쫓아내려고 했다. 이 사악한 행위는 아마 지금보다 고대에 더 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기적이나 또는 문자 그대로 악마를 쫓아내는 것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도 이른바 제사라는 사람들이 주문을 외거나 주술을 부리거나 엄한 명령으로 악한 영을 사람에게서 쫓아내고 특정 장소에서 몰아내려 하는 일은 흔하게 있었다.”(Mormon Doctrine, 2nd ed. [1966], 259)
사도행전 19:23~35.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바울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데려옴으로써 에베소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에베소 사람들의 수입은 아데미 신전을 찾는 방문객을 통해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데미[아르테미스]는 로마 여신 다이애나의 그리스식 이름이었으며, 에베소에 지어진 신전은 고대 세계의 일곱 가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혔다. 그 때문에 로마 제국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그곳으로 몰려 왔으며, 신전 방문객에게 음식, 숙소, 봉헌 제물, 기념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지역 상인들도 많이 생겨났다.
여신상을 만들어 팔던 직공들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그의 메시지에 반대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수많은 군중이 2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에베소의 연극장에 모여 두 시간 동안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쳤다.(사도행전 19:23~34 참조) 바울은 군중에게 말을 전하고 싶었으나, 교회 지도자들과 지역 관리들이 그의 안전을 염려하여 그를 만류했다.(사도행전 19:30~31 참조) 그 직후에 바울은 그 도시를 떠나 헬라[그리스]와 마게도냐를 두루 다니며 교회 회원들을 강화했다.
사도행전 20:7~12. 그 주간의 첫날
사도행전 20장 7~12절에는 바울이 다른 기독교인들과 함께 성찬 의식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그 주간의 첫날에 성찬을 취했다.(7절 참조; 또한 요한복음 20:1 참조)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을 따르고 있다. 바울이 군집한 제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있었을 때, 유두고라는 청년이 뜻하지 않게 죽었는데, 바울이 신권 권능을 행사하여 그를 다시 살려냈다. 바울은 유두고를 죽음에서 일으킴으로써 이 신권 권능을 행사했던 구주, 베드로, 엘리야, 엘리사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 속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20:17~38.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하는 고별인사
바울이 에베소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하는 고별인사는 애정과 강한 간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자신이 그들 가운데서 행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한 자신이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영으로부터 받은 확신에 대해 말했는데, 이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도행전 20장 22~26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순교 직전에 했던 다음 말을 연상시킨다. “나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가노라. 그러나 나는 여름 아침처럼 고요하도다. 나는 하나님께 대해서나 모든 사람에 대해서 양심에 아무 거리낌이 없도다.”(교리와 성약 135:4)
사도행전 20:28. 하나님의 양 떼를 보살핌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 사이에 곧 배도가 시작될 것임을 알았기에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 교회를 보살피”라고 충고했다.(사도행전 20:28) 교회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회원들을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다.(모로나이서 6:4; 앨마서 31:5)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는 것은 배도를 방지하는 가장 좋은 보호책 중 하나이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오늘날 교회 회원들이 어떻게 영적인 양식을 구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표명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단순히 복음의 새로운 몇 가지 사실을 기대하거나, 오랜 친구를 만나기 위해 교회에 오지는 않습니다. 비록 그것들 모두가 중요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들은 영적 경험을 얻으려고 옵니다. 그들은 평안을 원합니다. 그들은 굳건한 신앙과 새로운 희망을 원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으로 양육되고 하늘의 권능으로 강화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말씀을 하거나 가르치거나 지도자로 부름받은 자들은 최선을 다해 그와 같은 것들을 제공할 책임을 지닙니다.”(“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성도의 벗, 1998년 7월호, 26쪽; 또한 요한복음 21:15~17 주해 참조)
사도행전 20:29~30. 바울이 다가오는 배도에 대해 경고하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고별인사를 전하면서 배도가 도래할 것이며, 그것은 교회 밖과(“사나운 이리”) 교회 안(“여러분 중에서”)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사도행전 20:29~30) 그리스어 apostasia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에서 “배교하는 일”로 번역되었는데, “반란” 또는 “혁명”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이처럼, 교회 회원들도 교회 지도자들과 교리에 반기를 듦으로써 대배도에 한몫했다.(데살로니가후서 2:3 주해 참조) 사제술은 교회 내에서 일어난 반란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사도행전 20장 30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에서 사제술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또한 니파이후서 26:29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바울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이득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성도들에게 환심을 사고자 하는 외부인들, 즉 성도들 안에 들어와 양 떼를 아끼지 않는 이리들뿐만 아니라 불화와 분열도 목전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불화는 지도자 자리를 갈망하며, 자신의 교리를 세우고, 제자들을 교회에서 이끌어 내어 자신들에게로 오게 하는 몇몇 사람들을 통해서 야기되었다.”(The Great Apostasy [1968], 28)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은 대배도의 시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중 몇 가지는 악한 사람들이 교회에 가입하여 사도들의 권세를 탈취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윽고 하늘과 신성한 교통을 나누는 선지자와 사도들을 쫓아낸 ‘사나운 이리’와 배도한 제자들이 복음의 모든 의식을 변경했고, 계명을 어겼으며, 복음의 간결한 원리들을 세상의 철학과 뒤섞었다. 영적인 어둠이 시작되었으며, 불의한 사람들이 지휘권을 장악하여 하늘의 계시를 스스로 차단했다. 시현 및 하늘과의 교통이 끊겼으며, 영의 은사가 끝이 났다. 십이사도의 축복과 존재가 그쳤으며, 사람들은 이제 사도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Answers to Gospel Questions, 5 vols. [1957–66], 5:177)
사도행전 20: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에게 마지막 권고를 하면서, 자신의 모범을 따라 스스로를 부양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격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를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5)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소년 시절에 자신에게 이 가르침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던 초등회 교사에 대해 회상했다. 초등회 반원들은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성탄절 파티를 위해 조금씩 돈을 모은 후에 그 가르침을 받았다.
“사랑하는 선생님께서 우리 반원 중 한 아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고 발표하셨던 그 우울한 아침을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했으며 어머니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친구 빌리 데븐포트가 정말로 가엾게 느껴졌습니다.
그 일요일의 공과 내용은 사도행전 20장 35절이었습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잘 준비된 공과를 끝낸 후에 루시 거취 선생님은 빌리의 가족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당시는 대공황기로 돈이 귀했습니다. 맑은 눈을 반짝이며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이런 가르침을 어떻게 따르고 싶지요? 우리가 모은 파티 기금을 모든 반원이 함께 가지고 가서 데븐포트 가족에게 사랑의 표시로 준다면 어떨까요?’ 모두가 그 결정에 동의했습니다. 우리는 동전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세어 모두 커다란 봉투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카드를 하나 사서 우리의 이름을 다 적었습니다.
친절을 담은 이 단순한 행동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그 경험을 통해 참으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축복이란 것을 배웠습니다.”(“개인적인 영향력”, 리아호나, 2004년 5월호, 2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