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제13장: 마가복음 8~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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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10장

마가복음 8~10장 소개 및 연대

8~10장은 마가복음의 전환점에 해당한다. 지금까지는 구주께서 성역을 베푸실 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바리새인들은 그분을 신성 모독자라고 했고, 서기관들은 그분이 악마의 권능을 지녔다고 비난했으며, 거라사에 사는 지방 사람들은 그분을 두려워하며 그 지역에서 떠나 달라고 요청했다.(마가복음 2:7; 3:22; 5:15~17 참조)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이 그분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선생이나 기적을 행하시는 분으로 여기기는 했지만(마가복음 1:40; 5:23, 28; 6:56 참조), 그분과 가장 가까웠던 이들도 그분을 아는 데는 더디었다.(마가복음 1:22; 4:41; 6:2, 51~52 참조)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이런 혼동은 그들이 “영적 소경”임을 나타낸다. 마가복음에는 구주의 가르침을 받던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 일이 종종 나온다. 8~10장에 기록된 사건과 가르침은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결국에는 인간의 영적 원수를 이기실 메시야로 알아보게 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마가복음 8~10장에는 구주께서 세 차례에 걸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임박한 고통과 죽음, 부활에 대해 가르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마가복음 8:31~33; 9:30~32; 10:32~34 참조) 구주는 예언을 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그들의 역할에 대한 가르침을 조금 더 주시면서 그들의 “이해력”을 밝혀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에 겸손과 고통, 죽음이 수반되듯이, 제자의 사명에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위해 목숨을 잃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 수반된다.(마가복음 8:34~38; 9:32~37, 43~48; 10:35~4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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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연대표

마가복음 8~10장 주해

마가복음 8:1~9. 구주께서 사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신 일은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것을 예시하는 전조였다(또한 마태복음 15:29~38 참조)

마가복음 7장 31절에 따르면, 구주께서 사천 명의 사람을 먹이신 사건은 갈릴리 바다의 남동 해안 중 하나인, 이방인들이 주로 사는 데가볼리 지방에서 일어났다. 이 지방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생겨난 시기는 적어도 구주께서 귀신 군대가 들어 있던 사람에게서 그들을 쫓아내어 치유하신 이후부터였을 것이다.(마가복음 5:19~20; 마태복음 4:25 참조) 그리고 믿는 이들의 수는 “큰 무리”를 이룰 정도로 늘어났다.(마가복음 8:1)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이방인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은 복음이 세상의 모든 나라로 전파되는 축복을 예시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사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신 이 기적은 앞서 벳새다 근처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단순히 반복하거나 되풀이한 것이 아니다. 전에 주님께서는 자신의 혈족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계셨지만, 지금은 상당수가 이방인으로 추정되는 데가볼리 주민들을 가르치고 계신다. 또한, 그때 주님은 생명의 떡이라는 으뜸되는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기초를 놓으셨고, 지금은 앞으로 이방 나라에 살아 있는 떡이 제공될 것임을 예시하고 계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사는 이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무리는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가르침을 더 잘 받아들였으며, 그분 안에 있는 창조적 힘을 사용하여 수천 명을 먹이신, 비할 데 없이 놀라운 기적을 좀 더 건전하고 올바른 시각으로 판단했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1:375)

마가복음 8:4~6.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목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제자들은 더 적은 규모의 군중을 보게 된 상황에서 구주께 이렇게 여쭈었다.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마가복음 8:4) 왜 그들은 이전에 목격했음에도 그런 질문을 했겠는가? 생각해 볼 만한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제자들은 이전에 기적을 목격했지만, 신앙은 여전히 다소 약했다. 이번에 구주께서는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고 마음이 우둔하다며 제자들을 꾸짖으셨다.(마가복음 8:17~21 참조)

어쩌면 제자들은 구주께서 이방인에게 그러한 기적을 행하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가 말했듯이 그들은 “그 기적을 다시 행하도록 제안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나 특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예수 그리스도, 363쪽)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구주께서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하나님께 감사를 표할 때 어떻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구주께서]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구주께서 그들이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셨음을 주목하십시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마태복음 15:32~38 참조; 기울임체 추가; 또한 마가복음 8:1~8 참조] …

잠시 멈추어 서서 받은 축복을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에게는 지금 처한 상황에 관계없이 감사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은 천국을 맛보는 일입니다.”(“감사라는 성스러운 선물”, 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87~88, 90쪽)

마가복음 8~10장. 이 교재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주해

구주의 성역 중 마가복음 8~10장에 나오는 구주의 성역에서 있었던 가르침과 사건들 다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온다. 이런 가르침과 사건에 대한 주해를 이 학생 교재의 어느 부분에서 찾을 수 있는지 다음 도표에서 확인한다.

마가복음에서의 주제의 위치

이 교재에 나오는 주해

마가복음 8:10~12.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하다.

마태복음 16:1~4

마가복음 8:14~21.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태복음 16:6~12

마가복음 8:27~30.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태복음 16:13~19

마가복음 8:31. “인자”

마태복음 8:20; 9:6; 10:23; 11:19; 12:8, 32, 40

마가복음 9:1~13.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변형되셨다.

마태복음 17:1~13, 마태복음 17:2, 마태복음 17:3, 마태복음 17:3~5, 마태복음 17:3~9(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신권 열쇠를 받음); 마태복음 17:3~9(변형의 산에서 일어난 일)

마가복음 10:13~16. 어린아이들을 용납하라

마태복음 19:13~15

마가복음 10:2~12. 결혼과 이혼에 관한 가르침

마태복음 19:1~12마태복음 19:9

마가복음 10:17~31. 부자 청년

마태복음 19:16~22

마가복음 8:22~25. 맹인을 점차적으로 치유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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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을 고치시는 그리스도

맹인을 고치시는 그리스도, 월터 레인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 기적에서 배울 수 있는 진리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기적은 독특한 것으로, 예수님이 사람을 단계적으로 치유하신 내용이 기록된 유일한 사례이다. 주님께서는 이 과정에 따라 약한 사람을 강화하시면서 맹인의 신앙을 키워 주셨을 것이다. 예수님과 한 잇따른 신체 접촉은 맹인에게 희망과 확신, 신앙을 더해 주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친히 (1) 그 맹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으며, (2) 자신의 침을 맹인의 눈에 바르셨고, (3) 안수 의식을 행하셨으며, (4) 다시금 그 사람의 눈에 안수하셨다.

이 치유의 방식은 기껏해야 부분적인 치유만 받을 수 있는 정도의 힘과 신앙이라 하더라도 주님께 치유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부분적인 치유를 받은 후에, “그들은 완전히 치유될 수 있다는 더 큰 확신과 신앙을 얻을 수도 있다. 또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 때 사람의 영적인 질병은 점진적으로 치유되기도 한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379–80)

마가복음 8:27~3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선임 사도인 베드로가 특히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간증한 지(마가복음 8:29) 얼마 되지 않아 구주께 항변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일 것이다. 이 사건을 이해할 실마리는 마가복음 8장 29절에 기록된 베드로의 간증과 마가복음 8장 32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항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주목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8장 31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님은 인자가 고통을 겪고 죽임을 당하리라고 예언하셨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적국을 정복하는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기에, 당시의 많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메시야가 고통을 겪고 죽게 되리라는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즉 고통을 겪고 죽으신 메시야를 전파하는 것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다고 기록했다.(고린도전서 1:23) 오늘날 우리가 구주의 속죄에 관한 예언으로 분명히 인식되는 구약전서의 많은 성구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는 그처럼 분명하게 이해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예언에는 “메시야”라는 언급이 없으며, 그 예언에서 묘사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한 이런 예언과 그 밖의 예언들은 그분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와 그 외 제자들만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누가복음 24:13~27, 36~47; 베드로전서 2:21~25 참조)

마가복음 8:30.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하고 명하셨는가?

공관복음, 그중에서도 특히 마가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 기적이나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말하지 말도록 명하신 경우가 여러 번 나온다.(마가복음 1:34, 44; 5:43; 7:36; 8:26, 30 참조) 경전에는 구주께서 어떤 일들을 비밀로 해 달라거나, 아니면 침묵해 달라고 요청하셨던 몇 가지 이유가 다음과 같이 암시되어 있다.

  1. 마가는 예수님의 명성이 너무 자자해서 곤란한 일들이 생겼다고 말한다. 때로 예수님은 몇몇 마을에 들어가실 수 없었고, 그분을 뵈려는 사람들은 군중에 길이 막혀 그분에게로 갈 수가 없었다. 제자들은 인파에 시달리며 끼니를 때울 틈이나 그럴 장소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마가복음 1:45; 2:2; 3:20 참조) 구주께서 자신이 행한 기적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은 그런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주의함으로써 자신의 궁극적인 사명에 방해를 받지 않으시려는 한 가지 방편이었을 것이다.

  2. 구주께서는 적절한 때가 되기도 전에 적대감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이 생기는 것을 미리 방지하려고 침묵을 요청하셨을 것이다.(마가복음 9:30~31 참조; 요한복음 7: 1~10마태복음 26:18 비교)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알려질수록 대제사장들은 더더욱 그분을 반대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사회적 권위가 약해질까를 염려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분명하고도 공개적으로 알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으나 일주일도 되지 않아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셨다.(마가복음 11:8~11; 14:1~2; 15:22~25; 니파이후서 10:5 참조)

  3. 구주께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치는 귀신들에게도 잠잠하라고 명하셨다.(마가복음 1:24, 34; 3:11~12 참조; 사도행전 16:16~18 비교)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예수께서는 “[귀신이] 자신의 신성을 증거하는 것을 줄곧 허용하지 않으셨다. 개심을 일으키는 간증은 하나님에게서 오며, 루시퍼에게서 오지 않는다. 예수께서 악한 영들을 꾸짖지 않으셨다면,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한 간증을 묵인하셨다면(비록 그 간증이 사실일지라도), 유대인들은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라고 말하며 그분을 거짓 고소하는 일에 더 큰 정당성을 부여했을 것이다. (요한복음 10:20)”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168)

  4. 구주께서는 메시야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적들을 몰아내고 유대인의 왕으로서 백성을 다스려 주기를 바라는 유대인들의 기대를 아셨다. 예수께서는 대중이 기대하는 그런 메시야로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알리지 말라고 명하신 한 가지 이유는 이것일 것이다.(마태복음 16:20; 마가복음 8:29~30 참조) 그분은 자신이 어떤 종류의 구원을 주려고 왔는지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분은 로마제국을 멸망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영원한 원수인 사망과 죄와 고통을 정복하려고 오셨다.

마가복음 8:31~33; 9:30~32; 10:32~34. 구주의 고통, 사망, 부활에 대한 세 차례의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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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고다

골고다, 스캇 엠 스노우.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마가복음 8:31)

마가복음 8~10장에는 구주의 고통과 사망, 부활에 대한 세 차례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또한 마태복음 16:21~23; 17:22~23; 20:17~19; 누가복음 9:22, 44~45; 18:31~34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속죄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비전은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일은 곧 ‘사람에게 불멸과 영생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습니다.(모세서 1:39)”(“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성도의 벗,1998년 7월호, 75쪽)

마가복음 8:33. 구주께서는 왜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셨는가? (또한 마태복음 16:23 참조)

베드로는 다가오는 구주의 죽음만을 신경 썼기 때문에 구주의 진정한 사명이 온 인류를 구속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구주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그를 “사탄”으로 언급하신 것은(마가복음 8:33) 베드로가 루시퍼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사탄이라는 히브리어는 “대적 또는 유혹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순간 베드로가 대적의 역할을 하며 인류를 구원하려는 구주의 궁극적 사명에 반대한 것이라고 판단하셨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통과 죽임을 당해야 할 것이라는 가르침에 반대한 것은 선의에서 한 일이었을 것이다.(마태복음 16:22; 마가복음 8:32 참조) 하지만 예수님이 베드로의 소원에 부응하여 속죄의 고통을 피하셨다면, 인류가 죄에서 구속받고 죽음을 극복하여 부활하게 되는 결실을 맺지 못했을 것이다. 온 인류는 멸망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고(앨마서 34:9 참조), “사람에게 불멸과 영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일은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모세서 1:39) 이 모든 것은 사탄의 파괴적인 목적에 기여하는 일이다. 베드로는 충동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면서, 순간 자기도 모르게 대적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전세에서 사탄이 했던 모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을 자신의 소원에 맞게 변경시키려는 시도였다.(교리와 성약 29:36~39; 모세서 4:1~4; 아브라함서 3:27~28 참조) 이 점을 고려해 보면, 구주의 꾸짖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의 소원에 맞게 변경할 수 없음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화합되게 하고, 악마[의] 뜻에 화합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니파이후서 10:24)

마가복음 8:34~38. 구주를 따르기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잃음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마가복음 8:34 참조)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았기에 구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부터 제자들은 마음이 괴로웠을 것이다.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에서 사형 집행에 흔히 사용되는 수단이었으며,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자신이 달릴 십자가의 가로대를 처형장까지 직접 운반해야 했다.(요한복음 19:16~17 참조) 구주께서는 십자가형의 이미지를 사용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그들이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모범을 따라 삶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라고 요청하셨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는 이 내용에 더하여 우리가 날마다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스스로 모든 경건치 아니한 것과 모든 세상 정욕을 부인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것이니라.”(Joseph Smith Translation, Matthew 16:26)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베드로나 바울, 선지자 조셉 스미스 등이 순교했던 것처럼 우리도 글자 그대로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 봉사하는 삶을 삶으로써 그런 의지를 나타내 보일 수는 있다.(Joseph Smith Translation, Mark 8:37–38 참조)

에즈라 태프트 벤슨(1899~1994) 회장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구주께서 가르치셨듯이 “목숨을 잃[는]” 몇 가지 방법을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잃는 기회는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어머니는 자녀의 필요 사항을 돌보아야 하고, 아버지는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시간을 내 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합당한 가정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세속적인 즐거움을 버려야 하며, 자녀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보살펴야 합니다. 가정 복음 및 방문 교육도 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로해 주고, 교회 부름을 부지런히 이행하고, 지역 사회 및 공익 봉사를 하여 우리의 자유를 수호하며, 십일조와 금식 헌금을 내고, 선교사와 복지와 건축 및 성전 공사도 지원해야 합니다. 참으로 희생의 날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지금은 희생의 날”, 성도의 벗, 1979년 10월호, 52쪽)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에는 구주를 위해 목숨을 잃는 것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좀 더 잘 이해하게 해 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또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나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버릴 것이요, 나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버리지 않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라.”(Joseph Smith Translation, Mark 8:37; 마가복음 8:35 비교)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은 구주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이들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의탁한 사람은 그들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많은 일을 생전에 이룰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큰 기쁨을 맛보게 되며, 시야를 넓게 가질 수 있고, 두뇌 회전이 빨라지고, 힘을 얻게 되며, 영혼을 고양시키고, 축복이 배가되며, 기회가 늘어나고, 영혼을 위로하고, 친구를 얻게 되고, 화평을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됩니다.”(“예수 그리스도—우리의 은사와 유산”, 성도의 벗, 1977년 4월호, 25쪽)

마가복음 8:38. 구주를 따르는 것을 선택할 때 일어날 결과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에는 구주를 “부끄러워하”는 사람과 그분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에게 일어날 결과에 관한 구주의 가르침이 더 자세하게 나온다.

“[구주를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이 올 때 자신들의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리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올 것임이니라. 나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는 그와 함께 올 것이요, 구름 가운데서, 인자의 우편에 서서 그분의 영광을 입을 것이니라.”(Joseph Smith Translation, Mark 8:42–43; 마가복음 8:38 비교)

마가복음 9:4. 일라이어스

조셉 스미스 역에는 침례 요한도 변형의 산에 나타났다고 명시되어 있다.(조셉 스미스 역 성경, 마가복음 9:3[경전 안내서] 참조) 침례 요한이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나타난 것은 후기에 아론 신권을 회복하러 올 그의 역할을 나타내는 전조였다. 경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많은 일들이 변형의 산에서 일어났다.(베드로후서 1:16~19; 교리와 성약 63:21 참조) “일라이어스”라는 용어를 더 잘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17:3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9:17~29.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믿는 이들에게는 아무리 그 믿음이 작을지라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신약전서에서 구주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울부짖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인용했다.(마가복음 9:24) 홀런드 장로는 이 이야기에서 배우는 세 가지 교훈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점은, 신앙의 시련을 맞았을 때 그 아버지는 먼저 자신의 힘을 단언한 후에 한계를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그가 처음 했던 ‘내가 믿나이다’라는 선언은 확정적이었으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더 큰 신앙을 소망하시는 모든 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이 사람을 기억하십시오! 두려움이나 의심, 고난의 시기가 오면, 먼저 여러분에게 이미 있는 신앙을 붙드십시오. 그 신앙이 비록 작고 부족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인 이 필멸의 시간에서, 그 아이가 겪은 고통이나 그 부모에게 닥친 고초, 절망에 버금가는 영적인 시련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 순간이 찾아오고 시련이 닥칠 때,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즉시 주어지지 않을 때,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굳게 붙들고 더 많은 지식이 주어질 때까지 굳건하게 견디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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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아들을 안고 있는 남자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월터 레인(마가복음 9:17)

두 번째로 알 수 있는 점은 첫 번째 사항을 약간 변경한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고 의심이 들 때, 신앙을 탐구해 나가는 여정을 자신의 신앙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말하면서 ‘불신’부터 시작하지는 마십시오. … 저는 여러분에게 없는 신앙을 있는 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여러분에게 있는 신앙에 진실하라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의심이 있음을 정직하게 선언하는 것이 신앙이 있음을 선언하는 것보다 더 높은 도덕적 용기의 표현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경전 속 일화가 주는 분명한 메시지를 기억합시다. 여러분이 느끼는 의문에 솔직하십시오. 삶에는 이런저런 의문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가족들이 치유받기 원한다면, 신앙이 기적을 이루려 할 때 의심이 그 길을 가로막지 않게 하십시오. …

마지막 사항입니다. 의심이나 고난이 올 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두려워 마십시오. 이 일화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겸손하고 정직하게 바란다면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경전에는 그런 정직한 소망과 바람을 ‘마음의 뜻을 다하고, 하나님 앞에서 위선이나 거짓을 행함이 없이’ 추구하는 ‘진정한 의도’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니파이후서 31:13] 그렇게 끈질기고 간절하게 탄원할 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휘장 양편에서 도움을 줄 이들을 보내실 것이며 우리의 믿음은 강화될 것임을 간증드립니다.”(“내가 믿나이다”, 리아호나, 2013년 5월호, 93~94쪽)

마가복음 9:18, 28~29. 영적 힘을 키우는 기도와 금식(또한 마태복음 17:19~21 참조)

귀 먹고 말 못하는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구주께서는 마가복음 9장 28~29절에 기록되어 있듯이(또한 마태복음 17:19~21 참조) 그 기회를 활용해 제자들에게 금식과 기도의 힘을 가르치셨다 신앙에 충실함 책자에는 그 경험이 우리 각자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 기록은 기도와 금식이 신권의 축복을 주는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기록은 또한 복음대로 생활하려는 개인적인 노력에 적용될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극복하려고 애썼던 약점이나 죄가 있을 경우, 여러분은 필요한 도움이나 용서를 받기 위해 금식과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쫓아내신 것처럼, 여러분의 어려움도 기도와 금식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신앙에 충실함: 복음 참고서[2004], 43쪽) 금식 기도가 약점과 부족한 신앙을 극복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더 알고 싶다면, 마태복음 4:2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9:33~37; 10:35~45. 봉사와 지도력에 대한 구주의 가르침(또한 마태복음 18:1~5; 20:20~28; 누가복음 22:24~26 참조)

마가복음 9장 33~37절마가복음 10장 35~45절에 기록된 일화는 사도들이 하나님 왕국의 지도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각 일화에서 구주께서는 그들의 부름이 영광과 명예를 얻는 일이 아니라 겸손히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일임을 참을성 있게 가르치셨다.

마가복음 10장 35~45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 나아가 질문을 하나 여쭈었다. 그들은 영원한 왕국에서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명예로운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구주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면서, 자신이 견뎌야 할 모든 일을 그들이 견딜 수 있겠냐고 물으시고는 그런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결정하실 일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런 후 예수님은 십이사도들을 자기 주위로 모아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이방인의 지도자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시켰다. 하나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사람은 모든 이를 섬기는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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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하기

스펜서 제이 콘디 장로는 칠십인의 일원으로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지도력은 곧 봉사라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솔로몬이 40년간 통치한 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왕이 되기 위해 세겜으로 갔습니다. 그는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할지 장로들의 조언을 구했으며, 그들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열왕기상 12:7, 기울임체 추가) 구주께서도 제자들에게 그와 같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가복음 9:35) 하나님의 왕국에서 이끈다는 것은 곧 봉사한다는 것입니다.”(“지도자의 자질에 관한 경전의 가르침”, 성도의 벗, 1990년 7월호, 32~33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회장은 주님의 교회 지도자들이 “어디에서 봉사하느냐보다 어떻게 봉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람은 교회 직책으로 승영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충실함을 통해 승영에 이릅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직책에 연연하고 종보다 주인이 되려고 힘쓰며 봉사하는 사람의 영과 그 일은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때때로 종과 주인에 관한 혼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가복음 9:34~35, 기울임체 추가]”(“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성도의 벗, 1996년 7월호, 16쪽)

마가복음 9:36~37. 구주께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신 약속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에는 구주께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이 상세하게 나온다. 이 추가된 부분에는 구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 아이 하나와 같이 겸손하며 나를 받아들이는 자는 나의 이름으로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는 자는 나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 곧 아버지도 받아들이는 것이니라.”(Joseph Smith Translation, Mark 9:34–35)

마가복음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또한 누가복음 9:49~50 참조)

구주께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라고 하신 말씀을(마가복음 9:4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라는 말씀과(마태복음 12:30)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두 말씀은 그 맥락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해야 이해할 수 있다. 마태복음 12장에 기록된 상황에서 바리새인들은 구주께서 귀신의 능력으로 악령을 쫓아냈다고 말했다. 구주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악령을 내쫒았으며 바리새인들은 자신에 관하여 중립적 입장을 취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셨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태복음 12:30; 마태복음 12:30 주해 참조)

마가복음 9장 38~40절에는 다른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서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분명한 어떤 사람이 악령을 쫓아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그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염려를 나타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마가복음 9:38)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요한이 염려를 나타낸 몇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그 사람은 우리 제자들과 같이 다니고, 먹고, 잠자고, 선생님과 함께 계속 친교를 나누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가복음에는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한다고 나온다.[누가복음 9:49; 기울임체 추가] 즉, 그 사람은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이 하신 대답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왕국의 회원이었으며, 신권 권세와 신앙의 힘으로 적법하게 성역을 베푸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요한은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어서 그에게 권세가 없다고 잘못 추정했거나, 악령을 쫓아낼 힘은 제한적으로 십이사도만 받았을 뿐 모든 충실한 신권 소유자들까지 받은 것은 아니라고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악령을 쫓아낸 사람은 칠십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누가복음 10:1, 17 참조]”(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417)

마가복음 9장 40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요한과 십이사도들은 구주의 대답을 듣고서, 그 사람이 십이사도는 아니지만 권세를 받은 제자임을 알고 안심했다.

마가복음 9:42~48.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마가복음 9장 42~48절에서 “범죄하게 [한다](offend)”라는 말은 그리스어 skandalizō에서 유래하며, “길에 장애물 또는 방해물을 놓다, 죄를 짓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구주께서는 죄를 범하게 하는 우리의 손, 발, 또는 형제가 있으면 그것을 잘라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데 방해가 되는 관계나 영향력은 아무리 소중할지라도 우리 삶에서 제거해야 함을 가르치셨다. 칠십인 회장단의 월터 에프 곤잘레스 장로는 우리 삶에서 무가치한 영향력을 “찍어버”린다는 것의 의미를 가르치며 조셉 스미스 역에 나오는 이 구절을 인용했다.

“[구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네 손이 너로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혹 만일 네 형제가 너로 범죄하게 하고 고백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면 그를 끊어 버리라.’(조셉 스미스 역 성경, 마가복음 9:40[경전 안내서]; 기울임체 추가)

다행스럽게도, 구주께서는 친히 우리의 손을 찍어버리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해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일의 [역경에] 대비할 수 없게 만드는 영향들을 오늘 우리의 생활에서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만일 제게 나쁜 영향을 주는 친구가 있다면, 여기 분명한 충고가 있습니다. ‘이는 네가 네 형제 없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와 네 형제가 지옥에 던져[지는] … 것보다 나음이니.’(조셉 스미스 역 성경, 마가복음 9:41[경전 안내서]; 기울임체 추가) 주님께서는 니파이에게 위험한 영향력이 되어버린 그의 형제들을 떠나라고 경고하실 때 같은 원리를 적용하셨습니다.(니파이후서 5:5 참조)

그처럼 끊어 버린다는 것은 친구뿐만 아니라 부적절한 텔레비전 쇼, 인터넷 사이트, 영화, 문학, 게임 또는 음악과 같은 모든 악한 영향에 해당됩니다. 우리의 영혼에 이 같은 원리를 새기게 되면 어떤 종류의 나쁜 영향력에도 굴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오늘이 바로 그때입니다”,리아호나, 2007년 11월호, 54~55쪽) 이 가르침을 좀 더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5:29~30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9: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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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 제임스 티솟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마가복음 10:32)

마가복음 9장 43~48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구주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왕국에 들어가려면, 삶에서 (손, 발, 눈으로 상징된) 적절하지 않은 측면들을 기꺼이 희생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마가복음 9장 49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어서 구주께서는 사람을 온전히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로마서 12:1 비교)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소금과 불을 사용하여 제물을 바쳤다. 소금은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성약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었으며(레위기 2:13 참조), 불은 종종 영적 보존, 정결, 시련,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헌신 등을 상징했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마가복음 9장 49절에서 가르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모든 교회 회원은 ‘죽음에 이르기까지’(교리와 성약 98:14) 성약에 따라 생활할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모든 것에서 시험과 시련을 받게 될 것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421)

마가복음 10:38~39.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잔을 마신다”라는 문구는 “‘내 운명에 따라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적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내가 받는 침례를 받으라”라는 문구는 “내가 가는 길을 따르고, 박해를 겪고,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며, 결국 진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566) 구주께서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물으심으로써 (마가복음 10:38) 야고보와 요한에게 영광과 명예를 받기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다시 주의를 집중하라고 하셨다.

마가복음 10:45.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가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은(마가복음 10:45)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및 부활의 의미와 목적과 관련하여 복음서에서 가장 분명하게 언급된 내용 중 하나이다. 고난과 죽음, 부활 이 세 가지는 그분이 온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치르신 대가였다. “대속물[ransom]”은 그리스어 lutron에서 번역된 것으로, 다른 사람이 속박이나 감금에서 풀려 나도록 치러 주는 금액을 의미한다. 구약전서 시대에는 속박된 사람을 풀어 주기 위해 그 사람의 친척이 대가를 치러야 했다.(레위기 25:48~49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장자로서 온 인류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데 요구되는 대속물을 치르셨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 따르면, 대속물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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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빵과 물

마가복음 10장 45절에 나오는 “많은 사람의[for many]”라는 문구는 그리스어 anti pollōn에서 유래했으며,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란 뜻이다. 수많은 사람이 구속받게 되리라는 것은 그들의 구속을 위해 단 한 명이 값을 치르게 되리라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이사야 53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이사야 53:6, 11; 기울임체 추가)

마가복음 10:46~52. 바디매오의 치유

바디매오라고 하는 맹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은 장면에서 우리는 그 맹인의 신앙과 끈기를 알 수 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꾸짖음을 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부르짖었다.(마가복음 10:47~48 참조) 스펜서 더블유 킴볼(1895~1985) 회장은 바디매오가 “주님께 다가가려는 끈질기고도 성실한 노력한 끝에 시력을 얻었다.”라고 말했다.(“President Kimball Speaks Out on Administration to the Sick,” New Era, Oct. 1981,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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