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학생
제20장: 누가복음 23~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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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24장

누가복음 23~24장 소개 및 연대

누가복음 23~24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그 후에 일어난 추가 사건들을 상세히 공부하게 된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구주를 고발했고, 빌라도와 헤롯은 그분을 심문했으며, 그 뒤에 다시 빌라도가 그분을 심문하고 십자가형을 선고했다. 누가의 기록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짓 고발을 당해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겪으시는 동안에도 자제심과 동정심, 사랑과 용서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누가는 구주께서 부활하신 후의 모습을 보이신 일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증명하는 가장 분명하고도 상세한 증거를 복음서에 포함시켰다. 구주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와 베드로에게, 그리고 열 한 명의 사도 및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친히 나타나셨다. 구주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일은 특히 더 중요성을 띠는데, 이는 자신이 살아났음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을 만지도록 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자들은 구주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라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제20장 연대표

누가복음 23~24장 주해

누가복음 23:1~5.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누가복음 23장 2절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세 가지 죄목이 나온다. 백성을 “미혹함” 또는 분열을 일으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도록 로마 시민들을 가르침, 로마에 필적할 왕국의 왕이라고 주장함. 이 죄목들은 반역 행위로 간주되며, 그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론, 이 거짓 고발에 대해 죄가 없으셨다. 반역죄에 관하여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마태복음 27:11 주해마가복음 15:1~2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23:4~12.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발에 대응하신 방법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느낀 빌라도는 그분에 대한 고발을 기각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누가복음 23:4)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임을 알고서 그분을 헤롯 안디바에게 보냈다. 당시 헤롯은 갈릴리를 정치적으로 관할할 권리가 있었으며, 유월절을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헤롯은 일종의 기적을 보려는 마음에 예수님을 몹시 만나 보고 싶어 했다. 헤롯 안디바는 베들레헴에 있는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던 헤롯 대왕의 아들이다.(마태복음 2:16 참조) 헤롯 안디바는 자신의 형제인 빌립의 아내와 간통하여 결혼했다. 이 결혼 소식을 들은 침례 요한이 그 결혼은 불법이라고 말하자(마가복음 6:18 참조), 헤롯은 침례 요한을 사형에 처했다. 예수님은 일찍이 헤롯을 “저 여우”라고 칭하셨는데(누가복음 13:31~32), 우리는 이 표현으로 헤롯의 기만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대제사장들이 함께 모의하다

대제사장들이 함께 모의하다, 제임스 티솟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구주와 헤롯 사이에 있었던 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헤롯이 예수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발악하듯 소리 질렀으나 주님은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 우리가 아는 한 헤롯은 예수와 대면해서 얘기를 한 사람 중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한 유일한 자로 알려졌다. … 여우 헤롯에게는 그를 경멸하며 또한 왕다운 침묵을 지키셨다. 철저히 감정이 상한 헤롯은 모욕적인 심문을 그만두고 악의에 찬 조소를 하였다. 그와 그의 군대는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예수를 놀림감으로 삼아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그 후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다.]’[누가복음 23:11] 헤롯은 예수를 정죄할 아무것도 찾지 못하였다.”(예수 그리스도, 636~637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하거나 박해할 때 어떻게 구주의 모범을 따를 수 있는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생각을 나누었다.

비디오 아이콘“우리가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구주께서 하셨던 것처럼 대응한다면, 우리는 좀 더 그리스도처럼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을 따르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은 미리 원고를 준비하거나 어떤 정해진 공식에 따라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주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다르게 대응하셨습니다. 사악한 헤롯왕과 대면하셨을 때 그분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빌라도 앞에 서셨을 때는 자신의 신성과 목적에 대해 간단하고도 강력하게 간증하셨습니다. 성전을 더럽히고 있던 돈 바꾸는 사람들을 대하실 때는 성스러운 것을 보전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분의 신성한 책임을 행사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며(누가복음 23:34) 비할 데 없이 자비롭게 대응하셨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침묵, 온유함, 용서, 그리고 겸손하게 간증을 나누는 것과 같은 대응이 수동적이거나 나약하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무례하게 우리를 이용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신앙과 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다운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마태복음 5:44 참조)”(“그리스도인의 용기: 제자로서의 대가”, 리아호나, 2008년 11월호, 72쪽)

그리스도와 빌라도

그리스도와 빌라도, 마커스 에이 빈센트

누가복음 23:13~26.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 두 번째로 서시다

오직 누가만이 예수께서 헤롯 안디바 앞에 서신 것과 빌라도가 헤롯을 두 번째 증인으로 언급하며 다시금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하려 했음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내가 …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누가복음 23:14~15) 누가의 기록은 예수께서 두 번, 즉 헤롯에게 보내지기 전과 후에 빌라도 앞에 서셨음을 가장 분명하게 알려 준다. 누가는 또한 빌라도가 그곳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세 번씩이나 왜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원하는지 물었고, 그런 후에 마침내 대중의 압력에 굴하여 바라바를 석방하였다고 기록했다.(누가복음 23:1~26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것과 바라바의 석방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27:15~21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23:27~31.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 위하여 울라”

빌라도가 예수께 사형을 선고한 후, 그분이 끌려가실 때 슬픔에 빠진 많은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누가는 특히 이 무리의 구성원들이 여성이라고 언급했다. 이들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충실한 여인들이라고 수차례 칭한 무리 중 하나였다. 그들 중 적어도 몇몇은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따라왔다.(누가복음 23:49, 55 참조) 제임스 이 탈매지 장로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이라고 부르신(누가복음 23:28~31 참조), 이 여인들에게 하신 경고는 주후 70년에 일어날 예루살렘의 파괴를 언급하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왕을 거부한 후에 닥칠 임박한 대학살에 대한 주님의 마지막 증언이었다. 비록 모든 유대 여인의 생애에서 어머니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나, 그곳에서 울고 있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살아서 보게 될 무서운 광경에 비추어 보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축복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가 없으면 울어 주어야 할 대상이 더 적어지며, 적어도 굶주림이나 폭력으로 자녀가 죽는 것을 보는 소름 끼치는 무서움을 덜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예수 그리스도, 653~654쪽)

누가복음 23:31.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

누가복음 23장 31절에 기록된 “푸른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성역을 베푸신 시기를 나타낸다. 구주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께서 유대인 가운데 계시는 동안에도 유대인의 압제자들이 그러한 사악한 행동을 했다면(누가복음 23:28~30 참조) 당신께서 떠나신 후에는, 즉 “마른 나무”로 상징되는 때에는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더 사악한 짓을 하게 되겠느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셉 스미스 역에는 이 성구에 한 문장이 더 추가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구주께서 돌아가신 후에 일어날 멸망이 설명되어 있다.

누가복음 23:33~56. 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대한 누가의 기록에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공통점이 많이 있다. 다음 도표는 이런 공통점에 대한 주해를 학생 교재의 어느 부분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알려 준다.

누가복음에서 각 주제가 나오는 위치

이 교재에 나오는 주해

누가복음 23:33. 예수 그리스도가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마태복음 27:33마태복음 27:35~50

누가복음 23:35~39.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마태복음 27:40~43

누가복음 23:43.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동안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9:25~27요한복음 19:28~29

누가복음 23:45.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마태복음 27:51

누가복음 23:50~56.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다른 사람들이 구주의 시신을 안치하였다.

마태복음 27:57~60

누가복음 23:33.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

Calvariae(갈보리)는 “해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다른 복음서 저자들은 처형 장소를 골고다(Golgotha)라고 불렀는데, 이는 히브리어 gulgoleth와 아람어 gulgutha에서 온 말로, 모두 “해골”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조셉 스미스 역에는, 구주께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임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그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병사를 뜻하심이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더라.”(조셉 스미스 역, 누가복음 23:35[경전 안내서]) 누가는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분이 고통의 막바지에 이르러 목이 마르다고 소리치실 때 그분을 조롱하고 식초(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기록했다.(누가복음 23:36; 요한복음 19:28~30 참조)

제일회장단의 헨리 비 아이어링 회장은 우리 역시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우리를 화나게 한 자들을 용서하고 악의를 품지 말아야 합니다. 구주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러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들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하나가 되기 위하여”, 성도의 벗, 1998년 7월호, 68쪽)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에 관해 선지자들이 하신 말씀을 더 알고자 한다면, 마태복음 18:21~22 주해마태복음 18:33 주해를 참조한다.

로마 군인들

로마 군인들을 용서하신 예수님, 폴 만

누가복음 23:34.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또한 마태복음 27:35 참조)

십자가 옆에서 군인들이 한 이 행위는 시편에 나오는 예언을 성취한 것이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편 22:18) 군인들은 구주의 겉옷을 나누어 가지고 그분의 “속옷” 즉, 로브는 제비를 뽑기로 하였다.(마태복음 27:35; 누가복음 23:34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예언의 성취를 보는 일은 정말로 놀랍다. 천 년 전에 다윗은 성신의 권능으로 이방인 군인들이 이 두려운 상황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를 아주 상세하게 예언했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친구나 적으로부터 어떤 도움 혹은 지시를 받지 않고서도 그런 행동을 취했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1:820–21)

누가복음 23:42~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신앙에 충실함에는 낙원이라는 말이 경전에서 일반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며, 특히 누가복음 23장 43절에서는 그 용어가 어떻게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지가 설명되어 있다.

“경전에서 낙원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사용된다. 첫째, 그것은 침례를 받고 충실하게 산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사후에 있을 영의 세계의 평화롭고 행복한 장소를 가리킨다.(앨마서 40:12; 모로나이서 10:34 참조) 영옥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죄를 회개할 기회와, 성전에서 우리가 하는 사업을 통해 침례와 확인 의식을 받을 기회를 갖게 된다.(교리와 성약 138:30~35 참조) 그렇게 할 때, 그들은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낙원이라는 말의 두 번째 사용은 구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때에 관한 누가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누가복음 23:42) 누가복음 23장 43절에 따르면, 주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설명에 따르면] … 주님은 강도에게 그분과 함께 영의 세계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History of the Church, 5:424–25 참조]”(신앙에 충실함: 복음 참고서[2004], 50~51쪽)

강도의 말은 그가 몇몇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얼마간의 지식과 그분을 믿는 신앙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우리가 이 강도에 대해 아는 바는 이것이 거의 전부이다.

지역 칠십인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알랭 에이 페이티용 장로는 구주께서 강도에게 하신 이 말씀은 그를 안심시키는 말로 보인다고 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구주께서는 친절하게 대답하시며 그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 범죄자는 복음이 영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전해진다거나 또는 하나님을 좇아 생활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베드로전서 4:6; 교리와 성약 138:18~34 참조) 참으로 구주께서는 자신 옆에 매달린 행악자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 대해 크나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십자가에서”, 리아호나, 2003년 6월호, 20쪽)

십자가에 못 박히심

십자가에 못 박히심, 해리 앤더슨

누가복음 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또한 마태복음 27:50; 마가복음 15:37 참조)

누가복음 23장 46절과 다른 참조 성구들을 통해,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제어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육체적 사망이 일어날 시기를 정할 수 있으셨다.(요한복음 10:17~18; 19:11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견디신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셨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모든 것의 값을 남김없이 치렀고 충실하겠다는 그리스도의 의지가 확고부동했을 때, 마침내, 그리고 자비롭게 그 일이 ‘다 이루[어졌습니다.]’[요한복음 19:30 참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아들인 나사렛 예수께서는 모든 어려움에 맞서, 그분을 돕거나 지지할 그 누구도 없이 죽음이 지배한 육신의 생명을 되찾으셨으며, 지옥 같은 어두움과 절망으로부터 기쁨의 영적인 대속을 가져오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알게 된,예수님은 승리한 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함께한 자가 아무도 없었더라”, 리아호나, 2009년 5월호, 88쪽)

누가복음 23:56~24:5. 예수 그리스도의 매장

예수님의 시신을 급하게 안치시켰기 때문에 여인들은 염을 마치려고 향품과 향유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여인들은 먼저 “계명을 따라” 안식일(토요일)을 엄격하게 준수한 후에 그 일을 마무리하려고 일요일에 무덤으로 다시 갔다.(누가복음 24:1) 누가에게 이 사실은 중요했다. 참담한 비극 속에서도 그들은 안식일 계명을 준수했다. “향품”에 대한 그리스어는 향기를 의미한다. 향품과 향유는 보통 향기가 있어서 장례용품, 화장품 및 의료용품으로 사용되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매장과 관련하여 했던 역할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27:57~60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24:1~10.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또한 마태복음 28:6; 마가복음 16:6 참조)

일요일 아침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구주의 무덤에 갔으나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볼 수 없었다. 하늘 사자 두 명은 그들이 갈릴리에 있을 적에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하셨던 말씀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증언하셨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누가복음 24:7; 또한 마태복음 17:22~23 참조) 여인들은 사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킨 후에야 그 말씀을 기억했다.(누가복음 24:8 참조)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분께서 살아나셨네, 사이먼 듀이

여인들은 열한 명의 사도들을 찾아가 천사들에게 들은 말을 전하였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여러 번 예언하셨으나(누가복음 9:22, 43~45; 18:31~34 참조), 사도들은 그 소식을 전해 듣고도 주님의 부활을 믿기 힘들어했다. 조셉 에프 스미스(1838~1918) 회장은 그 점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왜 그들은 구주께서 지상 성역의 목적과 관련하여 가르치신 모든 내용을 잊어버리고 모르는 듯이 보였을까? 이는 그들이 한 가지 중요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들은 아직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지지 못했다. [누가복음 24:49] 그들은 아직 성신의 은사를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Gospel Doctrine, 5th ed. [1939], 20)

처음에 제자들이 보였던 불신을 이해하려면 마가복음 16:11~14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의 기록은 기독교계 사이에서 중심이 되는 사건인 부활에 대한 구주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분명히 하며(누가복음 24:6~7 참조), 하늘 사자 두 명이 그 사실을 확언해 주었는데, 이로써 고대 증인의 법이 이행되었다.(신명기 17:6; 마태복음 18:16; 고린도후서 13:1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선지자들의 통찰은 다음에서 더 찾을 수 있다. 마태복음 28:1 주해, 마태복음 28:6 주해, 마가복음 16:1~7 주해, 요한복음 20:1~10 주해, 요한복음 20:11~18 주해, 요한복음 20:19~23 주해.

그 영광스러운 일요일 아침 무덤에 간 여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구사의 아내 요안나가 있었다.(누가복음 8:3; 24:10 참조) 예수님을 따랐던 여성 제자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지도자 위치에서 봉사했던 것으로 보이며, 구주를 섬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분과 친분도 두터웠다. 그녀는 여성 추종자 중에서 첫 번째로 언급된 경우가 몇 차례 있었으며(마태복음 27:56; 누가복음 24:10 참조), 부활하신 주님을 맨 처음 본 사람이기도 했다.(요한복음 20:1~18 참조)

누가복음 24:13~35.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엠마오로 가는 길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그레그 케이 올슨

구주께서 부활하신 날, 제자 두 명은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떨어진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이십오 리는 약 11킬로미터임, 누가복음 24:13 참조) 베드로처럼, 이 제자들도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열망하는 정치 및 군사 지도자이시길 바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주께서는 신분을 밝히지 않으신 채 그들과 함께 걷기 시작하셨다. 그들은 구주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누가복음 24:21)

비디오 아이콘이에 구주께서는 경전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시며 자신의 죽음이 구원 사명을 이루는 데 필수적인 부분이었음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셨다.

선지자 앨마는 구주의 구원 사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되, 곧 그가 자기 백성을 구속하러 오실 것과 또 그가 그들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시기 위해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과 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실 것을 믿기 시작할지니, 이로써 부활이 이루어져, 모든 사람이 그의 앞에 서서 마지막 심판 날에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으리라.”(앨마서 33:22)

누가복음 24:27, 32. 그분은 그들에게 경전 말씀을 가르치셨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 처음에는 구약전서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성취된 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이해력의 부족은 그들이 후에 주님의 구원 사명과 예언이 성취된 방식을 생생하게 이해하게 되었던 때와 비교할 때 매우 대조적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부활 후 베드로가 처음으로 대중에게 가르쳤을 때, 그는 시편 16편 8~11절시편 110편 1절을 인용했으며, 예수님이 어떻게 이 예언들을 성취하셨는지를 설명했다.(사도행전 2:22~36 참조) 또한 기록상의 두 번째 대중 연설에서는 예수님이 어떻게 신명기 18장 15절창세기 22장 18절에 나오는 예언을 성취하셨는지를 설명하고, “모든 선지자”가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다고 가르치기도 했다.(사도행전 3:22~26 참조) 후에 베드로와 바울 및 다른 제자들은 구약전서에 나오는 성구들이 예수님과 그분의 사업을 어떻게 입증하는지를 계속해서 언급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경전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의 중요성과 힘에 관해 이렇게 가르쳤다.

“만일 구주께서 오늘날 육신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면, 과거 지상에 계셨을 때 가르치셨던 것처럼 경전으로 우리를 가르치실 것입니다. 나사렛의 회당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4:17, 21] 나중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려운 질문을 하였을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29] 그리고 부활 후에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는, ‘[그분의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4:32] 예나 지금이나 그분의 제자들에게는 ‘성경을 연구하[라]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는 그분의 말씀이 울려 퍼집니다.[요한복음 5:39] 그 증언은 성신에 의해 생기는데, 이는 ‘성신의 권능으로 [여러분이] 모든 것의 참됨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모로나이서 10:5]”(“거룩한 경전: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권능”, 리아호나, 2006년 11월호, 26쪽)

누가복음 24:32.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구주께서 경전을 사용하여 자신이 메시야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을 때, 그들의 마음은 뜨거웠는데, 이는 성신이 진리에 대해 그들에게 증거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칠십인 정원회의 일원이 된 제이 이 젠슨은 마음이 “뜨거움”은 성신이 우리에게 진리를 나타내는 방법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어느 특별한 성찬식이 있은 후에 열다섯 살 된 아들이 말했다. ‘아빠, 말씀을 듣는 동안 나는 따스한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는 따스한 느낌을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토론했으며, 그것을 경전에 나와 있는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에 연관시켰다. ‘너는 네 생각으로 그것을 연구해야만 하느니라. 그러고 나서 그것이 옳은지를 내게 물어야 하나니, 만일 그것이 옳으면, 내가 네 가슴을 네 속에서 뜨겁게 할 것이라. 그러므로 너는 그것이 옳은 줄 느끼게 되리라.’ (교리와 성약 9:8)

뜨겁다는 것은 강도가 다양한 것으로, 내 아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슴에 따스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구주를 만난 두 제자는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는 말을 서로 주고받았다. (누가복음 24:32) 이러한 느낌은 우리가 생활하는 데서 빈번하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런 일이 발생할 때는 진리를 확인하고 기도에 응답이 되는 구체적인 현시가 되는 것이다.”(“나는 영의 응답을 받은 적이 있는가?”, 성도의 벗, 1989년 9월호, 10쪽)

엠마오에 계신 그리스도

엠마오에 계신 그리스도, 월터 레인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누가복음 24:32)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뜨거움”이 성신의 계시로 주어진다고 설명했다. “영의 가르침은 흔히 느낌으로 옵니다. 이 사실은 지극히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오해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저는 가슴이 ‘뜨거운’ 것을 느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성신으로부터 오는 증거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가슴이 뜨겁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연소로 인한 발화와 같은 열의 느낌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만약 그런 의미라면 저는 한 번도 가슴이 뜨겁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이 경전에 나오는 ‘뜨겁다’는 말은 위안과 평온이라는 의미입니다.[교리와 성약 9:8] 바로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받은 증거입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계시가 이루어집니다.”(“영으로 가르치고 배움”, 리아호나, 1999년 5월호, 13쪽)

누가복음 24:34. 구주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시다

구주께서 부활하신 날, 주님과 선임 사도였던 베드로 간에 성스러운 만남이 있었다. 이 만남은 누가복음 24장 34절고린도전서 15장 5절에만 나오지만, 이 성구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 만남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우리는 자유롭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나타나심]으로 가야바의 뜰에서 베드로가 부인하며 흘린 눈물이 거두어졌을 것이다. 사탄이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이 하려고 요구할지라도 예수께서 그를 위해 간구하셨기에, 고결한 베드로는 승리를 거두리라는 확신을 얻었을 것이다. 주님과 그분의 종 사이에 화합, 사랑, 평화라는 행복한 유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The Mortal Messiah: From Bethlehem to Calvary, 4 vols. [1979–81], 4:272)

누가복음 24:36~42. 살과 뼈가 있는 부활체

누가복음 24장 36~42절에 묘사된 바와 같이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기사는 부활체에 대해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명확한 정보를 알려 준다.(또한 앨마서 11:44; 40:23 참조) 조셉 필딩 스미스(1876~1972) 회장은 이 성구들에 대해 언급하며 부활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 사흘 만에 다시 취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영은 그들이 보는 살과 뼈의 몸을 갖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와서 주님을 만져 보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더욱 분명하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주님은 생선과 꿀을 취하여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이로써 그는 무식한 자들이 읽고 이해하나 학식있는 자들은 이러한 진리에 눈을 감는다는 것을 실증으로 보이셨습니다. …

죽음에서 부활한 후 우리의 몸은 영체가 되지만, 그 몸은 만져 볼 수 있는 몸이 되며 깨끗함을 입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과 뼈를 지닌 몸이 될 것입니다. … 그 몸은 더 이상 피에 의해 살리심을 받지 않게 되고 영원한 영에 의해 살리심을 받게 될 것이며, 불멸의 상태로 되어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누가복음 24:39; 고린도전서 15:44; 교리와 성약 88:15~32 참조]”(구원의 교리, 브루스 알 맥콩키 편, 제2권, 237, 252쪽)

내 손과 발을 보라

내 손과 발을 보라, 해리 앤더슨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구주께서 두 제자와 함께 엠마오로 가는 여정을 설명했는데, 그 일은 그분이 부활하신 날 초반에 일어났다. 맥콩키 장로는 부활체가 어떠할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들은 두 시간쯤 되는 긴 시간 동안 함께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내내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에게 메시야에 관한 성구들을 해석해 주셨다! … 아마도 언젠가는 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도 드러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메시야에 관한 경전 구절들을 해석하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이 있으셨다. 그런 성구 해석은 베드로와 바울과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실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으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은 부활한 사람이 어떠한 것인지를 그들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었다.”(Mortal Messiah, 4:277)

누가복음 24:44~48.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시편

누가는 부활하신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에 관한 경전 구절들을 자세히 설명하셨다고 두 번이나 기록했다.(누가복음 24:26~27, 44~48 참조) 구주께서 제자들이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이 성구들을 이해하게 해 주신 것이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누가복음 24:45) 이 경험뿐만 아니라 구주께서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지식과 간증은 제자들에게 중대하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구주께서 선언하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라는 말씀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는 유대인의 경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누가복음 24:44) 이 세 가지에 대한 설명을 보려면, “신약전서 배경” 아래에 나오는 “경전”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전서의 증인들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요한복음 20:29~31 주해에 나오는 “신약전서에 기록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도표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24:49. 능력으로 입혀질 사도들

사도들이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것이라는 구주의 약속이 성취된 것에 대해 알아보려면(누가복음 24:49), 사도행전 1:4; 2:33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24:49~52.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갈릴리에서 시간을 보내시고 사도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주신 후에 (마태복음 28:16~20; 마가복음 16:15~18 참조), 유대로 돌아가셔서 제자들을 감람 산 동쪽 비탈에 있는 베다니로 데리고 가셨다. 그분은 그곳에서 제자들을 축복하셨다. 그런 다음 그분은 승천하셨다.(누가복음 24:49~52 참조)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자 그대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거하시고자 승천하셨다고 단언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 단어가 의미하듯이 완전히 글자 그대로이다. 그분은 부활한 사람이자 육신의 장막을 지닌 인격체로, 불멸의 존재이면서도 지상에 사는 친구들과 함께 걷고 말하고 음식을 드셨다. … 부활하신 주님은 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는 곳으로 올라가셨다. 후기의 계시에서는 그것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전능하신 권세로 다스리기 위해 하늘에 오르셨나니.’ (교리와 성약 20:24)”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872)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은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사”라는 문구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편으로 은혜를 베푼다는 것은 사람이 만든 말이 아니라 태초에 하늘로부터 계시된 것이었다. … 경전에서 우편을 언급하는 성구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의로움을 상징하며 성약을 맺을 때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Answers to Gospel Questions, 1:156–57; 또한 모사이야서 5:9~12; 26:23~24; 앨마서 5:58; 힐라맨서 3:30 참조) 구주의 승천에 대해 더 많은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마가복음 16:19 주해사도행전 1:9~11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24:53. 그들이 성전에 계속 머물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성전에 계속 머물며 하나님을 찬송했다.(누가복음 24:53 참조) 누가복음은 성전에서 시작하여 성전에서 끝이 난다. 이 기록은 우리에게 성전에 있던 사가랴와 엘리사벳에 대해, 성전에 있던 마리아와 요셉에 대해, 그런 다음 구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성전에 계속 머물렀던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에 대해 들려준다.(사도행전 2:4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