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사도행전 8~12장
사도행전 8~12장 소개 및 연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사도들에게 모든 나라에 있는 백성들을 가르치고 침례를 주라고 명하셨다.(마태복음 28:19~20; 마가복음 16:15~16 참조) 그분은 또한 사도들의 성역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에 두루 퍼지며, 마침내 “땅 끝까지” 이를 것이라고 예언하셨다.(사도행전 1:8) 사도행전 8~12장에는 초기 기독교 교회가 전 세계로 확대되는 그 시작점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사도행전의 이 부분까지는 교회가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성장한 이야기를 다룬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십이사도를 돕도록 부름받은 일곱 지도자 중 한 명인 빌립이 등장한다.(사도행전 6:5) 그는 많은 사마리아인과 에디오피아인 한 사람을 가르치고 침례를 주었다.(사도행전 8:5~7, 12, 26~40 참조) 사도행전 9장에서는 사울의 개종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이후에 사도가 되어 이방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선교사가 된다. 주님께서는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에게 시현으로 이방인들을 교회에 받아들이라고 지시하셨다.(사도행전 10~11장 참조) 거세지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땅 끝까지”(사도행전 1:8)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힘차게 앞으로 전진했다.
사도행전 8~12장 주해
사도행전 8:1~4. 교회에 대한 반대와 복음의 확산
스데반이 순교한 후, 사울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교회를 박해했다.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며, 각 집에 들어가 강제로 남녀를 잡아다 감옥에 집어넣었다.(사도행전 8:3) 이러한 박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대다수가 안전을 위해 유대 외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계속 복음을 전파했고, 이로써 복음의 확산이 가속화되었다. 사도행전 전체의 주제는 하나님의 사업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전진하리라는 것이다.(사도행전 4:3~4; 12:1~2, 24 참조) 현대에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이렇게 가르쳤다. “진리의 표준이 세워졌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손은 이 사업을 정지시키지 못합니다. 박해가 심해지고 폭도들이 결탁하며, 군대가 소집되고 비난이 들끓을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는 대담하고 고귀하게 앞으로 퍼져 나아가 모든 대륙, 모든 나라에 파고들 것이며, 모든 귀 있는 자가 이 진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될 것이며, 위대하신 여호와께서 이 일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시게 될 것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 444쪽)
사도행전 8:5~8. 빌립과 아론 신권
빌립은 사도들을 도와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살피도록 택함받은 일곱 사람 중 한 명이었다.(사도행전 6:1~6 참조) 빌립은 그 책임을 수행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고, 침례를 주고, 사악한 영들을 내쫓고, 다른 기적들을 행하였다.(사도행전 8장 참조) 빌립은 아론 신권 소유자로서 성역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침례를 주는 권세는 있었으나 성신의 은사를 주는 권세는 없었다.(교리와 성약 84:107~108 참조) 빌립이 침례를 주었던 사람들은 성신의 은사를 받기 위해 멜기세덱 신권이 있는 베드로와 요한의 방문을 기다려야 했다.
사도행전 8:9~13, 18~24. 시몬이 신권 권세를 사고 싶어 하다
빌립에게서 침례를 받은 사마리아 마술사 시몬은 베드로와 요한이 신권 권세를 행사하는 것을 보고 그 권세를 돈으로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신앙개조 제5조에는 신권 권세를 돈으로 살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방법으로 받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우리는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고 그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예언에 의하여 또 권세 있는 자에 의한 안수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아야 함을 믿는다.”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합당한 권세를 가진 사람에게서 신권을 받는 것에 더하여, “개인적인 합당성은 이 거룩한 권능을 받고 행사할 수 있는 적격성의 표준이” 된다고 말했다.(“신권을 행사하기 위한 개인적인 합당성”, 리아호나, 2002년 7월호, 58쪽)
사도행전 8:14~17. 사마리아인 개종자들이 성신의 은사를 받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빌립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사마리아인 개종자들에게 안수하여 성신을 부여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조셉 비 워스린(1917~2008) 장로는 성신의 은사를 받는 요건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성신의 은사는 성신을 변함없는 동반자로 받을 수 있는 권리이며,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회개, 침수에 의한 침례, 멜기세덱 신권을 부여받은 권능을 가진 종들에 의한 안수를 통해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교회의 합당한 회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은사입니다.”(“말로 다 할 수 없는 은사”, 리아호나, 2003년 5월호, 26쪽; 또한 교리와 성약 20:38, 41 참조)
사도행전 8:27. “에디오피아 사람”
빌립은 천사가 지시한 대로 예루살렘 남쪽으로 여행하다가 에디오피아 사람을 만나 그에게 침례를 주었다.(사도행전 8:26~39 참조) 오늘날의 아프리카에 있는 에디오피아는 유대 지방에 속하지 않았기에, 이 개종은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전파되리라는 사도행전 1장 8절에 기록된 예언을 부분적으로 성취하였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곧 시작되려는 극적인 선교 사업의 전조가 되었다.(사도행전 10장부터 계속됨)
사도행전 8:29~38.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빌립은 영의 속삭임에 따라 이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역을 통해 그가 이사야 기록에서 읽었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가르쳤다. 사도행전 8장 32~33절에 인용된 성구는 이사야 53장 7~8절에 나온다. 빌립의 영감받은 가르침으로 그 남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하며 침례를 받고 싶다고 간청했다. 이에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베풀”었다.(사도행전 8:38) 이 남자는 침수로써 침례를 받았는데, 이처럼 침례 의식은 이 후기에 교회에서 행해지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절정의 시대에도 행해졌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우리 모두 에디오피아 사람처럼 복음의 영감받은 가르침이 필요하고 모두가 더 훌륭한 복음 교사가 되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고[교리와 성약 20:59],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모범을 따름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분명히 인간이 존재하는 가장 높고 거룩한 목적입니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설득하며 그들이 구속의 길을 걸어가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끄는 일은, 틀림없이 삶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데이비드 오 멕케이 회장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책임은 없습니다.’[Conference Report, Oct. 1916, 57] 사실상 우리는 빌립이 파송되어 만났던 에디오피아 사람과 어느 정도 같습니다. 그 사람처럼 우리도 종교와 접촉하는 법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전을 열심히 읽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보물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가르침 없이는 이 모든 것의 의미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필요 조건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이 사람처럼 우리도 ‘지도해 주는 [교사가] 없으니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외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성도의 벗, 1998년 7월호, 25쪽)
사도행전 9:1.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사울은 길리기아에 있는 그리스의 도시인 다소에서 태어났다.(사도행전 21:39 참조)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였으며(사도행전 16:37 참조), “히브리 말”(아람어로 추정)과 헬라 말[그리스어]을 구사했다.(사도행전 21:37~40 참조) 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유대인으로(로마서 11:1 참조), 독실한 바리새인이었으며(사도행전 23:6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뒤쫓고 핍박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사도행전 9:1~2 참조) 그는 후에 자신의 라틴어 이름인 바울로 알려졌다.
일찍이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바울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했다. “[사도 바울]은 약 1.5미터의 키에 머리카락은 매우 검고, 얼굴과 피부는 검은빛이며, 커다란 매부리코에 각진 얼굴, 작고 검은 눈은 영원까지 꿰뚫는 듯 날카로웠으며, 어깨는 둥글었고, 목소리는 우는 듯했는데 큰 소리로 말할 때는 거의 포효하는 사자처럼 들렸다. 그는 뛰어난 연설가였다.”(“Extracts from William Clayton’s Private Book,” p. 4, Journals of L. John Nuttall, 1857–1904, L. Tom Perry Special Collections, Brigham Young University; copy in Church History Library) 사도 바울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제35장에 나오는 “로마서 소개”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9:2~6. 조셉 스미스의 첫번째 시현과의 유사점
부유한 도시인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40킬로미터 떨어진, 번창하는 지역의 중심지에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가 그 도시에 확립되었다면, 주변 지역으로 더 쉽게 퍼져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사울은 기독교의 발전을 저지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보내졌지만, 도리어 그곳으로 가는 길에 놀라운 시현을 받게 된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겪었던 경험과 조셉 스미스의 첫번째 시현 간에는 몇 가지 유사점이 있다. 사울과 조셉 스미스는 둘 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보았다. 둘 다 땅에 엎드러졌으며, 둘 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둘 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고, 그분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둘 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신성한 가르침을 받았다. 둘 다 후에 자신이 시현을 보았음을 말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시현을 본 것을 계속 주장했다.(사도행전 9:2~6; 26:19~21; 조셉 스미스—역사 1:14~19, 24~25 참조) 사도행전에 실린 바울의 시현에 관한 세 번의 기사는 사소한 차이점을 보인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조셉 스미스가 자신의 첫번째 시현에 관해 쓴 기록도 조금씩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 차이점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사도행전 26:19~21, 24~25 주해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9:4~6. 사울의 개종은 특별하다
사울의 개종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시현은 극적이었으며 즉각적인 결과가 일어났다.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 개종 과정은 그다지 극적이지는 않지만 극적인 개종에 못지않은 의미를 띤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디 토드 크리스토퍼슨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분은 ‘왜 내게는 이 놀라운 변화가 더 빨리 일어나지 않을까?’라고 자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베냐민 왕의 백성들이나 앨마, 그 외 경전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의 예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변화가 점진적으로 서서히 일어날 것입니다. 육체적인 탄생과는 달리 거듭남은 한순간에 발생하는 사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련의 과정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거듭남”,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78쪽)
사도행전 9:5.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고생이니라”[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5절, 개정개역판 한글 성경 사도행전 26장 14절에 나옴—옮긴이]
“가시채”는 가축을 앞으로 몰기 위해 가축을 찌를 때 사용하는 날카로운 창이나 막대기를 말한다. 고집이 센 가축은 앞으로 가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뒷발로 발길질을 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가시채를” 뒷발질할 뿐인 것이다. 그러한 반항은 주인이 더 고통스러운 자극을 가하도록 자초하여 가축에게 괴로움만 더하게 된다. 구주께서는 사울이 계속해서 당신께 맞서 싸운다면 스스로에게 고통만 안겨 줄 것임을 명확하게 말씀하신 셈이다. 그리스어 문헌에서 “가시채를 뒷발질하다”라는 말은 널리 알려진 비유로, 신에게 대항하는 것을 뜻했다.
데이비드 오 맥케이(1873~1970) 회장은 사울이 시현을 보기 전, 즉 다메섹으로 향하던 길에 그의 마음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지를 다음과 같이 추측했다. “평상시보다 덜 바빴던 그 며칠 동안, [사울]은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죽어가는 스데반의 빛나던 얼굴과 그 순교자의 마지막 기도가 그 이전보다 더 깊숙이 그의 영혼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자기가 잡아들인 부모들을 보며 울부짖는 어린아이들의 외침이 그의 영혼을 더 날카롭게 찌르기 시작했고, 앞으로 그와 같은 일을 다메섹에서도 더 많이 겪을 것을 생각하니 비참할 만큼 불행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정말로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왜 이렇게 불안하고 괴로운 것인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곧 악마의 일만이 그런 감정을 낳고, 주님에 대한 진실한 봉사는 항상 평안과 만족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Ancient Apostles, 2nd ed. [1921], 148)
사도행전 9:6~8.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시나이까”[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6절에 나옴—옮긴이]
에즈라 태프트 벤슨(1899~1994) 회장은 사울이 주님께 드렸던 질문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사람도 삶에서 바울이 했던 다음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할 수는 없습니다. ‘…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시나이까?’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동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과정을 추구하고, 그 답을 이행하는 것입니다.”(“Listen to a Prophet’s Voice,” Jan. 1973, 57)
사도행전 9:9, 18. 사울이 사흘 동안 보지 못하다
사울이 시현을 보고 나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우기에 앞서 그가 영적으로 맹목 상태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이제 그는 과거를 잊고 미래를 바라보면서, 인도를 얻기 위해 주님과 그분의 지상 성역을 믿어야 했다. 사울은 아나니아의 손으로 축복을 받은 후에 육체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모두 새로운 시력을 얻게 되었다. (사도행전 9:9, 17~18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사울의 개종과 앨마 이세의 개종을 비교하면서, 사울이 앞을 보지 못했던 사흘 동안 그에게 일어나기 시작한 놀라운 변화를 이렇게 강조했다. “앨마는 이틀 밤 이틀 낮 동안 가수면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그 기간에 그는 놀라운 영적인 나타내심을 받고 새롭게 태어나며, 거듭나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모사이야서 27:22~31) 그와 마찬가지로 사울도 앞을 보지 못했던 사흘 동안 완전히 탈바꿈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로 기독교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다. 겸손하게 아나니아의 가르침에 순종할 준비가 되는 동안, 사울의 영혼은 고뇌의 늪에 빠졌으며, 양심의 가책이 지핀 불길에 휩싸였고, 자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였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90)
사도행전 9:10~15. “이 사람은 … 택한 나의 그릇이라”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있는 교회의 지도자였을 것이며, 사울이 체포할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찾으라고 명하셨을 때 그가 처음에는 그렇게 하기를 꺼려 했다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나니아는 주님께 순종했으며, 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사울이 신앙과 용서를 얻도록 인도했다.(사도행전 9:10~15 참조)
어떤 사람들은 왜 주님께서 사울처럼 교회의 대적자에게 나타나시고 그 후 그 사람을 자신의 성역에 동참하도록 부르시는지 의문을 품는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러한 의문은 주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계획이 전세까지 모두 망라한다는 점을 이해하면 해결된다고 설명했다. “사울은 예임되었다. 그가 지상에서 했던 일은 그 어느 것도 나중에 그가 하게 될 일과 부름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세에서 양성하고 얻은 타고난 영적 자질이 있었기에, 그는 다가올 성역에 준비되어 있었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91)
사울이 성역에 나서도록 부름받은 것에 관해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구주께서는 열성과 힘 있는 선교사를 택하실 때, 당신을 옹호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찾으신 것이 아니라 대적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찾으셨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있었던 일은 사울을 변화시켰습니다. 그에 대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15]’ 박해자 사울은 전도자 바울이 되었습니다.”(“오늘 택하라”, 리아호나, 2004년 11월호, 69쪽)
사도행전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 고난을 받아야”
주님께서는 사울이 위대한 사업을 위해 택함을 받았다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사도행전 9:16) 사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역자로서 겪었던 고난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사도행전 14:5~6, 19, 사도행전 22:6~8, 14; 16:22~24; 21:30~33; 고린도후서 11:23~27을 참조한다.
사도행전 9:23~26.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울의 여정
갈라디아서를 보면, 사울이 개종한 후에 다메섹을 떠나 아라비아로 갔음을 알 수 있다.(갈라디아서 1:17 참조) 사울이 그곳에 간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그는 연구하고 상고하기 위해(아마 사도행전 9장 22절과 23절에 기록된 사건 사이에) 그곳에 갔거나 안전을 위해 피신하였을 수도 있다.(사도행전 9:23~25 참조) 그는 삼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라비아에서 체류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구약전서에 나오는 그 많은 예언을 성취하셨는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아라비아에서 시간을 보낸 후 다메섹으로 돌아와 잠시 머물다가, 베드로와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났다.(갈라디아서 1:17~18; 사도행전 9:26~27 참조) 바울의 삶과 성역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다음 표를 참조한다.
바울의 삶과 성역에서 있었던 사건들 연대표 | ||
---|---|---|
주후 1~3년 무렵. |
베냐민 지파이며, 바리새인이자 로마 시민권자로 다소에서 태어남 | |
주후 19~29년 무렵. |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받음 | |
주후 33년 |
스데반의 순교를 목격했으며 예루살렘 지역에서 기독교를 박해함 | |
주후 33년 |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개종했으며,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함 | |
주후 33~35년 |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피신함 | |
주후 35년 |
다메섹으로 돌아왔으며 잠시 복음을 전파함 | |
주후 35년 |
삼 년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베드로와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와 이야기함 | |
주후 35~49년 |
(바나바와 함께 선교 사업을 했던 지역의 일부였던) 수리아—길리기아에서 14년을 보냄 바울의 고향인 다소는 길리기아에 있었음 | |
주후 46~49년 |
첫 번째 선교 여행(바나바가 동반함) | |
주후 49년 |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함 | |
주후 49~53년 |
두 번째 선교 여행 | |
주후 53년 |
예루살렘을 방문함 | |
주후 54~58년 무렵 |
세 번째 및 마지막 선교 여행 | |
주후 58년 무렵 |
마지막으로 그리스[헬라]를 방문함, 예루살렘으로 가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금을 전달함 | |
주후 58년 봄 |
예루살렘의 감리 형제들에게 보고함, 성전에서 오해가 있었음, 체포당함 | |
주후 58~60년 봄 |
가이사랴에서 투옥됨 | |
주후 60년 가을~주후 61년 봄 |
구금 중에 로마로 항해함 난파를 당해 시칠리아 바로 남쪽 멜리데(말다) 섬에서 겨울철을 보냄 | |
주후 61~63년 무렵 |
로마에서 가택 연금됨 | |
주후 63~66년 |
로마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 성역을 베푸는 것이 가능했음 | |
로마에서 두 번째로 투옥됨 | ||
주후 68년 무렵 |
사망 |
이 표는 Thomas A. Wayment, From Persecutor to Apostle (2006), viii–ix 및 Richard Lloyd Anderson, Understanding Paul (1983), 393–97을 바탕으로 제작됨.
사도행전 9:26~31; 11:22~30. 바나바와 사울이 함께 성역을 베풀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은 사울이 자신들과 함께하겠다고 했을 때 당연히 경계하였으나(사도행전 9:26 참조),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가서 사도들을 만나게 하며 그가 믿을 만한 사람임을 보증했다.(사도행전 9:26~28 참조) 바나바는 레위 지파에 속한 유대인으로(사도행전 4:36 참조), 기록상 그가 교회를 위해 행한 첫 번째 봉사는 모든 것을 통용한다는 성도들의 합의에 따라 자신의 소유를 판 것이었다.(사도행전 4:36~37 참조) 그는 그리스어를 구사했다.(Bible Dictionary, “Lycaonia” 참조)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사도행전 11:24) 예루살렘의 교회 지도자들은 그를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으로 보내 성역을 베풀게 했는데,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복음으로 개종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개종은 스데반이 죽은 후에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던 교회 회원들이 안디옥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사도행전 11:19~22 참조)
사도행전에는 서로 다른 두 곳의 안디옥이 나오는데, 수리아의 안디옥과 비시디아의 안디옥이 있음에 유의한다. 두 곳의 안디옥은 모두 오늘날의 터키 지역에 해당한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해 다소로 피신하였기에,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안디옥에서 다소로 여행하였으며, 두 사람은 안디옥으로 돌아와 복음을 가르쳤다. 그들은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에게서 기부금을 받아 기근으로 고통받고 있는 유대의 교회 회원들에게 보내는 임무를 맡았다.(사도행전 11:22~30 참조) 후에 바나바는 사울이 첫 번째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그의 동반자가 되었다.(사도행전 13~14장 참조)
사도행전 9:32~43. 애니아와 다비다의 치유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에서 성역을 베푸는 동안 애니아와 (도르가로도 불리는) 다비다를 치유해 준 것은 구주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을(요한복음 14:12) 분명히 증명해 주었다. 베드로가 애니아를 치유해 준 일은(사도행전 9:32~35 참조) 구주께서 중풍병자를 낫게 해 주신 일과 유사하다.(마가복음 2:1~12; 누가복음 5:18~26 참조) 마찬가지로, 다비다를 죽음에서 일으킨 일은(사도행전 9:36~42 참조) 구주께서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일과 유사하다.(마가복음 5:35~43; 누가복음 8:49~56 참조) 누가가 이런 유사한 사건들을 기록한 것은 그의 목적 중 하나를 반영한 결과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연관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권세가 베드로에게로 이어졌음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사도행전 9:36.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다비다
다비다가 베푼 “선행과 구제”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을 지어 준 일도 포함된 것 같다.(사도행전 9:39 참조)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후기에 상호부조회 회원들이 자주 하는, 애정 어린 봉사의 전형을 보여 주는 여성으로 다비다(도르가)를 이렇게 언급했다. “다비다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여인이라고 묘사한 이 경전 구절은 상호부조회의 기본적인 책임 중 몇 가지, 즉 고통받는 자를 구제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고, 그것이 내포하는 모든 것을 행하는 책임을 정의하고 있습니다.”(“그대 모범이 되라”, 리아호나, 2002년 1월호, 99쪽)
사도행전 10:1~8. 천사가 고넬료에게 지시하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사는 로마 백부장이었다. 그는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하며, 관대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한 천사가 고넬료에게 나타나, 욥바에 사람을 보내서 그곳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찾으라고 지시하였다. 이 시현은 결국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여러 사건 중 첫 번째 사건이 되었는데, 이때까지는 교회에 가입하는 것이 유대인에게만 허용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도행전 10:9~33. 이방인에게 복음을 소개하도록 택함받은 베드로
고넬료가 보낸 사자가 욥바로 가는 중에, 베드로는 한 시현을 보았다. 시현에서 그는 모세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금지한 동물을 잡아먹으라는 명을 받았다.(레위기 11장 참조) 그 동물들은 이방인을 상징했다. 베드로가 거절하자, 주님께서 이렇게 답하셨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사도행전 10:15) 베드로는 처음에는 그 시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방인들이 먼저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고도 침례를 받아 교회에 들어올 때가 도래했음을 곧바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방인 개종자에 관한 이 계시가 베드로에게 주어진 것은 그가 당시에 선임 사도였고, 교회 전체에 대한 신권 열쇠를 소유했기 때문이었다.(마태복음 16:18~19 참조) 교회 전체에 대한 계시는 항상 합당한 권세를 지닌 사람을 통해 주어진다.(교리와 성약 28:2, 6~7; 43:1~7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엘 톰 페리 장로는 교회를 위한 계시를 받는 질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그분의 뜻을 인류에게 계시하는 방법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간구하여 우리의 청지기 직분의 영역 안에서 그분의 영을 통해 영감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감독은 지명받은 회중을 위해, 제일회장단은 교회 전체를 위해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청지기 직분에 필요한 계시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어떤 회원이나 어떤 사람이 자신보다 높은 권세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시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위배됩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년], 197쪽]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계시는 [제일]회장단을 통하여 옵니다. 이것이 하늘의 질서[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 197쪽]”(“우리는 하나님이 이제까지 계시하신 모든 것을 믿는다”, 리아호나, 2003년 11월호, 86쪽)
사도행전 10:17~34, 44~48. 계시는 보통 한 번에 조금씩 주어진다
깨끗하지 않은 동물에 대한 베드로의 시현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계시가 흔히 조금씩 또는 점차적으로 주어진다는 원리를 보여 준다.(사도행전 10:17~34, 44~48 참조) 이 사례에서, 베드로는 처음에 시현을 보았을 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17절 참조) 그 의미를 숙고하고 신앙으로 행했을 때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그는 이방인들이 이제는 유대교로 개종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교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의미를 서서히 이해하게 되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데이비드 에이 베드나 장로는 그렇게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계시를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에 비유했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그 빛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에 말씀을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니파이후서 28:30) 가르침을 받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대부분 계시는 시간이 가면서 우리의 열망과 합당성과 준비에 따라 조금씩 더해지는 방식으로 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받는 그러한 계시는 점차로, 그리고 부드럽게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같이 [우리의] 영혼을 적[십니다].’(교리와 성약 121:45) 이러한 방식으로 계시를 받는 것이 더 일반적인 일입니다.”(“계시의 영”, 리아호나, 2011년 5월호, 88쪽)
사도행전 10:30~33. 고넬료가 베드로를 통해 기도의 응답을 받다
주님께서는 자주 다른 사람들의 봉사를 통해 기도에 응답하시는데, 고넬료도 그런 경우였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나흘 동안 금식하고 기도했다.(사도행전 10:30 참조) 천사는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사도행전 10:6 참조)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 때 오는 기쁨을 이렇게 묘사했다. “저는 우리의 책임을 수행하면서 조용하게 들려 오는 영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지체 없이 그 속삭임에 따라 행동을 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축복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속삭임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주님이 여러분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큼 달콤한 경험이나 소중한 느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잠잠하라, 고요하라”, 리아호나, 2002년 11월호, 55쪽)
사도행전 10:34.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경전에서는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고 가르친다.(사도행전 10:34) 그 말은 아담부터 지상의 마지막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일 기회를 얻게 된다는 뜻이다. 구원의 원리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니파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그에게로 나아와 그의 선하심에 참여하도록 권하시며, 또 그는 그에게로 나아오는 자는 검거나 희거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도 거절하지 아니하시며, … 모두 다 하나님께는 동일하니라.”(니파이후서 26:33)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복음은 주로 유대인들에게만 전해졌다. 베드로를 통해 온 새로운 계시와 이해력은 혈통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와 유사한 방식은 1978년에도 일어났는데, 제일회장단은 “교회의 모든 합당한 남성 회원은 인종이나 피부색에 관계없이”(공식 선언—2) 신권과 성전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계시를 받았다. 베드로가 받았던 계시처럼, 이 계시에서도 복음은 항상 주님이 계획하신 시간표에 따라 전파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1978년 계시가 전 세계에 발표되고 난 직후,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복음은 우선순위에 기초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따라 한 나라에 이어 또 다른 나라로 전파된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상에 사는 사람들을 대해오신 역사를 통틀어 볼 때, 그런 일은 과거에도 있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은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지역에만 한정해서 제한적으로 전파되었다. 예를 들어, 모세의 시대와 그리스도의 시대 사이에 복음은 거의 대부분 이스라엘의 자손에게만 전파되었다. 예수님 시대에 합당한 권능을 지닌 사람들과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에게서 이스라엘의 자손에게만 복음을 전파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그것이 완전히 뇌리에 박혀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들에게 온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처음에 이방인 국가로는 가지 않았다. 예수께서도 성역을 베푸실 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전파하셨고, 사도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다. (마태복음 10:6)
일부 이방인들이 보여 준 신앙과 헌신 때문에 그분이 몇 가지 사소한 예외를 두신 것은 사실이다. 자녀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먹겠다던 여인에게 주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마태복음 15:28; 또한 마가복음 7:27~28 참조) 몇 가지 소소한 예외는 있지만, 그 당시 복음은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전파되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에 깨끗하지 않은 고기가 담긴 시현과 계시를 주셨으며, 그 후에 고넬료가 자신과 자신의 이방인 친척 및 친구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자 베드로에게 사자를 보냈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이방인들에게도 전파해야 한다고 명하셨고, 그 명령은 이행되었다.[사도행전 10:1~35, 44~48 참조] 신약 시대가 약 사반세기 정도 지난 시점에, 성도들은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들은 복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만 전파해야 하는지,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전파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고심하며 평가했다.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의 후손과 대등하게 그분에게 나아올 수 있을까? …
여러분은 다음 원리를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라.]’(사도행전 17:26~27) 이 말은 다른 국가와 백성과 민족과 문화에 복음의 구원하는 진리가 전해지는 예정된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
우리는 말씀에 말씀을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진리와 빛을 얻는다.[이사야 28:9~10; 니파이후서 28:30; 교리와 성약 98:11~12; 128:21 참조] 이제 우리에게는 이 주제에 관한 새로운 지식과 빛이 홍수처럼 더해졌으며, 그것은 과거의 모든 어둠과 견해와 생각을 지워 낸다. 그런 것들은 이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겸손한 간구와 신앙이 있었기에, 그리고 때가 되고 시간이 이르렀기에, [모든 합당한 남성에게 신권을 부여하라는 계시가 주어진] 이때에 주님은 당신의 섭리에 따라 지금까지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놀랍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에게 성신을 부어 주셨다.”(“The New Revelation on Priesthood,” Priesthood [1981], 130–34)
사도행전 10:38. 구주께서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다
베드로는 자신이 받은 시현의 의미를 이해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명에 대한 지식을 모든 사람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증언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고 가르쳤다.(사도행전 10:38)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칭호는 문자 그대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베드로는 구주께서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다고 말했다. 이 몇 마디 말에는 구주께서 사셨던 삶의 중요한 부분이 요약되어 있으며, 또한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그분이 하셨듯이 봉사하라는 권유도 담겨 있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신권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원리들을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예수님은 봉사의 대명사이셨습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사도행전 10:38] 형제 여러분, 우리들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기회가 많으나, 그중 일부는 그냥 없어지거나 덧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누군가가 여러분이 주신 권고와, 여러분이 보여 주신 모범과, 여러분이 가르치신 진리와, 선을 행하라고 격려하는 가운데 끼친 여러분의 영향력을 기억해 줄 때 여러분은 얼마나 큰 희열을 느끼십니까?”(“안전하지 못함”, 성도의 벗, 1998년 7월호, 48쪽)
사도행전 10:44~48. 성신의 권능과 성신의 은사 간의 차이점
사도행전 10장 44~48절에는 고넬료와 다른 사람들이 침례받기 전에 성신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나온다.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에 나오는 Bible Dictionary[성경 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성신은 성신의 권능과 성신의 은사 둘 다를 통해 지상의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침례 전에 성신의 권능이 사람에게 임하여 복음이 참됨을 증언할 수 있다. 사람은 성신의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업 및 지상에서 그분의 종들이 하는 일에 대해 간증을 얻는다. 사도행전 8장 12~25절과 모로나이서 2장에 언급되었듯이, 성신의 은사는 오직 합당하고 권세 있는 자에게 침례를 받은 후에만 받게 되며, 이것은 안수례로 부여된다. 성신의 은사는 합당할 때 언제든지 성신을 동반할 수 있는 권리이다.”(Bible Dictionary, “Holy Ghost”)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비유로 말하자면, 침례 전에 얻는 간증은 폭풍이 몰아치는 어두운 밤에 한순간 번쩍하며 비치는 번개처럼 온다. … 침례 후에 누리는 성신의 동반은 한낮에 계속 빛나는 햇살처럼, 인생의 길과 그 길을 둘러싼 모든 것 위에 그 빛을 비춘다.”(A New Witness for the Articles of Faith [1985], 262)
사도행전 11:1~18. 고넬료의 침례
고넬료의 침례는 초기 교회에서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 침례받고 교회에 가입한 첫 번째 사례였다. 이 일은 복음 전파 사업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다. 교회의 많은 회원에게 이방인 개종자들이 먼저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은 채 교회에 가입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복음을 나누는 방법 면에서 큰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성약을 맺으실 때(할례 의식을 의미함) 그것을 “영원한” 성약이라고 부르셨다.(창세기 17:7) 초기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의 성약과 할례 의식 간에 차이가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성약은 영원하지만, 성약을 맺는 의식은 이제 할례가 아니라 침례가 되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들려주자, 교회 회원들의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사도행전 11:18)
사도행전 11:22~30. 안디옥에서 교회의 성장
사도행전 9:26~31; 11:22~30 주해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11:26.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초기 성도들
사도행전 11장 26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안디옥에 있는 비기독교인들이 교회 회원을 지칭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했다. 결국 교회 회원들은 이 말을 자신들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이고 사용했다.(사도행전 26:28; 베드로전서 4:16 참조)
이 시기는 초기 교회와 그 근원이 되는 유대교가 방식 면에서 점점 더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되었음을 증명한다. 이런 간격은 교회가 이방인들 사이에서 선교 사업을 하기 시작하고, 유대인 회원들과 이방인 회원들이 서로 친교를 맺으며, 교회 지도자들이 회원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면서 생겨났다.(사도행전 15장 참조)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사용은 교회가 스스로 유대교와 구분 짓는 방법의 하나가 되었다.
사도행전 12:1~2. 헤롯이 죽인 야고보는 누구인가?
야고보는 사랑받던 자 요한의 형제이며, 최초의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이었다. 야고보는 주후 44년경에 헤롯 아그립바 일세에게 순교를 당할 때까지 베드로 및 요한과 함께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했다.(사도행전 12:1~2 참조) 그를 신약전서에 나오는 다른 두 명의 야고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 두 명은 다음과 같다. (1) 알패오와 마리아의 아들인 야고보.(마가복음 16:1; 사도행전 1:13 참조) 그는 작은 야고보로도 알려졌는데, 그 역시 최초의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이었다. (2) 예수님의 이부형제인 야고보. 그는 다른 형제들처럼 구주께서 살아 계신 동안에는 그분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요한복음 7:1~7 참조) 예수님의 이부형제인 야고보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사도행전 15:13~29 주해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12:1~19. 야고보는 살해되었으나 베드로는 구조되다
야고보는 헤롯의 명으로 살해되었으나,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구출되었다. 왜 주님께서 둘 다 구하지 않으셨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은 알지 못한다.(이사야 55:8~9 참조)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충실하다면 주님의 목적이 우리 삶에서 성취되리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우리가 영원한 세상에서 모든 축복을 받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사도행전 12:12. 마가라 하는 요한은 누구였는가?
마가라 하는 요한은 흔히 마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아마도 마가복음의 저자일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초기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성 중 한 명인 마리아의 아들이었다. 믿는 자들은 그녀의 집에서 모였으며,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난 후 돌아온 곳도 그곳이었다.(사도행전 12:12~17 참조) 마가라 하는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의 동반자로 선택되어, 그들과 함께 첫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났다.(사도행전 12:25; 13:5 참조) 마가라 하는 요한에 더 알아보려면, 제11장에 나오는 “마가복음 소개”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12:21~23. 헤롯 아그립바 일세의 죽음
헤롯 아그립바 일세는 헤롯 대왕의 손자였다. 그는 일반적으로 바리새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이는 그가 유대인의 관습을 주의 깊게 지켰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야고보를 처형하라고 명했을 것이다.(사도행전 12:1~2 참조) 아그립바는 야고보가 순교한 해인 주후 44년에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누가는 아그립바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주님의 천사가 집행한 하나님의 징벌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