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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16장
마가복음 11~16장 소개 및 연대
마가복음 11~16장에는 구주의 지상 성역 마지막 주에 일어난 사건들이 나온다. 11~16장은 그 일주일 중 며칠만을 다루지만 마가복음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분량을 차지할 만큼 그 사건들의 중요성을 알려 준다. 이 장들에는 마가복음 8~10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해 예언하신 것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 14~15장에는 구주께서 겟세마네에서 겪으신 고통에서부터 십자가 위의 죽음과 매장에 이르기까지 속죄를 이루는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 16장에 실린,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마가의 간증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미완에 그쳤을 것이다. 구주의 속죄는 그분이 부활하심으로써 비로소 완성되었다. 그것은 진실로 마가의 기록을 “복음”, 즉 “좋은 소식”의 선언으로 만든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마가복음은 그렇게 마무리지으며, 예수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대가를 치러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셨음을 증거한다.(마가복음 10:45 참조)
14과에서는 구주의 마지막 주를 상세하게 조명하는데, 이것은 마가복음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이 중요한 사건들을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21~28장 주해, 누가복음 19~24장 주해, 요한복음 12~21장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11~16장 주해
마가복음 11:1~11. 구주께서 이루신 승리의 입성
구주께서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은 본인이 메시야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구약전서에 나오는 전통과 연관이 있으며(열왕기상 1:38~40; 열왕기하 9:1~13 참조), 또한 구약전서에 나오는 예언들을 성취한 사건이기도 했다.(시편 118:25~26; 스가랴 9:9~10 참조) 승리의 입성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21:1~11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12:28~34. 두 가지 큰 계명
마가복음 12장 28~34절에는 첫 번째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질문에 예수님이 주신 답이 기록되어 있다. 구주께서는 그 대답을 하시면서, 구약전서에 나오는 두 성구를 인용하셨다. 그분은 첫 번째로 신명기 6장 4~5절을 인용하셨다.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들이 매일 두 차례 암송하는 “쉐마[Shema]”라는 기도의 첫 부분은 4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로 시작되며, 하나님만이 경배와 헌신을 드릴 가치가 있는 유일한 분임을 확언한다.(신명기 6:5, 14; 7:9; 10:17 참조) 그런 후 구주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를 인용하심으로써 이것이 두 번째로 큰 계명임을 분명히 하셨다. 가장 큰 두 가지 계명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22:35~40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12:41~44.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또한 누가복음 21:1~4 참조)
과부가 성전 헌금함에 넣은 “렙돈”은 렙타[lepta](그리스어로 작다)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작은 동전이었다. 무게는 0.5그램 정도였으며, 당시에 로마제국에서 가치가 가장 낮은 동전인 고드란보다도 더 낮은 단위의 화폐였다.(마가복음 12:42 참조)
그 과부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헌금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헌신하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으며, 서기관들의 겉치레와는 대조를 이루었다.(마가복음 12:38~40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과부가 헌금한 돈이 비교적 적은 금액이었는데도 주님께서 그녀를 칭찬하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부자가 바친 헌금은 많지만 뒤에 남겨 둔 것이 더 많으나, 이 과부의 헌금은 그녀가 소유한 전부였다. 주님이 특별히 받아들인 것은 과부가 바친 적은 헌금이 아니라 그녀가 헌금과 함께 바친 희생과 진실한 마음의 정신이었다.”(예수 그리스도, 561~562쪽) 탈매지 장로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든 국가든 순수한 목적으로 기꺼이 제일 좋은 선물을 바친다면, 그것이 다른 것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언제나 훌륭한 선물입니다.”(The House of the Lord, rev. ed. [1968], 3)
마가복음 14:1~2, 10~11. 예수 그리스도에 맞선 음모
권력을 가진 위정자들은 구주의 성역 초반부터 그분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죽이려고 했다.(마가복음 3:6 참조) 헤롯은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베들레헴에 있는 유아들을 학살하도록 명령했으며(마태복음 2:16 참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을 때는 제사장들이 그분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마가복음 11:18 참조) 이 비밀 결사에는 대제사장 직분에 있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마태복음 26:3~4 참조)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구주께서는 순식간에 살해 음모의 표적이 되셨다. 그 음모에는 가룟 유다가 구주를 살해 공모자들에게 팔아 넘기겠다는 약속을 제사장들과 한 일도 포함된다.(마가복음 14:1~2, 10~11 참조)
마가복음 14:3~9. 예수님의 매장을 위해 그분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또한 마태복음 26:6~13; 요한복음 12:1~8 참조)
요한은 마가복음 14장 3~9절에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바로 마르다와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리아라고 밝혔다.(요한복음 12:1~3 참조) “옥합”은 향수로 사용되고 시체에도 바르는 방향제인 “순전한 나드”가 들어 있는 병을 말한다.(마가복음 14:3) 그 여인은 예수님이 아직 살아 계시는 동안 그분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분의 임박한 죽음과 매장을 인정하였다. 구주께서는 “그[녀]는 …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가복음 14:8) 향유는 매운 비싼 기름으로, 300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었으며, 보통 노동자의 약 일 년 치 임금에 해당하였다.(마가복음 14:5 참조)
제임스 이 탈매지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보통 기름을 손님의 머리에 붓는 것은 손님을 존중하는 표시이다. 일반 기름을 손님의 발에 붓는 것은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는 뜻이다. 그러나 머리와 발에 값비싼 향유 나드를 한 근씩이나 붓는다는 것은 왕에게까지도 대접하기 어려운 대접이었다. 마리아의 행동은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었다. 이 행동은 마음속 깊이 경배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아름답고 멋진 행동이었다.”(예수 그리스도, 513쪽)
구주께서는 세상 곳곳에서 그 여인의 행동을 “말하여 그를 기억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가복음 14:9) 이 일은 어떤 점 때문에 그토록 오래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 베다니의 여인은 넘쳐 흐르는 감사를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구주께서 고통을 겪고 죽어야만 한다는 가르침을 이해하고 공개적으로 받아들인 첫 번째 제자로서 마가복음에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탈매지 장로는 마리아가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야 할 때가 가까이 왔다고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을 들었을 수도” 있으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마리아의 명확하고 진지한 의도를 암시해” 준다고 설명했다.(예수 그리스도, 514쪽) 주님께 기름을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요한복음 12:1~8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14:15. “큰 다락방”
마가는 마지막 만찬이 예루살렘에 있는 “큰 다락방”에서 열렸다고 기록했다.(마가복음 14:15) 고대 이스라엘의 도시에서 집 안의 다락방은 사람들로 붐비는 길거리보다 상층에 있고 사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방 중에서 가장 좋은 방이었다. 그곳은 마지막 만찬이라는 성스러운 행사를 진행하기에 적절했다.
마가복음 14:17~25. 마지막 만찬
마지막 만찬과 더불어 성찬 상징물과 관련된 상징적 의미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26:17~30 주해 및 마태복음 26:26~28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14:32~36. 겟세마네에서 구주께서 겪으신 고통(또한 마태복음 26:36~39; 누가복음 22:39~44 참조)
마가의 기록은 구주께서 실제로 가혹한 고통을 겪으셨음을 증거한다.(마가복음 14:23~36 참조) 이 구절에서 “심히 놀라시며[sore amazed]”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경악, 경외, 큰 충격에 따른 놀람, 엄청난 비탄 등을 포함하는 감정의 범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슬퍼하사[very heavy]”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풀이 죽은, 낙심한, 번민과 슬픔으로 가득함 등의 뜻이 있다. 이 단어들은 깊고도 극심한 고뇌를 묘사한다. 구주께서는 자신의 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마가복음 14:34) 즉, 괴로움이 너무나 격심하여 죽을 것만 같으셨다.
제임스 이 탈매지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동산에서 겪으셨던 고뇌가 얼마나 격심했으며, 그 고뇌의 큰 뜻이 무엇인지 유한한 인간의 지성으로는 알 수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가 괴로워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에게 닥칠 죽음은 그가 부활하시어 그를 보내신 아버지에게로 개선의 귀환을 하시기 위한 예비적 사건[이었다.] … 그는 지상의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무거운 짐으로 시달리며 괴로워하시고 투쟁하셨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게 하는 아픔을 느끼게 한 육체적 고통도 정신적인 고뇌만도 아니었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경험하실 수 있는 영혼의 영적인 고뇌였다.”(예수 그리스도, 613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는 속죄의 고통에 대해 말씀하면서 마가의 이 기록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겟세마네에서 고통받던 예수님은 처음에 ‘심히 놀라시[게]’ 되었는데(마가복음 14:33), 그리스어로 ‘위압당하여 놀란’ 것입니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들의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 ‘놀라셨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알고 있었으나 경험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속죄의 과정을 분명하게 속속들이 알았던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난이 절정에 달하게 되자, 그것은 그분의 비할 데 없는 지성으로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간이 지은 죄의 축적된 무게가 완전하고, 죄 없고, 감수성이 강한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병고도 또한 속죄의 일부였습니다. (앨마서 7:11~12; 이사야 53:3~5; 마태복음 8:17 참조) 고통을 받던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그 시간과 잔이 자신에게서 물러가기를 간청하신 것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적절한 언급도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35~36) …
이 고통의 극치에서 그분은 혹시 수풀에 걸린 숫양을 바라기라도 하셨겠습니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분의 고통, 무한대로 늘어난 그 어마어마한 고통으로 그분은 이후에 십자가에서 영혼의 울부짖음을 토해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버림받았기에 터져 나온 울부짖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7:46 참조)
그런 중에도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보인 숭고한 순종심을 그대로 간직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39)” (“기꺼이 순종함”, 성도의 벗, 1985년 7월호, 78~79쪽)
마가복음 14:36. “아빠 아버지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또는 “나의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람어 Abba[아빠]라는 말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하셨다는 내용은 마가복음에만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지껏 그 어떤 경전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셨다는 기록은 없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오 주 하나님”, “오 만군의 주 하나님”, “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등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주권, 영광, 은혜, 그 밖의 성스러운 속성에 경의를 표하는 직함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하나님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구주께서 “아빠 아버지여”라고 부르신 것은 그런 관습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것은 단순하고도 심오한 말이었으며, 하나님 아버지와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냈다. 구주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와 같이(마태복음 6:9)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치셨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구주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아버지께 간구하신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땀구멍에서 피가 나오고 입에서 고뇌의 외침이 나오던, 인류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그 순간에 그리스도는 자신이 늘 찾았던 아버지를 찾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4:36] 그 말을 언급하는 것조차 신성 모독으로 여겨질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아들과 그 아들의 유일한 참된 힘의 근원인 아버지께서 함께 속죄 과정을 지속하며 그 밤을 견뎌 내셨습니다.”(“아버지의 손길”, 성도의 벗, 1999년 7월호, 19쪽) 또 다른 모임에서 홀런드 장로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마가는 [예수님이] 땅에 엎드리어 ‘아빠 아버지여’라고 외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신학이 아닙니다. 바로 아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마가복음 14:36)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제발 이 잔을 제게서 옮겨 주세요.’라는 자녀의 간청을, 더군다나 이렇게 완전한 자녀의 간청을 누가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 기도 전체는 만약 가능하다면 이 시간이 그 계획으로부터 거두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다른 길이 있거든 그 길을 가게 해 주시옵소서. 만약 다른 길이 있다면, 다른 길이 있기만 하다면 기꺼이 그 길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그러나 결국 그 잔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님은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맡기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42)”(“가르침, 설교, 병 고침”, 리아호나, 2003년 1월호, 21쪽)
마가복음 14:36. “이 잔”
구주께서는 자신의 속죄 고통과 죽음을 “잔”으로 표현하기도 하셨다.(마가복음 14:36; 또한 마가복음 10:38, 요한복음 18:11 참조) 이 말은 오랜 역사를 지닌 경전상의 상징에서 나왔다. “잔”은 하나님의 분노를 상징하거나 심판과 악인의 형벌을 나타내기도 했다.(시편 75:8; 이사야 51:17; 모사이야서 3:24~26 참조)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변호하시고 그들의 손에서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거두어 그들이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할 날이 오리라고 예언했다.(이사야 51:22)
구주께서는 부활하신 후 니파이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저 쓴 잔을 마시고 세상의 죄를 짊어져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노니, 이로 말미암아 태초로부터 모든 일에 아버지의 뜻을 담당하였느니라.”(제3니파이 11:11) 구약전서에는 “분노의 잔” 외에도 축복과 구원의 잔도 언급된다.(시편 16:5; 23:5; 116:13 참조) 구주는 우리를 위해 속죄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자 그 “쓴 잔”을 마셨으며(제3니파이 11:11; 교리와 성약 19:18), 그리하여 우리에게 “축복의 잔”을 건네 줄 수 있게 되셨다.(고린도전서 10:16) “잔”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려면, 마가복음 10:38~39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14:50~52.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무장한 무리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충분히 있으셨으나(마태복음 26:51~54; 야곱서 2:15 참조) 그분은 그렇게 하실 의향이 없으시다는 것을 깨닫고는 두려워서 도망쳤다.(마가복음 14:50 참조) 마가는 베 홑이불을 두른 청년이 구주를 따라가다가 그 무리에 있던 몇 사람에게 “잡히[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내용을 자세히 기록했다.마가복음 14:51~52 참조)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에는 그 청년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다고 나온다.(Joseph Smith Translation, Mark 14:57) 무엇보다도, 이 기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서 버림을 받고 홀로 다가올 잔혹한 행위에 맞서야 하셨음을 보여 준다.
마가복음 14:53~65. 공회 앞에 서심(또한 마태복음 26:57~68; 누가복음 22:63~71; 요한복음 18:19~24 참조)
마가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공회 앞에 서신 일을 사복음서 중 가장 길게 기록했다.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세부 사항은 구주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던 증인들이 서로 상충하는 증언을 했다는 점이다.(마가복음 14:56~59 참조) 모세 율법에서 사형을 선고하려면 확실한 증거가 적어도 두 가지는 있어야 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고소는 무효였다.(민수기 35:30; 신명기 17:6; 19:15 참조) 그리고 대응할 가치가 없는 거짓 앞에서 구주께서는 침묵하셨다.
마침내,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께 노골적으로 물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마가복음 14:61) 마가복음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구주의 단언은 사복음서 중 가장 솔직 담백하다. “내가 그니라.” 이 강력한 답변에 더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가복음 14:62) 구주께서는 이 말씀에서 경전에 나오는 예언을 인용하셨다. 해당 구절은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라고 나오는 다니엘 7장 13~14절과 메시야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실 것이라고 나오는 시편 110편 1절이다.(또한 마가복음 12:36; 13:26; 16:19 참조) 자신에 대한 이 증언으로 그분은 메시야, 즉 “인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전하셨다.
구주께서 하신 증언은 자신을 재판하는 공회에게 전하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분은 자신이 왕좌에 앉아 그들을 심판할 때가 오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셨다. 구주의 대답은 그분이 당면한 고통을 넘어서서 미래의 승리, 특히 아버지에게로 승천하고 미래에 영광 중에 올 날을 내다보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예수[는] …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신성 모독죄에 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26:61~66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15:1~2.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마가복음 15장 1~2절에 기록되었듯이, 유대인 공회는 로마 당국의 대표자인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공회는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기소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로마 당국이 관심을 두지 않는 유대인의 문제였기에, 그들은 로마제국의 지도자들이 중대한 사안으로 여기는 반역죄로 예수님을 기소하려 했다. 만일 유대인 공회에서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판결하여 모세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인다면(레위기 24:14 참조), 예수님을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마가복음 12:37 참조) 그런 민간 소요가 일어난다면, 로마 당국은 가혹한 응징을 가할 것이었다. 하지만 만일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가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고 로마 당국을 설득한다면, 로마 당국은 그분을 가이사에 대한 반역자로서 처형할 것이다.(누가복음 23:2 참조)
마가복음 15: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구약전서에는 죽어 가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포도주를 마취제로 사용하는 유대인의 관습이 암시되어 있다.(잠언 31:6~7 참조) 마가는 구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라는 제의를 받았다고 기록했다.(마가복음 15:23) 예수님은 감각이 둔해지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줄이기를 원하지 않으셨기에 의도적으로 그것을 거절하셨다. 그분은 의식이 있는 상태로 나머지 속죄의 고통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경험하기로 하셨다.(마가복음 14:25; 앨마서 7:11~13 참조)
마가복음 15:3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또한 마태복음 27:46 참조)
마가는 구주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을 원래의 아람어로 기록하고 그 번역문도 함께 실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복음 15:34)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 초반에도 몇 차례 이런 식으로 기록했는데(마가복음 5:41; 7:34; 14:36 참조), 아마도 아람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로마인 독자를 배려하여 그렇게 했을 것이다. 버림받은 것에 대한 구주의 울부짖음은 시편 22편 1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자신의 죄로 괴로워하는 다윗의 외침을 떠올리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짓지 않으셨기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영적으로 분리된 적이 없으셨으나,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고통을 겪으시는 동안에는 그 끔찍한 분리를 경험하셨다.(이사야 53:5~6; 고린도후서 5:21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평생 하나님 아버지의 영을 풍성하게 누리셨다.(Joseph Smith Translation, John 3:34 참조) 하지만 그 영이 물러나자 그분은 가장 큰 아픔과 슬픔, 고통을 느끼게 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속 내미시던 손길을 이처럼 거두어 가신 것은 그리스도가 온전히 승리를 거두는 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영을 아들에게서 거두어 가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온 영혼의 확신을 담아, 저는 주님께서 참으로 그분의 아버지를 온전히 기쁘게 하셨으며, 온전하신 아버지께서 그 시간에 그분의 아들을 버려 두지 않으셨음을 간증드립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지상 성역을 통틀어 이 고뇌하는 최후의 고통의 순간보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아들에게 더 가까웠던 적은 없었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희생은 완전했으나 고독했으며,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위안이 되었던 그분의 영을 잠시 거두셨습니다. 나쁜 말이나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불결한 것에 손대 본 적 없는 온전한 아들이, 나머지 인류인 우리, 즉 우리 모두가 이러한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느끼게 될 것인지 알아야 했다는 것은 위대한 속죄의 핵심이자 필요 조건이었습니다. 그분의 속죄가 궁극적이고 영원한 것이 되려면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인 죽음이 어떤 것인지 느끼고,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태가 되도록 완전히 홀로 두고 떠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견디셨으며 계속 인내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선하심으로 가장 극심한 고통의 상태에 처한 중에도 신앙으로 이기셨습니다. … 예수님이 그토록 길고 외로운 길을 온전히 홀로 걸으셨기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함께한 자가 아무도 없었더라”, 리아호나, 2009년 5월호, 87~88쪽)
마가복음 15:39.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구주께서 돌아가시자 제일 먼저 말을 한 사람은 로마인 백부장이었는데, 그는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말했다.(마가복음 15:39) 이 말은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했던 다음 문장을 생각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마가복음 1:1) 이 문장은 마가가 남긴 구주의 지상 성역에 대한 이 기록의 기본 틀을 형성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마가의 간증을 강조해 준다.
마가복음 15:39. 아버지와 아들 둘 다의 사랑을 보여 주는 속죄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위해 속죄하도록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감사를 표현했다.
“저는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물론이고 예수님의 참 아버지, 곧 속죄와 구속이 이루어지던 그 시간에 그분의 장자이며 온전하신 아들의 희생을 받아들이시는 것으로 모든 자녀들을 축복하여 주신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자 하나님이신 그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부족하지만 저도 한 사람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이 그토록 심한 고난을 겪으며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던 그 짐을 감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장 천사를 보내 멈추게 하려는 생각이 온 마음에 가득하셨을 텐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담과 이브로부터 세상 끝날까지 모든 자녀들의 죄를 대신 갚고 구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시며 참아내셨습니다. 그 쓴 잔에 위축되지 않으셨으며, 불완전하고 부족하여 넘어지고 너무 자주 목표를 놓치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던 완전하신 아버지와 그분의 완전하신 아들에게 저는 영원히 감사드립니다.”(“아버지의 손길”, 리아호나, 1999년 7월호, 16쪽)
마가복음 16:1~7. “그가 살아나셨고”(또한 마태복음 28:1~7; 누가복음 24:1~8; 요한복음 20:1~3 참조)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고(마가복음 1:1) 기록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을 시작한다는 말이었다. 궁극적으로 이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과 부활에 대한 마가의 간증이기에 그의 기록은 “좋은 소식”이다.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은 회장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분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는 장황한 교훈적 말씀이나,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 되어 버립니다. 궁극적인 승리가 없는 말씀과 기적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승리는 궁극적인 기적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죽은 사람이 불멸의 상태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불멸의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었으며 그분이 육체적 및 영적 죽음을 극복하신 승리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입으로 말해야 할 좋은 소식입니다. …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마가복음 16:6) 이 간결한 말씀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곧 주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 셋째 날에 그분은 온 인류의 구주이며 부활의 첫 열매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속죄의 희생을 통해 모든 사람은 무덤에서 구원을 받고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부활에 대한 사도의 증거”, 성도의 벗, 1986년 7월호, 16~17쪽) 마태복음 28:6 주해 및 요한복음 20:11~18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16:9~20. 마가복음의 결론
가장 신뢰할 만한 마가복음의 초기 원고에는 마가복음 16장 9~20절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 성구들에 사용된 그리스어 서체도 마가복음의 나머지 부분과는 다르다. 이 점을 미루어 보면, 결론을 맺는 이 성구들은 마가가 쓴 것이 아니라, 필경사들이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과 좀 더 조화를 이루고자 마가복음의 끝부분에 구주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신 기록을 추가한 것일 수도 있다. 필사본마다 차이가 있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교회에서는 마가복음 16장 전체를 영감 어린 경전으로 받아들인다. 그 가치는 누가 그 기록을 썼는가가 아니라 그 기록이 영감 어린 진리의 증거이었다는 데에 달려 있다.(디모데후서 3:16~17; 베드로후서 1:21; 교리와 성약 68:4 참조)
마가복음 16:11~14. 처음에 믿지 않은 제자들
제일회장단의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은 제자들이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그토록 믿기 어려워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십자가에 달려 무덤에 묻히신 예수께서 영화로운 존재로 다시 지상에 오신 것을 사도들이 믿지 않았다하여 그들을 과도하게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야이로의 딸(마가복음 5:22, 24, 35~43 참조), 나인의 청년(누가복음 7:11~15 참조), 또는 나사로를 살리신 일(요한복음 11:1~44 참조)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절대로 다시 죽지 않을 것입니다. …
그 일에 대하여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 사도들에게 일어난 동요와 의심과 절망의 마음은 유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이 갑작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 있게, 두려움 없이 힘차게 전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셨다는 계시였습니다. 그분의 약속은 지켜졌으며, 메시야로서의 사명은 성취되었습니다. … 이처럼 편견이 없고, 기대도 하지 않던, 의심 많은 증인들의 증거 위에, 부활에 대한 믿음은 무너질 수 없는 기초를 놓았습니다.’ (Treasures of Life, comp. Clare Middlemiss, Salt Lake City: Deseret Book Co., 1962, pp. 15–16.)
옛 사도들과 같이, 그 지식과 믿음으로 우리는 모두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자신감 있고, 착실하고, 두려움 없이 평화롭게 살아나갈 수 있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 지식과 믿음은 우리가 모든 짐을 나르고, 어떠한 슬픔이든 감당해 내며, 현세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기쁨과 행복을 충분히 맛보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거룩한 속죄의 은사”, 성도의 벗, 1989년 1월호, 14~15쪽)
마가복음 16:16. 침례의 필요성
침례의 필요성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요한복음 3:5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 표적이 따르리니”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구주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신앙을 갖고 나아가 복음을 전하면 기적이 따를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기적은 언제나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믿는 이들에게는 표적이 계속 따를 것이라며 이렇게 가르쳤다.
“많은 기적이 매일 우리 교회의 사업과 우리 회원들의 생활에서 일어납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이 기적을 목격했으며, 아마도 여러분이 깨닫는 것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에서는 신권 권능이 일으키는 기적이 늘 존재합니다. 몰몬경에서는 ‘하나님은 방편을 마련하사 사람이, 신앙을 통하여, 능한 기적을 행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 가르칩니다.(모사이야서 8:18) 그 마련된 ‘방편’은 신권 권능이며(야고보서 5:14~15; 교리와 성약 42:43~48 참조), 그 권능은 신앙을 통해 기적을 일으킵니다.(이더서 12:12; 모로나이서 7:37 참조) 경전에는 그러한 기적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것과 베드로가 다리 저는 사람을 치유한 사례는 성경에 나오는 잘 알려진 예이며(열왕기상 17:8~24; 사도행전 3장 참조),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
… 스펜서 더블유 킴볼(1895~1985) 회장님은 십이사도로 봉사하던 시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
우리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납니까? 계시, 시현, 방언의 은사, 병 고침, 특별한 인도와 가르침, 나쁜 영을 쫓아냄 등 온갖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 기적은 어디에 기록됩니까? 교회 기록, 일지, 뉴스 및 잡지 기사,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 기록됩니다.’[‘The Significance of Miracles in the Church Today,’ Instructor, Dec. 1959, 396]
우리 대부분은 우리 개인의 삶과 사랑하는 이들의 삶에 일어나는 기적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기적에는 출생과 죽음 및 기적적인 병 고침이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현대에 ‘내 이름으로 믿는 자 모두에게 기적과 표적과 기이한 일을 보여 주리라’라고 말씀하신 약속의 성취입니다.(교리와 성약 35:8)”(“Miracles,” Ensign, Jun. 2001, 6, 8-9)
마가복음 16:19.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또한 누가복음 24:51; 사도행전 1:9 참조)
마가복음 16장 19절은 신약전서 내에서는 구주의 승천을 기록한 첫 번째 기사이다. 이 성구는 구주께서 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겠다고 하셨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다.(마가복음 12:35~36; 14:62; 시편 110:1 참조) 제일회장단의 휴 비 브라운(1883~1975) 회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서 절정을 이루는 사건인 승천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는 역사 기록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가 그리스도의 속죄라고 믿는다. 부활과 승천이 없다면 속죄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두 가지에 대한 기록은 그 이야기의 절정을 이룬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은 여전히 모든 참된 기독교인의 생각에서 중추와 중심이 된다.”(Continuing the Quest [1961], 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