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제22장: 요한복음 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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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4장

요한복음 2~4장 소개 및 연대

십이사도 정원회의 조셉 비 워스린(1917~2008)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변화의 복음입니다. 그것은 지상에 사는 우리가 영원한 삶을 상속하기에 알맞은 사람으로 변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갈고 닦아 줍니다.”(“큰 계명”, 리아호나, 2007년 11월호, 29쪽) 신약 시대 사람들은 구주의 말씀을 듣거나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면서,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그분의 능력을 감지했다. 구주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고(요한복음 2:1~11 참조) 성전을 깨끗이 하여 성전이 “아버지의 집”으로 존중받게 하셨으며(요한복음 2:16) “죽게” 된 왕의 신하의 아들에 대해 단순히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요한복음 4:47, 50) 그를 낫게 하셨다. 또한 구주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영적으로 거듭나라고 권유하셨으며(요한복음 3:1~21 참조), 야곱의 우물가에서는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알아보도록 사마리아 여인의 이해력을 키워 주셨다.(요한복음 4:5~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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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과 연대표

요한복음 2~4장 주해

요한복음 2:1~11.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기적

요한복음 2장 1~11절에는 구주의 지상 성역에 있었던 기록상의 첫 번째 기적,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 기적의 의미나 상징에 관한 설명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적으로부터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인잔치에 참석하신 것은 그분이 은둔 생활을 하는 분이 아니셨음을 보여 준다. 그분은 평범하게 생활하며 그 시대의 사람들과 교류하셨다. 예수께서 혼례에 참석하신 것은 그분이 결혼 관계를 인정하셨음을 보여 준다. 또한, 우리는 그분이 모친의 요구에 응하시는 모습에서 자녀가 부모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존중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구주께서는 기록상의 이 첫 기적에서 성분을 다른 상태로 바꾸는 능력을 드러내셨으며, 그렇게 하여 창조주라는 자신의 역할을 증명하셨다.(Bruce R. McConkie,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1965–73], 1:135–36 참조)

구주께서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 보이신 일은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육에 속한, 타락한 상태에서 의로움의 상태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모사이야서 3:19 참조) 또한, 여기에서 우리는 기적적인 표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믿고자 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키워 주고 굳건히 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된다.(교리와 성약 63:9~11 참조)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에는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거기에는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가 “그를 믿는 제자들의 신앙이 강화되었느니라”로 수정되어 있다.(Joseph Smith Translation, John 2:11)

가나의 혼례에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있었다.(요한복음 2:6)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돌로 만든 그릇은 의례적인 청결을 지속적으로 유지했으나 도자기로 만든 그릇은 의례적으로 불결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한 “통”은 약 34리터였으므로, 여섯 항아리에는 약 380에서 600리터 정도가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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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회석 항아리 그림

이스라엘에 있었던 신약 시대의 석회석 항아리

요한복음 2:1~11. “좋은 포도주”

성경에는 술에 취하는 것과 독한 음료의 해악이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다.(예를 들어, 잠언 23:20~21; 이사야 5:11~12; 에베소서 5:18 참조) 이들 성구에서는 알코올 섭취를 특별히 금하지는 않으나, 과음과 술에 취하는 상태를 비난하는 내용은 나온다. 우리 시대에 주님께서는 지혜의 말씀을 계시해 주셨으며, 그 계시에서는 알코올 음료 섭취를 금한다.(교리와 성약 89:4~7 참조)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시대에 주신 계명으로 과거 경륜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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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에서의 혼례

가나에서의 혼례, 칼 에이치 블로흐

요한복음 2:4.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흠정역의 표현대로라면 구주께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이신 반응이 퉁명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과 그리스어판에는 그분이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그렇게 대답하셨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들이 그의 어머니에게 사용한 ‘여자여’라는 호칭은 불경스럽기까지 한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귀에 다소 거슬리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은 정반대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온갖 고통을 당하셨던 지상 생활의 최후의 두려운 순간에 울고 있는 마리아 즉 그의 어머니를 내려다 보시며 사랑하는 제자 [요한의 보살핌을 받도록] 부탁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한복음 19:26] 이와 같은 최후의 순간에 곧 죽음으로 헤어져야 할 어머니에 대한 주님의 관심은 영예와 친절과 사랑 이외의 어떤 감정에 차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 149~150쪽)

또한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을 보면, 예수께서 단지 어머니에게 자신에게 시킬 일이 무엇인지 여쭈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하겠다는 의지도 표현하셨음을 알 수 있다. “여자여, 저에게 시키실 일이 무엇이오니이까? 그 일을 제가 하겠사오니.”(Joseph Smith Translation, John 2:4)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질문은 본질적으로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를 의미했다. 구주께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하신 말씀은, 비록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지만(요한복음 2:4) 이제 자신이 바야흐로 마리아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역할을 성취하려는 과도기에 있음을 어머니에게 전한, 섬세하고 애정 어린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요한복음 2:13~22. 성전을 깨끗하게 하심

공관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지상 성역 마지막 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다고 나온다.(마태복음 21:12~16; 마가복음 11:15~18; 누가복음 19:45~48 참조) 요한복음 2장 13~22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것과 같은 사건일 수도 있으며, 정말 그렇다면 요한은 그 사건을 자신의 복음서 초반에 싣기로 계획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예수님이 마지막 주뿐만 아니라 성역 초기에도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적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요한의 기록이 다른 복음서들과 보이는 이러한 차이점은, 아마도 [예수님이]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은 두 차례가 있었을 것이며, 또한 두 번째로 성전을 깨끗이 하셨을 때 격분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는 점을 시사한다.(마가복음 11:18; 누가복음 19:47; Bruce R. McConkie,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636 참조)

요한복음 2:16. 주님의 집은 거룩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성전에 들어가신 구주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황소 외양간, 양 우리, 비둘기 새장” 등이 난잡하게 펼쳐져 있는 모습이었다. “환전하는 사람들이 펼쳐 놓은 상이 사방에 가득했는데, 그들은 희생 동물을 사려는 사람들에게 로마 동전과 기타 동전을 성전 동전으로 바꾸어 주는 일을 하며 이윤을 챙겼다.”(Bruce R. McConkie,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137–38)

구주께서 성전 주위의 불경과 세속적인 상태를 깨끗이 하고자 보이셨던 결연한 행동에 대해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 회장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돈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 시대에 많은 유대인의 마음을 변질시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이득을 얻는 데 더욱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왜 그분의 성전에 관심을 가져야 했겠습니까? 그들은 성전 뜰을 시장으로 타락시켰고, 신앙 깊은 사람들의 기도와 찬송 소리를 탐욕스러운 돈 바꾸는 사람들의 흥정 소리와 양이 우는 소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게 하실 때처럼 격렬한 감정을 노출시키신 적은 없습니다. …

이같이 격렬한 행동을 보이게 된 이유는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세 단어에 들어 있습니다. 이 집은 보통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이 집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이 집은 경건한 자들의 집이었습니다. 이 집은 인간의 근심과 걱정을 위로해 주는 위로의 집이며 천국의 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6) 가장 높으신 이에 대한 그분의 헌신은 그분의 영혼에서 불을 밝혔으며 그분의 말씀은 칼과 같이 상대방의 마음을 찌르는 힘이 있었습니다.”(“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성도의 벗, 1978년 2월호, 79쪽)

구주께서 성전을 신성하게 대하신 태도를 본받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주님의 집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인데, 이를 십이사도 정원회의 리차드 지 스코트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은 성전 추천서를 받기 위해 감독과 스테이크 회장과 접견을 하게 됩니다. 정직하고 솔직하게 그들과 이야기하십시오. 그 접견은 통과 시험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거룩한 의식을 받고 주님의 집에서 제공되는 교화적인 성약을 받고 지키기에 합당한 성숙도와 영성이 여러분에게 있는지를 확인하는 중요한 단계입니다. 개인의 합당성은 성전 축복을 누리는 데에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합당하지 않게 성전에 들어가는 어리석은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성전 축복을 받음”, 리아호나, 1999년 7월호, 29쪽)

요한복음 2:17. “제자들이 … 기억하더라”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시자, 제자들은 시편 69편 9절에 기록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라는 예언을 떠올렸다.(요한복음 2:17) 이 구절은 예수께서 성전이 장사하는 집으로 사용되는 불의에 분노하신 것은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집을 “열심”, 즉 열렬히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음을 알려 준다.

요한복음 2:18~21.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구주께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보내시자, 몇몇 유대인 지도자들은 성전의 신성을 더럽히는 사람들을 그분 아버지의 집에서 내쫓을 권능이 있음을 표적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했다. 구주께서 하신 대답은 실제의 성전을 의미하는 듯 비쳐졌으나,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회장은 구주께서 사실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그것을 되찾을 권능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위대한 부활의 신권 권능은 이 세상의 주님에게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태복음 28:18)고 가르치셨습니다. …

그분은 유대인에게 말씀하실 때, 이 권능을 은밀히 선포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복음 2:19~21)

부활의 열쇠는 안전하게 우리 주님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25]”(“사후의 삶”, 성도의 벗, 1987년 7월호, 10쪽)

요한복음 3:1.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산헤드린의 일원이었던 니고데모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영향력과 권한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었다.(요한복음 3:1; Bible Dictionary, “Nicodemus” 참조) 다른 성구들을 살펴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진지하게 질문을 드렸던 것 같다.(요한복음 3:1~9 참조) 예를 들어, 니고데모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구주를 옹호하는 말을 했으며, 그 때문에 그는 조롱을 받았다.(요한복음 7:45~52 참조) 구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매장하는 데 사용하도록 값비싼 몰약과 향품을 가져다주었다.(요한복음 19:38~4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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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와 예수님

예수님과 이야기하는 니고데모

요한복음 3:3~5. “거듭남”

교회의 총관리 역원들은 “거듭남”의 교리를 종종 언급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데이비드 에이 베드나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행사하고, 죄를 회개하고, 신권의 권세를 지닌 사람에게 죄 사함을 위한 침수로써의 침례를 받음으로써 거듭남의 과정을 시작합니다. … 구주의 복음에 완전히 잠겨 충만해지는 것이야말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단계입니다.”(“너희는 거듭나야 하리라”,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21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우리가 물과 영으로 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취함으로써 우리 구주와 성약의 관계를 맺었을 때, 우리는 거듭났습니다. …

후기 성도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영적으로 난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과 딸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모사이야서 5:7; 15:9~13; 27:25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듭남의 상태를 위해 예비된 축복들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성약을 지키고 끝까지 견뎌야만 합니다. 한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영적인 부자 관계와 영광스런 상속의 소망을 갖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당신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성도의 벗, 1998년 7월호, 60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디 토드 크리스토퍼슨 장로는 거듭나는 데에는 우리의 노력과 “거룩한 권능”이 요구되는데, 우리 대부분에게 그 일은 갑자기 한번에 일어나기보다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일어난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나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 즉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요한복음 3:3~5 참조) 육체적 및 영적 침례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은 변화를 통한 거듭남을 위해서, 즉 육에 속한 사람이 성도로 거듭나는 변화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행위와 거룩한 권능이 개입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합니다.(모사이야서 3:19 참조) …

여러분은 ‘왜 내게는 이 놀라운 변화가 더 빨리 일어나지 않을까?’라고 자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베냐민 왕의 백성들이나 앨마, 그 외 경전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의 예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변화가 점진적으로 서서히 일어날 것입니다. 육체적인 탄생과는 달리 거듭남은 한순간에 발생하는 사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련의 과정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지상 생활의 핵심적인 목표입니다.”(“거듭남”,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77~78쪽)

요한복음 3:3~5. 주님의 왕국에 들어감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물과 영으로 침례를 받을 때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구주의 가르침에(요한복음 3:3~5 참조) 다음과 같은 통찰을 더했다.

“우리가 합당한 신권의 권세를 지닌 자에 의해 침수로써 침례를 받고 구주를 따르기로 했다면, 우리는 그분의 왕국 안에 있는 것이며 그분의 왕국에 속한 것[입니다.] …

침례받을 때, 우리는 계속해서 세상에 살지만 침례받은 순간부터 기꺼이 하나님의 왕국으로 나아오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겠다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성약했습니다. …

우리가 침례 성약과 성신의 은사를 이해할 때, 우리의 삶은 변화하고 하나님의 왕국에 헌신하게 됩니다. 유혹이 닥쳐와도 우리가 들으려고만 한다면 성신은 구주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겠다는 우리의 약속을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 …

그분의 왕국에 속할 것을 택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장은 검소하고 생각은 순수하며 언어는 깨끗할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을 고양시켜 주는 영화와 텔레비전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그런 책과 잡지, 신문을 읽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목표를 갖도록 격려하는 친구를 택하고 다른 사람을 친절히 대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도덕, 도박, 담배, 술 및 불법적인 마약을 금할 것입니다. 우리의 안식일 활동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반영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집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도록 생활할 것입니다.”(“침례 성약: 왕국 안에 있으며 왕국에 속해 있음”, 리아호나, 2001년 1월호, 7~9쪽)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3절과 5절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있는 것과 “들어갈 수” 있는 것에 대해 구주께서 하신 말씀을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하나님의 왕국을 보는 것과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을 보려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며, 그 안에 들어가려면 성약을 받아들이고 지켜야 한다.”(History of the Church, 6:58)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을 “보는” 동안, 성신이 그 사람의 “마음에 … 크나큰 변화를” 일으키신다.(앨마서 5:14 참조)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 복음 의식들에 참여해야 한다.

요한복음 3:5. 의식은 승영을 얻는 데 꼭 필요하다

구주께서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니고데모에게 주신 다음 가르침은 우리가 영생을 향해 진보하고자 한다면 침례와 성신의 은사를 받는 의식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많은 기독교인은 침례와 같은 의식이 꼭 필요하다고 믿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에서 복음 의식은 언제나 필수적이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거듭난다는 것은 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옵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 95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복음 의식이 없는 선한 행위는 인류를 구속하거나 승영에 이르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약과 의식은 필수적인 것입니다.”(“유일한 참된 교회”, 성도의 벗, 1986년 1월호, 91쪽) 패커 회장은 더 나아가 이렇게 가르쳤다. “의식과 성약은 우리가 그분의 면전으로 들어가기 위한 신임장이 됩니다. 그것을 합당하게 받는 것은 일생의 추구요, 그 후에 그것을 지켜 나가는 것은 지상 생활의 과제입니다.”(“성약”, 성도의 벗, 1987년 7월호, 25쪽)

요한복음 3:6~11.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는 개인이 영생을 얻기 위해 거듭나야 한다는 구주의 가르침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요한복음 3:4 참조) 요한복음 3장 6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구주께서는 그에게 영적인 것들은 영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제일회장단의 매리온 지 롬니(1897~1988) 회장은 니고데모가 아직 영으로 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영으로부터 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씀은 지식의 근원은 두 가지이며, 두 가지 과정 즉, 하나는 육신의 감각을 통해, 다른 하나는 영의 음성을 통해 배운다는 것입니다.”(“Receiving and Applying Spiritual Truth,” Ensign, Feb. 1984, 3)

구주께서는 더 나아가서 영적인 것들을 배우는 과정을 바람이 부는 과정에 비유해서 설명하셨다.(요한복음 3:7~8 참조) 이 가르침에 대해 롬니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구주께서는 여기서 성신의 은사, 즉 주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을 통해 얻는 지식은 우리가 바람을 볼 수는 없더라도 그것이 불고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영의 작용을 이해할 리가 없겠지만, 영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배우는 과정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Receiving and Applying Spiritual Truth,” 4)

구주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에 관하여 이런 진리들을 설명하신 후에도 니고데모는 여전히 그런 것들에 의아해하며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말했다. (요한복음 3:9)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요한복음 3:10) 구주께서 가르치신 진리들은 구약에서 가르치는 것들이므로, 니고데모는 그 진리들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요한복음 3:12. “땅의 일”과 “하늘의 일”

구주께서는 니고데모가 개종과 영을 비롯하여 “하늘의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의 이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태어남과 바람을 포함한 “땅의 일”에 대해 말씀하셨다.(요한복음 3:12)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브리검 영 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구주께서 보이신 이와 같은 가르침의 방식은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서 볼 수 있다고 설명한 바가 있다. 예를 들어, 구주께서는 니고데모를 가르치신 후 사마리아로 가셨는데,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에 관해 가르치심으로써 자신의 참된 신분, 즉 그분이 메시야임을 그녀가 이해하도록 도우셨으며, 또한 점심 식사를 통해 제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하는 필요성을 이해하도록 도우셨다.(요한복음 4:7~38 참조) 홀런드 장로는 그와 같은 각각의 경우에 구주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더 높은 목적, 더 거룩한 의미, 좀 더 영적인 자양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목을 높여 주기 위해 일상의 소재를 활용하셨다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 구주께서 이 동일한 교훈을 거듭 가르치셨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 대해 말씀하셨으며, 사람들은 그분이 실제의 성전에 대해 말씀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2:18~21) 구주께서 ‘떡’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이 실제로 먹는 떡에 대해 말씀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6:30~58) 그런 식으로 계속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하나의 표현을 우화적으로 다양하게 적용하는, 그런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든 상황에서 ‘너희 눈을 들어’ ‘하늘의 일’, 특히 그분을 보고 이해하라는 권유였습니다. 또한, 사람의 이해력에 제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르치며, 그런 후에 더 깊이 이해하도록 그들을 이끌겠다는 의지를 되풀이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들이 원할 경우, 그 가르침은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초월하여 그들을 영원으로 이끌 것입니다.”(“Lift Up Your Eyes,” Ensign, July 198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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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놋뱀

모세와 놋뱀, 주디스 에이 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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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히심

십자가에 못 박히심, 칼 에이치 블로흐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을 상징하기 위해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올렸다(요한복음 3:14~15 참조)

요한복음 3:14~17.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구주께서는 니고데모를 계속 가르치시면서, 특히 요한복음 3장 14~17절에 기록된 대로, 자신이 받은 구속 사명에 관한 중요한 진리들을 언급하셨다. 그분은 놋뱀의 상징을 언급하셨는데, 모세는 구주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속죄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 올렸다. 이스라엘 백성이 독사에게 물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그 뱀의 상징물을 바라보았듯이, 유대인들도 십자가 위에 들어 올려질 구속주를 바라보도록 권유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 덕택에 살게 될 것이었다.(제3니파이 27:13~14 참조) 놋뱀은 전세에 여호와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요한복음 3장 16절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궁극적인 표현이라며 이렇게 확언했다. “하나님의 사랑에 담긴 무한한 힘과 온전함을 보여 준 가장 훌륭한 증거를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복음 3:16) 또 다른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셨다]’고 기록했습니다.(로마서 8:32) 아들을 보내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무한한 고통을 겪게 하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슬퍼하셨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는 가장 훌륭한 증거입니다!” (“사랑과 율법”, 리아호나, 2009년 11월호, 26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그분의 속죄 희생, 의로운 행위를 전제로 하는 그분에 대한 믿음, 그리고 결국에는 충실한 이들이 받게 되는 영생을 하나로 묶어서 구원의 계획 전체를 요약해 준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144)

요한복음 3:22~26; 4:1~2. 예수님과 제자들이 많은 이들에게 훌륭하게 가르치고 침례를 베풀었다

요한복음 3장 22절의 표현은 구주께서 침례를 집행하셨음을 암시하지만, 요한복음 4장 1~2절은 그분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음을 시사하는 듯이 보인다.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에서는 이런 분명한 불일치를 해소하며, 유대인 지도자들이 도모하는 사악한 계략에 대해 관련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침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더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었고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더 부지런히 방법을 찾더라. 이는 많은 자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영접하되 에수는 믿지 아니함이더라.

이제 주께서 자기 제자들만큼 많이 친히 침례를 베풀지 아니하셨을지라도 주께서 이를 아셨으니,

이는 서로 존경하는 모범을 그들에게 보이시기 위해 그들에게 허락하심이더라.”(조셉 스미스 역, 요한복음 4:1~4[경전 안내서])

요한복음 3:25~36. 겸손의 모범인 침례 요한이 구주의 사명을 가르쳤다

요한복음 3장 25~36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침례 요한은 자신을 따르는 몇몇 제자에게 구주의 사명에 대해 간증하면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보다 훨씬 더 위대한 분이시라고 가르쳤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28절을 인용한 후, 침례 요한의 간증과 겸손의 모범은 구주에 대한 증거가 되고, 또한 우리에게 본보기가 된다면서 이렇게 가르쳤다. “오늘날의 세상을 사는 우리 모두는 표준, 즉 따라야 할 모범을 필요로 합니다. 침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 즉 인류의 구주에게 항상 경의를 표함으로써 참된 겸손의 완벽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따라야 할 모범”, 리아호나, 2002년 11월호, 60쪽) 요한복음 3장 29절에 기록된 대로, “신랑”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친구”는 침례 요한을 나타낸다. 침례 요한의 겸손과 이타심은 다음과 같은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메시야]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한복음 3:30)

요한은 구주에 대한 강한 간증을 전했으며,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에서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영을 저울에 달아서 그에게 주신 것이 아니나니, 이는 영이 그에게 거함이라, 참으로 충만히 거함이더라.”(Joseph Smith Translation, John 3:34)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에게 당신의 영을 약간만 주신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주셨다.

요한복음 4:1~42. 야곱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예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가르치신 내용을(요한복음 4:1~42 참조) 더 잘 이해하려면, “신약전서의 배경” 아래에 나오는 사마리아 부분과 요한복음 4:19~24 주해를 참조한다.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박해가 커졌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고, 여정 중에 사마리아를 지나시면서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셨다. 예수께서는 지치고 갈증이 나서, 정오에 해당하는 “여섯 시쯤”에(요한복음 4:6)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셨다. 여인들은 일상적으로 아침과 늦은 오후에 물을 긷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마을 우물가에 모여들었다. 우물가에 가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사마리아 여인은 아마도 자신을 죄인이라고 멀리하는 마을 여인들을 피해 그 시간에 왔을 것이다.(요한복음 4:16~18 참조) 예수께서는 대화를 통해 자신이 메시야임을 그녀에게 가르치셨지만, 전례에 따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접촉하지 않았고 랍비들은 보통으로 결혼하지 않은 여인들과는 말을 섞지 않았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요한복음 4:27),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을 버림받은 자로 여기지 않으셨다.

그 여인은 구주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점차 그분이 메시야라는 그녀의 간증은 확고해졌다. 그녀의 간증이 발전해 가는 과정은 그녀가 예수님을 부른 칭호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녀는 예수님을 “유대인”에서(9절) 시작하여 “주”(11, 15절), “선지자”(19절),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라고(29절) 칭했다. 그녀의 경험에서 볼 때, 예수님의 존재는 그분의 말씀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려는 사람들에게는 개심시키는 힘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야곱의 우물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아버지인 야곱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밧단아람에서 라반 아래에서 품꾼으로 일하고 돌아온 후 정착한 땅에 있었다.(창세기 33:18 참조) 야곱은 이 땅을 아들 요셉에게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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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라 그리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마시라 그리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리즈 레먼 스윈들

요한복음 4:10~14. 구주께서 생수를 주시다

구주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생수”를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4:10, 14) “생수”라는 말은 경전 곳곳에서 구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예레미야 2:13; 스가랴 14:8; 요한계시록 21:6; 22:1; 앨마서 42:27; 교리와 성약 63:23 참조)

조셉 비 워스린 장로는 구주께서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하신 말씀을 인용한 후, “생수를 가득 마시”면 커다란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상한 마음을 치유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필멸의 삶 이후에도 지속되는 관계로 결속시키고, 사람들의 삶에 최상의 기쁨을 안겨 줄 수 있습니다. …

풍성한 삶은 영적인 삶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잔칫상에 앉아서 그들 앞에 놓인 풍요로운 복음에 입만 대고 맙니다. 그들은 옳은 일을 하되 참다운 사랑, 목적, 또는 소망이 없이 건성으로 하며 모임에 참석하고, 경전을 보고, 가족 기도를 반복하되 그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들이 정직한 사람이라면 성신의 고매한 기사와 달콤한 성역을 담은 내용보다는 최근 이웃의 소문이나 증권 시장 동향, 좋아하는 TV 쇼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수를 마시고 여러분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는 것을 경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마시고 온 마음을 다해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키우십시오. 진지한 기도로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그분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여러분의 연약함을 버리십시오. 거룩함으로 행하시고 계명에 따르십시오.”(“풍성한 삷”, 리아호나, 2006년 5월호, 100쪽) “생수”에 관한 통찰을 더 얻으려면, 요한복음 7:37~39 주해를 참조한다.

요한복음 4:19~24.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함

주전 6세기가 끝나갈 무렵,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돕겠다는 사마리아인들의 제의를 거절했다.(에스라 4:1~10 참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리아의 이방인 총독 산발랏의 딸과 결혼했던 예루살렘 출신의 제사장 므낫세가 신권 직분에서 해임되었다. 이에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필적할 만한 성전을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에 지었다. 이 산이 바로 우물가의 여인이 언급한 산이었다.(Bible Dictionary, “Gerizim and Ebal” 참조) 주전 2세기 후반에 하스몬 가문(유대인)이 셀레우코스 왕조에 반란을 일으키는 동안,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의 반란에 협조하기를 거부했다. 하스몬 가문의 지도자 요한 히르카누스는 아마도 자신들을 돕지 않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리심 산에 있는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했으며, 결국 그 성전은 재건되지 못했다. 이 성전의 파괴는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쌓여 있던 원한을 한층 더 키웠다.

그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참으로 선지자임을 깨닫게 되자 자신이 어떻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를 알고자 했다. 사마리아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영받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서 예배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요한복음 4:19~20 참조) 구주께서는 그녀에게 참된 예배는 특정 장소에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그보다는 예배 대상에 관한 진리를 알고 참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이 중요함을 가르치셨다. 기도, 찬송, 경전 공부가 우리가 흔히 하는 예배 방법이기는 하지만,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참된 예배가 참 하나님을 알고 구주의 삶을 본받는 데 있음을 깨닫도록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성령의 능력과 그분이 정하신 방법으로 이러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을 승인된 방법으로 경배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영원한 진리에 근거를 두지 않는 거짓 신을 섬긴다면 그러한 확신을 얻지 못합니다.

참된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진실된 마음으로 경배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

참되고 완전한 경배란 하나님 아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버지 안에서 영광을 누리시는 것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누릴 수 있을 때까지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아버지의 뜻을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나 설교나 찬송보다도 훨씬 더 낫습니다. 그것은 살면서 실천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대하신 분의 삶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어떻게 경배할 것인가”, 성도의 벗, 1972년 10월호, 32~33쪽)

요한복음 4:20~24.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듯 보였던 한 가지 이유는 그녀의 백성이 믿는 종교에서는 참되지 않은 것들을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이에 응하여, 위대한 교사인 구주께서는 그녀가 조상보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주의를 돌리고 그분께 충실하도록 가르침을 주셨다. 제일회장단의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장은 모든 종교와 가족의 유산은 크나큰 가치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우선해서 충성해야 할 대상은 지상의 아버지보다는 우리 영의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며 이렇게 가르쳤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부모, 조부모 그리고 증조부모의 종교입니까?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신앙은 창세 이래로, 심지어는 창세 이전부터 똑같았습니다. 계시자 요한은 천국에서 있었던 전쟁에 대해 설명했습니다.[요한계시록 12:7~9 참조] 전쟁의 쟁점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선택의지였습니다. 지금까지 이 지상에 살았던 사람들은 사탄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아들과 아버지께 충실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저는 회복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교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신앙이라는 것을 간증합니다. …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배경, 문화, 혹은 전통에 상관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십니다. 참된 종교는 사람이나 조상의 전통을 기쁘게 하는 데서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을 드리는 것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우리 선조의 신앙”,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75쪽)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일 뿐이신가[Is God a Spirit]?

요한복음 4장 24절에 대한 그리스어 원문에는 이라는 단어 앞에 관사[a]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어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다[God is spirit]” 또는 “하나님은 영적이시다[God is spiritual]”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또한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1서 1:5),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요한1서 4:8) 기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하나님이 실제 빛이라거나 그분은 사랑이실 뿐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영이니라”라는 말은(교리와 성약 93:33) 사람이 단지 영일 뿐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요한복음 4장 24절은 하나님이 단지 영이라는 의미로 기록된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후기에 주어진 계시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사람의 것과 같은 만져 볼 수 있는 살과 뼈의 몸을 가지셨으며, 아들도 그러하시니라. 그러나 성신은 살과 뼈의 몸을 가지지 아니하셨고 다만 영의 인격체시니라.”(교리와 성약 130:22)

참된 예배에 대한 구주의 가르침에서 살펴볼 때,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보다는 예배의 본질에 대한 해설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시므로, 사람들은 단순히 특정한 장소에서 외적으로 보이는 의식을 행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요한복음 4:20~21 참조), “영과 진리로”(요한복음 4:24)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을 보면, 구주께서 가르치신 것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약속하셨음이니 그를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느니라.”(조셉 스미스 역, 요한복음 4:26[경전 안내서])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 성구를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거짓 신을 섬기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금송아지라든가, 또는 그분은 실체가 없으며 만물 안에 존재하는, 자존하는 힘이라고 진정으로 믿는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존재 또는 개념을 경배한다고 해서 구원의 권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온 마음을 다해 어떤 형상이나 힘이나 율법이 하나님이라고 믿을 수는 있겠지만, 이런 개념에 아무리 헌신하더라도 불멸과 영생으로 이끄는 힘을 주지는 못합니다. …

그러나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진실된 마음으로 경배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죽은 자를 살리고, 산을 옮기며, 천사의 방문을 받고, 해의 왕국의 거리를 걷게 될 권능을 받게 될 것입니다.”(“어떻게 경배할 것인가”, 성도의 벗, 1972년 10월호, 32~33쪽)

요한복음 4:25~26. 예수께서 자신을 메시야로 선언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증언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린, 복음서 상의 첫 번째 사례이다. 예수께서는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라고 밝히셨다.(요한복음 4:26) 그리스어 원문에는 대명사 “그”가 나오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저 단순하게 “I Am[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I Am”이라고 표현하심으로써 자신이 여호와임을 알리셨다. “I Am”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더 알고자 한다면, 요한복음 8:53~58 주해를 참조한다.

요한복음 4:28~42. 사람들이 세상의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알도록 도움

구주께서 주신 “생수”의 맛을 보게 된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 두고”(요한복음 4:28)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그분이 주시는 “생수”를 함께 마시자고 권했다. 그 여인이 전한 간증을 통해,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었다.]”(요한복음 4:39) 그들은 구주를 보고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서, 그분에 대한 간증이 깊어졌다.(요한복음 4:41~42 참조) 조셉 비 워스린 장로는 우리 또한 주변 사람들이 복음의 생수를 찾도록 도와야 한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호기심에 찬 사마리아인들 한 무리가 자신을 메시야라고 선언한 분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와서 … 그들의 호기심은 간증으로 무르익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요한복음 4:42]

이 후기는 영적으로 몹시 갈증을 겪고 있는 시대입니다. 세상의 많은 이들이 인생의 의미와 방향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켜 줄 활력의 근원을 때로는 열렬하게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목마른 영혼들을 달래 줄 통찰력과 지식의 시원하고 만족스러운 물을 열망합니다. 그들의 영은 시든 마음에 원기를 북돋워 주는 평안과 안정을 갈망합니다.

… 우리 모두 온 마음과 정성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우리의 목마른 형제, 자매들이 어디에서 복음의 생수를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어 그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교리와 성약 63:23]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러 올 수 있게 합시다. …

야곱의 우물에서처럼, 오늘날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이는 세상을 그토록 괴롭히는 가뭄, 즉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가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해 줄 것입니다.”(“영적인 갈증을 해소해 주는 생수”, 성도의 벗, 1995년 7월호, 18~19쪽)

요한복음 4:46~54.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하는 능력은 지리적 근접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가나에서 구주께 다가온 왕의 신하의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요한복음 4:46~54 참조) 이 왕의 신하는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구주에 대한 커다란 신앙을 나타내 보였다. 첫째, 자신의 집이 있는 가버나움은 가나에서 약 32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구주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분을 찾아 나섰다. 둘째, 구주께서 아들이 살게 될 것이라고 안심시키시자 그는 구주의 말씀을 믿고 “[갔다.]”(요한복음 4:50)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기록했다. “예수께서는 가나에 계셨지만 그분이 명령하시자 약 32킬로미터 떨어진, 가버나움에 있던 왕의 신하의 아들이 치유되었다. 병자들은 지리적 위치와는 상관없이 신앙의 힘으로 고침을 받는다. 하나님은 우주의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능력은 어디에서나 나타난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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