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제54장: 교리와 성약 134~136편


“제54장: 교리와 성약 134~136편”, 교리와 성약 학생 교재(2017)

“제54장”, 교리와 성약 학생 교재

제54장

교리와 성약 134~136편

소개 및 연대

1835년 8월 17일에 오하이오주 커틀랜드의 교회 회원들은 곧 있을 교리와 성약의 출판을 승인하기 위해 특별 모임을 개최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미시간 준주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하고 있었으므로, 이 모임은 올리버 카우드리가 감리했다. 모임 동안에 교회 회원들은 “정부 및 일반 법률에 관한 신조의 선언문”을 교리와 성약에 포함해야 하는지를 표결에 부쳤다.(교리와 성약 134편, 머리말) 이 선언문은 교리와 성약 134편에 기록되어 있다.

1844년 6월 27일에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그의 형이자 교회 회장 보조 겸 축복사였던 하이럼이 일리노이주 카테지에서 순교했다. 순교 발표문은 1844년판 교리와 성약에 실렸으며, 이는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인 존 테일러 장로와 윌라드 리차즈 장로가 목격한 내용을 근거로 하였다. 이 발표문은 교리와 성약 135편에 기록되어 있다.

1846년 2월에 교회 회원들은 일리노이주 나부를 떠나 아이오와 준주를 횡단하여 서부를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1847년 1월에 브리검 영 회장은 네브래스카주 윈터쿼터스에서 교리와 성약 136편에 기록된 계시를 받았다. 주님께서는 이 계시에서 성도들에게 자신을 조직하고 서부로의 여행을 준비하라고 권고하셨다.

1835년 8월 17일오하이오주 커틀랜드의 교회 회원들이 교리와 성약 134편을 교리와 성약에 포함하는 것을 승인했다.

1844년 6월 27일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하이럼 스미스가 일리노이주 카테지의 카테지 감옥에서 순교했다.

1844년 7~8월교리와 성약 135편을 기록했다.

1846년 2월 4일성도들의 첫 번째 부대가 일리노이주 나부를 떠나 서부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1846년 6월브리검 영이 이끄는 성도들의 부대가 아이오와주 케인스빌과 네브래스카주 윈터쿼터스를 비롯한 다른 정착촌들이 세워졌던 미주리강에 도착했다.

1847년 1월 14일교리와 성약 136편을 받았다.

1847년 7월 24일브리검 영의 개척자 부대가 솔트레이크 밸리에 도착했다.

교리와 성약 134편: 역사적 배경 추가 자료

1833년 말에 교회 회원들이 불법적으로 미주리주 잭슨군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난 후에 교회 지도자들은 주 정부와 연방 정부 관료들에게 성도들의 시민권을 보호하고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으나, 도움을 구하는 교회의 청원은 거듭해서 기각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 회원들이 “미주리와 다른 곳에서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며 잔인한 적에 의해 비난을 받고” 있었으며 “국가의 법률에 반하는 율법을 제정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었다.(Joseph Fielding Smith, Church History and Modern Revelation [1953], 2:30–31)

1833년 7월에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발생한 폭도들의 폭력 사태 때문에 계명의 책 인쇄본 중 아주 적은 양만이 남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받았던 계시들을 담은 새로운 책을 출판하기 위한 준비가 1835년에 오하이오주 커틀랜드에서 이루어졌다. 1835년 8월 17일에 교회 회원들은 출판을 앞둔 교리와 성약 초판본을 승인하기 위해 일반 총회에 모였다. 그 모임 동안에 올리버 카우드리는 “정부 및 일반 법률에 관한 신조의 선언문”이라는 명칭의 추가 문서를 낭독했다.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그 문서를 교리와 성약에 포함하는 것을 승인했으며, 그 문서는 현재는 교리와 성약 133편인 1835년판의 부록 뒤에 추가되었다. 이 문서는 현재 교리와 성약 134편에 기록되었다. 이것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주어진 계시는 아니지만 윌리엄 더블유 펠프스의 도움을 받아 올리버 카우드리가 준비한 것으로 추정되며, 정부 및 법률에 관한 교회 회원들의 믿음을 명확히 밝히는 선언문이다. (See The Joseph Smith Papers, Documents, Volume 4: April 1834–September 1835, ed. Matthew C. Godfrey and others [2016], 479–82.)

교리와 성약 134편

정부와 시민의 책임이 약술되다

교리와 성약 134:1~3. “양심의 자유로운 행사”

1833년에 미주리에서 경험한 박해와 정부 지도자들에게서 도움을 얻지 못한 일로 성도들은 정부가 “양심의 자유로운 행사, 재산의 소유권과 사용권 및 생명의 보호”를 포함한 시민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다.(교리와 성약 134:2) 시민들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도록 허용하는 법률은 종교적 자유를 보호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정부가 “양심의 자유로운 행사”와 시민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호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고 가르쳤다.(교리와 성약 134:2)

“오늘날에는 정치, 분쟁 해결, 경제 발전, 인도주의적 구호 등의 분야에서 종교의 중요성이 그 당시보다 훨씬 커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종교를 이해하고, 종교와 범세계적인 문제 간의 관계 및 종교와 정부 간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

결과적으로 정부는 시민을 위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합니다. 유엔의 영향력 있는 세계 인권 선언 제18조에 명시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는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가 있습니다. 이 권리에는 자신의 종교나 신념을 바꿀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되며, 가르침, 의식 및 예배를 진행할 때 단독으로나 공동으로, 또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자신의 종교나 신념을 표방할 수 있는 자유 또한 포함됩니다.’[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한 세계 인권 선언, un.org]”(“세상에 대한 종교의 사명”, 리아호나, 2017년 6월, 28쪽)

교리와 성약 134:4, 7.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자유로이 행사함”

1842년에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양심의 지시에 따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할 특권이 있음을 주장하며, 또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어떻게, 어디에서, 혹은 무엇이라도 예배할 수 있는 똑같은 특권을 허용한다.”라고 언급하는 신앙개조 제11조를 적었을 때, 그것은 교리와 성약 134편이 설명하는 종교적 자유의 원리를 강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종교적 자유는 모든 종교 관행이 법률로 보호되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리와 성약 134편 4절에 따르면 시민들은 “그들의 종교적 의견이 그들로 하여금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게 하지 않는 한”에서 종교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 재산, 건강 또는 타인의 안전과 같은 강력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종교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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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가나의 가족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양심의 지시에 따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할 특권이 있음을 주장하며, 또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어떻게, 어디에서, 혹은 무엇이라도 예배할 수 있는 똑같은 특권을 허용한다.”(신앙개조 제11조)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종교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하여 다음 성명을 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모든 사람이 양심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하나의 올바른 원리로 간주하며, 이 원리의 참뜻을 모든 개인이 적절히 숙고해야 마땅하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하늘이 가장 값진 은사의 하나로 인류에게 부여한,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을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해도, 우리는 전혀 그럴 의사가 없습니다.

저는 모든 종파, 당파, 교파에 대해 가장 관대한 느낌과 자애의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양심의 자유와 권리를 가장 성스럽고 소중하게 여기며, 저와 견해가 다른 어떤 사람도 경멸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제가 형제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증언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 사람의 ‘몰몬’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면, 저는 당당히 하늘 앞에서 장로교나 침례교나 그 외 다른 종파의 선한 사람을 위해서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외칠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기 성도들의 권리를 짓밟는 논리는 로마 가톨릭교의 원리,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스스로 방어하기에는 너무 약한 다른 종파의 권리도 짓밟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 모든 인류의 사회적 자유와 종교적인 자유에 대한 사랑은 제 영혼을 고취시켜 줍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 [2007], 345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우리가 모두 증진하고 지지하려 애써야 하는 종교적 자유의 기본 원리를 이렇게 가르쳤다.

“후기 성도들이 의지하고 수호해야 할 종교적 자유의 네 가지 초석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믿음의 자유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믿는 것으로 개인이나 정부로부터 비난을 듣거나 박해받거나 공격당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자유는 매우 개인적이며 정말 중요합니다. …

종교적 자유의 두 번째 초석은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자유입니다. … 부모, 전임 선교사, 회원 선교사로서 주님의 교리를 우리의 가정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 가르치기 위해 우리는 종교적 자유가 필요합니다.

종교적 자유의 세 번째 초석은 종교적 조직, 즉 교회를 구성하고 다른 사람과 평화롭게 예배할 자유입니다. 국제 인권 문서와 많은 나라 헌법이 이 원리를 뒷받침합니다.

종교적 자유의 네 번째 초석은 우리의 신앙대로 생활할 자유, 즉 가정이나 예배당뿐 아니라 공공장소에서도 자유롭게 신앙을 행사할 자유입니다.”(“선택의지를 보호하고 종교적 자유를 수호하십시오”, 리아호나, 2015년 5월호, 112쪽)

교리와 성약 134:5~6. “모든 인간이 …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 있는 자신의 정부를 지지하고 받들 책임이 있으며”

후기 성도들은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 있는 자신의 정부를 지지하고 받들”어야 한다고 믿는다.(교리와 성약 134:5)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우리는 왕, 대통령, 통치자, 장관에게 복종할 것과, 법률을 순종하고 존중하며 지지할 것을 믿는다.”라는 신앙개조 제12조를 기록하면서 이 원리를 요약했다. 교회 회원들은 자국의 법률에 순종하고 타인들이 그 법률에 순종하도록 권유하며, 지역 사회에서 봉사하고, 정부 관료들을 존중하며, 투표에 참여할 때 이 원리대로 살게 된다.

때때로 국가의 법률이 교회 회원들의 믿음과 상충하는 경우가 있다.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법조계 및 종교계 지도자들이 참석한 대회에서 이런 딜레마에 빠졌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이렇게 가르쳤다.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신성한 율법을 공경하며, 그들 대부분이 민법 또한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태복음 22:21) 이런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가능한 한 체계의 법률에 모두 순종해야 합니다. 두 체계가 명백히 상충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 그 갈등을 조화롭게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실제로 갈등을 조정할 수 없다면 유사한 생각을 지닌 타인들과 힘을 모아 민법이 신성한 율법을 수용할 수 있도록 개정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한 체계를 위하여 다른 체계를 무시하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주 드문 상황일지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동료 신자들께 제도적 또는 개인적인 종교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모든 법률 및 정부 조치를 무효로 하기 위해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린 바와 같이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는 종교적 신념과 소속을 선택할 권리와 그 신념을 행사하거나 실천할 권리 모두를 분명히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양한 종교적 신념을 지닌 시민들로 구성된 한 나라에서 공공의 보건과 안전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종교적 원리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정부의 책임입니다.”(“The Boundary Between Church and State” [address at the Second Annual Sacramento Court/Clergy Conference, Oct. 20, 2015], mormonnewsroom.org)

교리와 성약 134:12. “우리는 … 노예에게 간섭하[는] … 일은 정당하다고 믿지 아니한다”

1821년에 미주리주는 노예주로서 미합중국에 가담했는데, 이는 노예 제도가 그곳에서는 합법적이라는 의미였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쿠엔틴 엘 쿡 장로는 종교적 자유에 관한 대회에서 연설하면서, 미주리 성도들이 박해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1833년에 미주리에 있던 후기 성도들이 표방하는 가치 때문에 성도들과 교회에 속하지 않은 미주리 정착민들 사이에 마찰이 생겼습니다. 많은 미주리 주민들은 미 원주민들을 냉혹한 적으로 여겼고, 그 땅에서 몰아내려 했습니다. 더욱이 미주리주 정착민 대부분은 노예 소유주였기에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협으로 여겼습니다. …

이와 반대로 우리의 교리는 미 원주민을 존중했으며,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고자 열망했습니다. 노예 제도와 관련해서도, 우리의 경전은 그 누구도 다른 이에게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초기에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흑인 회원들이 백인 회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 다른 미주리 정착민들은 상당수의 후기 성도들이 주님의 계시에 따라 미주리로 이주해 오자 이를 위협으로 여겼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은 심각한 갈등을 초래했으며 교회 회원들이 박해받는 원인이 되었습니다.”(“Accountability to God: Religious Freedom and Fairness” [address at the Seymour Institute Seminar on Religious Freedom, July 26, 2017], mormonnewsroom.org)

미주리 정착민 일부는 후기 성도가 출판하는 The Evening and the Morning Star[더 이브닝 앤드 더 모닝 스타]의 사설이 노예가 아닌 흑인들이 미주리주로 이주하는 것을 옹호한다고 믿었기에 분개했다.(see Manuscript History of the Church, vol. A-1, pages 332–33, josephsmithpapers.org) 미주리 성도들이 가혹한 박해로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올리버 카우드리는 그런 비난으로부터 교회를 옹호하기 위해 “우리는 … 노예에게 간섭하[는] … 일은 정당하다고 믿지 아니한다”라는 내용을 기록했을 수도 있다.(교리와 성약 134:12) 그의 성명서는 교회가 “주인의 뜻이나 희망에 반하여” 노예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거나 침례를 베푸는 일”을 하려는 목적으로, 확립된 법률을 위반하는 것을 옹호하지 않음을 명확히 밝혔다.(교리와 성약 134:12)

“교회는 미국 내 인종 차별이 극심한 시기였던 1830년에 세워졌다. 당시 아프리카계 사람들은 대부분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인종 차별과 편견은 미국 백인 사이에서 그저 흔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관례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생소하고 충격적이지만, 이러한 사실은 종교를 포함하여 사람들의 일상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쳤다. 한 예로, 그 시대의 기독교 교회는 인종에 따라 분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후기 성도 교회에서는 애초부터 인종과 민족의 구분 없이 누구나 침례를 받고 회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교회의 설립자인 조셉 스미스는 생을 마칠 무렵에 노예 제도를 공개적으로 반대했다.”(“인종과 신권”, 복음 주제, topics.lds.org)

교리와 성약 135편: 역사적 배경 추가 자료

1844년 초반에 일리노이주 나부에서 한 무리의 배도자들이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타락한 선지자라고 선언하며 대척점에 서 있는 교회를 세우려고 시도했다. 그중 일부는 비밀 회합까지 열었으며, 그 모임에서 선지자를 살해하려는 음모도 꾸몄다. (See Glen L. Leonard, Nauvoo: A Place of Peace, a People of Promise [2002], 357–62.) 1844년 6월 7일에 이 배교자들은 나부 익스포지터[Nauvoo Expositor]라고 명명한 첫 번째이자 마지막 호가 될 신문을 인쇄해서 배포했다. 그 신문은 나부 시장으로 봉사하던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지도력을 맹비난했으며, 그가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고, 정치적 권한과 종교적 권한을 남용하며, 은밀하게 복수 결혼을 시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 신문은 나부 헌장의 폐지를 요구했다. (See Leonard, Nauvoo, 362–64.) 1844년 6월 10일에 개최된 나부시 의회에서 “의회는 나부 익스포지터[Nauvoo Expositor]를 사회적 혼란으로 선언하는 조례를 통과시켰으며, [조셉 스미스]에게 언급된 그 혼란을 [중단] 시키라는 명령도 내렸다.” 그 모임에서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그들의 행위와 그들이 발행한 신문은 도시의 평화를 해칠 의도가 있으며, 폭도들의 군중 심리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러한 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 신문이 “사람들의 폭력적인 성향을 자극하여 우리를 죽음과 파괴로 몰아넣고 있습니다.”라고 언급했다. (Manuscript History of the Church, vol. F-1, pages 74, 77–7880, josephsmithpaper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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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 익스포지터[Nauvoo Expositor]

1844년 6월 7일 자 나부 익스포지터[Nauvoo Expositor] 신문의 1면은 일리노이주 나부에서 교회에 대항하는 반몰몬들의 감정을 격앙시킬 목적으로 인쇄되었다.

나부시 의회는 시 경찰서장에게 인쇄기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결과적으로 나부 익스포지터[Nauvoo Expositor]의 소유주들은 조셉 스미스와 나부시 관계자들에게 폭동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들을 고소했다. 선지자에 대항하는 적들의 비난에 고무되어 와샤와 카테지 인근 지역 사회 시민들은 조셉 스미스와 관련자들이 당국에 항복하지 않으면 무력으로라도 모든 후기 성도를 일리노이주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연설하고, 신문에 기고했다. 나부시 시장으로서 조셉 스미스는 공격의 가능성으로부터 시의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선지자는 또한 주 당국에 법적인 분쟁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청원했다. 일리노이주 내에서 긴장감이 고조되어 가는 와중에 주지사인 토마스 포드는 조셉 스미스와 나부시 관계자들에게 폭동 혐의에 대한 재판을 위해 일리노이주 카테지로 가라고 명령했다. 나부가 공격당할 위협을 받고 있었지만 포드 주지사가 안전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을 했기 때문에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하이럼 스미스와 나부시 관계자들은 카테지로 갔다. 청문회 후에 조셉과 다른 피고인들은 보석을 신청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선지자의 적들은 조셉이 나부에서 계엄령을 선포한 것을 이유로 조셉과 하이럼 스미스를 반역죄로 고소했다. 반역죄를 저지른 사람은 보석을 신청할 수 없었기에 조셉과 하이럼은 재판 때까지 감옥에 머물러야만 했다. 선지자와 그의 형은 머물고 있던 해밀턴 호텔에서 끌려 나와 카테지 감옥에 구금되어 재판을 기다리게 되었다. (See Leonard, Nauvoo, 365–72, 376, 381,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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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지 감옥의 외관, 일리노이주 카테지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그의 형 하이럼 스미스가 1844년 6월 27일에 순교당한 카테지 감옥

1844년 6월 27일 오후에 적의에 찬 폭도들이 수감자들이 머물고 있던 카테지 감옥 2층의 간수실을 공격해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하이럼 스미스를 살해했다. 선지자와 그의 형과 함께 그 방에 있었던 다른 두 사람은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이었던 존 테일러 장로와 윌라드 리차즈 장로였다. 존 테일러는 심하게 부상당했으나 윌라드 리차즈는 아무런 부상 없이 탈출했다.

1844년 7월과 8월에 존 테일러 장로와 윌라드 리차즈 장로가 목격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순교에 관한 서면 발표문이 준비되었다. 교회는 이 발표문과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바치는 헌사를 1844년판 교리와 성약의 끝부분에 포함시켰다. 포함시켰다.(Jeffrey Mahas, “순교를 기리며”, 계시를 받은 배경, history.lds.org.) 그 발표문은 현재 교리와 성약 135편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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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8: 미국 미주리주, 일리노이주 및 아이오와주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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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0: 일리노이주 나부, 1839~1846년

교리와 성약 135편

교회가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하이럼 스미스의 순교를 발표하다

교리와 성약 135:1~3. “[조셉은] 자기의 사명과 일을 자신의 피로 인봉하였고, 그의 형 하이럼도 그러하였느니라”

많은 고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성취하는 동안 박해받고 죽임을 당했다.(사도행전 7:54~60, 니파이전서 1:19~20, 모사이야서 17:9~13, 앨마서 33:14~17, 힐라맨서 8:17~19 참조) 이처럼 선지자 조셉 스미스 또한 비난과 박해를 받았으며 결국 죽임을 당하여 “자기의 사명과 일을 자신의 피로 인봉”했다.(교리와 성약 135:3) 브리검 영 회장에게 주어진 계시에서 주님께서는 “[조셉 스미스]가 자기의 피로 자기의 간증을 인봉할 필요가 있었나니, 이는 그가 존귀하게 되고 악인은 정죄받게 하려 함이었느니라”라고 확인해 주셨다.(교리와 성약 136:39)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조셉 스미스는 자신의 간증을 피로써 인봉하였습니다. 선지자의 순교는 교리와 성약과 몰몬경이 진실하다는 간증을 인봉하기 위하여 또한 이 경륜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거룩히 증거하기 위하여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교리와 성약 135:1 참조)”(“개인적인 간증을 얻는 것의 중요성”, 성도의 벗, 1995년 1월호, 21쪽)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자신의 피로 자신의 간증을 인봉한 것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찾으려면, 이 장에서 교리와 성약 136편 39절 주해를 참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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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지 감옥의 내부, 일리노이주 카테지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그의 형 하이럼이 살해당한 카테지 감옥 위층의 간수 침실. 존 테일러와 윌라드 리차즈는 그 공격에서 살아남았다.

교리와 성약 135:3. “주의 선지자요 선견자인 조셉 스미스는 이 세상에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다만 예수를 제외하고 세상에 살았던 어떠한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수행하였도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복음의 회복을 돕기 위해 하나님께 부름받은 필멸의 인간이었다.(교리와 성약 1:17~23; 136:37~39 참조)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부름받은 조셉 스미스는 “이 세상에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다만 예수를 제외하고 세상에 살았던 어떠한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수행하였[다].”(교리와 성약 135:3) 오늘날의 교회 회원들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업적 덕분에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 있다.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이런 축복을 언급하면서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 관해 이렇게 간증했다. “38년 반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비길 데 없는 많은 지식과 은사와 교리가 그를 통해 왔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것과 비교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관적으로는, 그것은 온 세상에 있는 수백만의 후기 성도들의 개인적인 간증의 요지입니다.”(“하나님이 계시하신 위대한 것들”, 리아호나, 2005년 5월호, 83쪽)

조셉 에프 스미스(1838~1918) 회장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성역이 이 지상에 살았거나 살게 될 시기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미친 영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조셉 스미스가 종사한 사업은 이 세상의 일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앞으로 다가올 삶에까지 관계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지금까지 지상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 또한 우리 다음에 올 사람들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상에서 육신을 입은 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영원에 이르는 전 인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에프 스미스 [1998], 13쪽)

스스로 조셉 스미스가 하나님의 선지자였는지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이 진리에 대한 영적인 증거를 받을 수 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엘 앤더슨 장로는 교회 회원 각자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증거를 얻으려 힘써야 한다고 가르쳤다.

“조셉 스미스는 회복의 선지자입니다. 그의 영적인 사업은 아버지와 아들이 나타나심으로써 시작되었으며, 하늘 천사의 방문이 수없이 뒤따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가 되어 성스러운 경전과 잃어버렸던 교리와 신권을 회복했습니다. 조셉이 한 일의 중요성을 알려면 지적인 노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조셉처럼 ‘하나님께 구[해야만]’ 합니다.[야고보서 1:5; 또한 조셉 스미스—역사 1:11~13 참조] 영적인 질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대답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

믿는 사람은 저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신성한 사명과 성품에 대한 영적인 확인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모든 세대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 대한 간증은 우리 각자 다른 경로로 올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가 참된 선지자였음을 확인하려고 하나님께 구할 때 올 수도 있습니다. 첫번째 시현에 대한 조셉의 기사를 읽을 때 올 수도 있습니다. 몰몬경을 반복해서 읽을 때 여러분의 영혼에 간증이 스며들 수 있습니다. 조셉에 대해 간증을 전하거나 성전에 가서 조셉 스미스를 통해 거룩한 인봉 권능이 지상에 회복되었음을 깨닫게 됨으로써 올 수도 있습니다. 신앙과 진정한 의도가 있다면,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 대한 여러분의 간증은 커질 것입니다. …

오늘 이 말씀을 듣거나 향후에 이 말씀을 읽게 될 청소년들에게 구체적인 도전 목표를 드리겠습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 대한 개인적인 증거를 얻으십시오.”(“조셉 스미스”, 리아호나, 2014년 11월호, 28~30쪽)

교리와 성약 135:4~5. “나는 하나님께 대해서나 모든 사람에 대해서 양심에 아무 거리낌이 없도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그의 형 하이럼은 일리노이주 카테지로 가기 위해 나부에 있던 그들의 보금자리를 떠나려고 준비하면서 그들에게 임박한 죽음을 감지했다. 선지자는 당시 그의 느낌을 이사야가 표현한 메시야의 모습을 들어 “나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가노라”라고 설명했다.(교리와 성약 135:4; 또한 이사야 53:7 참조)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려는 음모를 계획한 적들의 가시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름 아침처럼 고요하도다. 나는 하나님께 대해서나 모든 사람에 대해서 양심에 아무 거리낌이 없도다.”(교리와 성약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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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 스미스, 루시 맥 스미스, 마리 필딩 스미스의 초상

일리노이주 카테지로 가기 전에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조셉과 하이럼 스미스.

살해당한 날 아침에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카테지 감옥에서 아내 에머에게 급하게 다음 편지를 썼다. “나는 내게 죄가 없음을 알고 내가 최선을 다했음을 알기에 운명에 따르고자 하오. 아이들과 모든 친구에게 사랑을 전해 주오.  …  반역에 대해서는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을 것이오.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해가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소. 하나님께서 모두를 축복해 주시기 바라오. 아멘.”(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 5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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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션 하우스, 일리노이주 나부

조셉과 에머는 1843년 8월에 일리노이주 나부에 있는 맨션 하우스로 이사했다.

그 이전인 1844년 6월 18일에 나부에서 전한 말씀에서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저 자신의 목숨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백성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들이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겨우 육신을 죽일 뿐이며 그것이 그들 능력의 한계입니다. 친구 여러분, 굳건히 서고, 결코 겁내어 피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진리를 위해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는 영생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견디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부활하여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며, 해의 왕국에서 통치권과 영원한 주권으로 다스릴 것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 5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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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가 접혀 있는 하이럼 스미스의 몰몬경

한때 하이럼 스미스가 소유했던 몰몬경. 이 페이지는 하이럼이 자신의 동생 조셉과 함께 카테지로 떠나던 날에 접어 놓은 것이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그의 동료들이 나부를 떠나 카테지 감옥으로 갔던 1844년 6월 24일 아침에 “하이럼이 갈 준비를 마친 후에 … 그는 몰몬경 이더서 12장 끝단 부분의 [모로나이의 작별 인사를] 읽고 그 쪽을 접어 두었[다].”(교리와 성약 135:4; 또한 이더서 12:36~38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그날 아침에 발생했던 사건들을 언급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이후 실제로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선지자 조셉은 자신을 붙잡아 둔 간수들에게 몰몬경에 대한 신성한 진실을 강하게 간증했습니다.[see History of the Church, 6:600] 그런 뒤 얼마 있지 않아서 권총과 총알이 이 두 증인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몰몬경의 신성함에 대해 간증을 갖게 해 준 수천 가지 요소 중 하나로서, 그 진실성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로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이 절박한 마지막 순간에 두 사람이 사실적 기반 없이 허구로 만든 책(또한 함축적으로 교회와 성역)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숨, 명예, 그리고 영원한 구원을 추구하는 불경을 하나님 앞에 저질렀겠습니까?

… 만약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과연 이 두 사람이 영원한 재판관의 면전으로 가게 되는 이 죽음의 순간에, 그 책을 인용하고 거기서 위안을 찾으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사기꾼과 협잡꾼의 누명을 썼겠습니까? 물론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몰몬경의 신성한 기원과 영원한 진실성을 부인하기보다는 기꺼이 죽고자 했습니다.”(“영혼의 안전”, 리아호나, 2009년 11월호, 89쪽)

교리와 성약 135:3, 6. “살아 있을 때 두 사람은 갈라져 있지 아니하였고 죽을 때도 그들은 헤어져 있지 아니하였도다”

하이럼 스미스는 선지자가 가장 신뢰하는 형이었던 동시에 조셉 스미스에게 가장 헌신적인 친구들과 추종자들 중 한 명이었다. 히버 제이 그랜트(1856~1945) 회장은 하이럼이 그의 동생에게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위한 하이럼 스미스의 삶보다 더 훌륭한 형의 사랑을 보여 주는 예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 그들은 필멸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단합과 애정으로 서로 사랑했습니다. 하이럼 스미스의 마음속에는 추호의 질투심도 없었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하이럼 스미스보다 더욱 충직하고, 더욱 진실하고, 더욱 충실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Hyrum Smith and His Distinguished Posterity,” Improvement Era, Aug. 1918, 8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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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타고 있는 조셉과 하이럼 스미스 조각상

카테지로 가기 위해 나부를 떠나면서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그의 형 하이럼 스미스는 성전 근처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하늘 아래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곳이며 그들은 최고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앞으로 닥칠 시련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Manuscript History of the Church, vol. F-1, page 151, josephsmithpapers.org)

교리와 성약 136편: 역사적 배경 추가 자료

1844년 이후부터 교회 지도자들은 적극적으로 서부로의 이동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교회의 지도자들은 일리노이주에서 교회에 대한 적대감이 증가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그들이 그 주를 떠나야 할 수도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1844년 2월에 조셉 스미스의 지시에 따라 십이사도 정원회는 가능한 집합 장소를 찾기 위해 비밀리에 북미 서부 지역을 탐사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선지자는 오십인 평의회로 알려진 새로운 조직을 구성했으며, 그 평의회에 서부에서 성도들을 위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으라는 책임을 부여했다.(See The Joseph Smith Papers, Journals, Volume 3: May 1843–June 1844, ed. Andrew H. Hedges and others [2015], 179–80; The Joseph Smith Papers, Administrative Records, Council of Fifty, Minutes, March 1844–January 1846, ed. Matthew J. Grow and others [2016], 40, 464-65, 471–72.)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생애 마지막이 가까워 오자 이 경륜의 시대의 신권 열쇠를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들에게 부여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 534쪽 참조) 선지자의 순교 이후에 1844년 8월 8일에 개최된 모임에서 많은 교회 회원들은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이었던 브리검 영이 교회를 인도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영적인 현시를 받았다.(때가 찬 시대의 교회사 학생 교재, 제2판 [교회 교육 기구 교재, 2003], 291~293쪽 참조)

교회의 많은 적들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살해당하고 나면 교회가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교회와 나부시가 계속해서 성장하고 번창하자, 교회의 적들은 교회 회원들을 일리노이주에서 쫓아내려 전력을 기울였다. 1845년 9월에 조셉과 하이럼 스미스의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나중에 석방된 사람 중 한 명이었던 리바이 윌리엄즈 대령이 300명의 폭도를 이끌고 “조직적으로 외딴곳에 있는 몰몬들의 농장과 보금자리를 불태웠다. 그들은 … 무방비 상태에 있던 집들과 농장 건물들, 제분소들과 곡식 더미를 불태웠다.”(때가 찬 시대의 교회사, 301쪽, see also History of the Church, 7:439–44) 많은 일리노이 주민들은 후기 성도들이 일리노이주에 머물면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교회 회원들에게 일리노이주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1845년 9월 24일에 십이사도 정원회는 교회가 이듬해 봄에 떠나겠다고 약속하는 서한을 발표했다.(때가 찬 시대의 교회사, 301~302쪽 참조)

현지의 폭도들과 주 민병대가 폭력을 써서 협박하자 교회 회원들은 1846년 2월에 나부를 떠나 아이오와주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폭우와 부족한 물자로 인해 1846년 2월에 나부를 떠난 교회 회원들이 아이오와주를 횡단하며 482 킬로미터를 가는 데에는 석 달 반이 넘게 걸렸다. 이 시기에 500명 이상의 후기 성도 남성들이 브리검 영 회장의 요청에 따라 1846년 5월에 발발한 멕시코 전쟁에 참전하고자 미합중국 군대에 입대했고, 이 부대는 몰몬 대대로 알려졌다. 일부 남성들은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함께 갔다. 그들의 군 복무로 가난한 교회 회원들의 서부 이동을 지원할 자금이 마련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가족들이 서부로 이동하는 일부 기간 동안을 남편과 아버지 없이 지내야 했다. 이런 이유로 교회 지도자들은 1847년 봄이 될 때까지 서쪽에 있는 로키산맥으로 가는 여정을 중단하기로 했으며, 교회 회원들에게 겨울 동안 임시 정착촌에 머물도록 권고했다. (Richard E. Bennett, We’ll Find the Place: The Mormon Exodus, 1846–1848 [1997], 31–34, 40–47; 우리의 유산: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약사 [1996], 69~7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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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몬 개척자 묘지, 네브래스카주 플로렌스

오늘날 네브래스카주 플로렌스에 있는 몰몬 개척자 묘지, 원터쿼터스에서 사망한 많은 성도가 묻혀 있다.

“많은 성도가 미주리강의 양쪽을 따라 정착했다. 가장 큰 정착지는 강 서쪽에 있던 네브래스카주의 윈터쿼터스였다. 그곳은 약 3,500명 정도의 교회 회원들에게 금세 안식처가 되었다. 성도들은 통나무 집이나 버드나무와 흙으로 만든 움집에서 살았다.”(우리의 유산, 71쪽) 많은 성도들이 추운 날씨를 피할 거처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 말라리아, 폐렴, 폐결핵, 콜레라, 괴혈병과 같은 질병으로 곳곳에 고통과 죽음이 퍼져 나갔다. 첫 번째 겨울에 700명이 넘는 교회 회원들이 사망했다. (때가 찬 시대의 교회사, 319~320쪽 참조) 1847년 1월에 브리검 영은 서부로의 이주에 관한 주님의 지시를 받기 위해 기도하고 나서 교리와 성약 136편에 기록된 영감에 찬 권고를 구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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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1: 교회의 서부 이동

교리와 성약 136:1~33

주님께서 교회 회원들을 조직하시고 그들에게 서부로 이동할 준비를 하도록 권고하시다

교리와 성약 136:1~33. “이스라엘 진영”

추방된 후기 성도들은 고대에 모세가 애굽에서 인도해 낸 이스라엘 자손을 칭한 이름인 “이스라엘 진영”으로 불렸다.(교리와 성약 136:1 참조; 또한 출애굽기 14:19~20; 여호수아 6:23 참조) 이 이름을 사용한 의도는 현대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 여행하는 동안 축복을 받을 것이며, 결국에는 고대 이스라엘이 그러했던 것처럼 영구적인 정착지로 인도될 것임을 시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네브래스카주 윈터쿼터스에 있던 교회 회원들에게 당신이 “주 너희 하나님 곧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셨으며, 그분이 “이스라엘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동일한 하나님이며,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마지막 날에 [당신]의 팔[을 뻗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교리와 성약 136:21~22) 성도들이 이주를 위해 스스로를 조직하도록 영감받은 방식은 고대 이스라엘이 구현했던 조직 및 지도력과 유사했다.(출애굽기 18:21~27; 신명기 1: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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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쿼터스 진입, 스콧 엠 스노우

원터쿼터스 진입, 스콧 엠 스노우. 성도들은 1846~1847년에 미주리강변을 따라 원터쿼터스를 포함한 다수의 정착촌을 세웠다.

교리와 성약 136:7. “개척자로서 가게 할지어다”

모든 교회 회원이 동시에 서부로의 이주를 시작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앞서간 이들은 “힘을 다하여 나아가서, 머물러 있을 자들”이나 나중에 올 자들을 위하여 “봄 작물을 심”고 “집과 곡식을 재배할 밭을 준비”해야 하는 자들이었다.(교리와 성약 136:6~7, 9 참조) 주님께서는 이 성도들을 “개척자”라고 부르셨다.(교리와 성약 136:7) 이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가면서 그들이 따라올 길을 준비하고 도와야 한다는 의미였다.

1847년 4월 5일에 몇몇 교회 지도자들이 떠난 후에 첫 번째 개척자 무리가 4월 15일에 윈터쿼터스를 떠났다. 그들은 1,600킬로미터 이상을 가서, 1847년 7월 말에 솔트레이크밸리에 도착했다. 1847년 7월 24일에 브리검 영 회장은 그곳에 도착했으며 성도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다는 확증을 받았다.(때가 찬 시대의 교회사, 331~333쪽 참조) 1869년에 대륙 횡단 철도가 완공되기 전에 결과적으로 6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유타 지역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하기 위해 같은 경로를 걸었다.(see Bennett, We’ll Find the Place, 359)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오늘날의 교회 회원들이 어떻게 개척자가 될 수 있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후기 성도가 되는 것은 개척자가 되는 것입니다. 개척자란 ‘앞서가서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길을 준비하거나 여는 사람’으로 정의되기 때문입니다.[The Compact Edition of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1971), ‘pioneer’] 아울러 개척자가 되는 것은 희생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교회 회원들은 집을 떠나 시온으로 여행하라는 요청을 더는 받지 않더라도 오랜 습관이나 낡은 관습, 또는 소중한 친구를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의 회원이 되기를 거부하는 식구들을 두고 떠나는, 고뇌에 찬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후기 성도들은 소중한 사람들이 언젠가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기도하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개척자의 길이 쉽지는 않으나, 우리는 가장 으뜸 되시는 개척자, 곧 앞서가서 따라야 할 길을 보여 주신 구주의 발자취를 따릅니다.”(“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신앙에 부끄럽지 않게 생활하십시오”, 리아호나, 2016년 7월호, 4~5쪽)

교리와 성약 136:34~42

주님께서 교회 회원들을 안심시키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모든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라고 권고하시다

교리와 성약 136:37~38. “그는 … 충실하였도다. 이에 내가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니라”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죽음으로 이끈 사건의 배후에 있던 나부의 배교자들은 그가 타락한 선지자라고 선포했다. 하지만 교리와 성약 136편에 기록된 계시에서 주님께서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신성한 부름에 대해 증거하셨으며, 그는 “충실하였도다. 이에 내가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교리와 성약 136:37~38 참조)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주님에게서 받은 신성한 사명과 부름에 충실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간증했다.

“무덤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이 세상에서 일어났던 가장 위대한 사건은 결코 중단되거나 멸망될 수 없는, 인간의 왕국이 아닌, [하나님의] 왕국의 기초를 놓기 위한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 소년 조셉에게 나타나신 일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저는 그가 세상에서 사명을 행한 … 동안 선포하고 발표한 그 외의 다른 진리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참되지 않은 교리는 절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께서 명하지 않으신 교리는 절대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잘못된 것은 절대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속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께서 명하신 대로 보고 듣고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셉 스미스가 이룬 사업은 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책임을 지시며, 인간이 지는 것은 아닙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 545~546쪽)

교리와 성약 136:39. “그가 자기의 피로 자기의 간증을 인봉할 필요가 있었나니”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사망 이후에 많은 교회 회원들이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 기이히 여겼”다. 이는 그들이 왜 하나님께서 그가 살해당하도록 용납하셨는지를 혼란스러워했다는 의미이다.(교리와 성약 136:39) 교리와 성약 136편에 기록된 계시에서 주님께서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사망한 이유에 대해, “그가 자기의 피로 자기의 간증을 인봉할 필요가 있었나니, 이는 그가 존귀하게 되고 악인은 정죄받게 하려 함이었느니라”라고 설명하셨다.(교리와 성약 136:39) 선지자의 순교에 관한 자신의 느낌을 피력하면서 윌포드 우드럽(1807~1898)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죽음과 그의 생명이 취해진 방법에 대해 특별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만약 조셉이 그의 소망을 이룰 수 있었다면, 그는 로키산맥으로 가는 길을 개척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이 경륜의 시대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간증을 피로 인봉하고, 이 경륜의 시대의 열쇠를 가지고 영의 세계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 사업의 문을 여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에게 요구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 537쪽)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은 또한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그의 형 하이럼 스미스의 사망의 필요성과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울 점에 관해 말했다.

“[조셉 스미스와 하이럼 스미스의] 순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위대한 교훈은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유효하다는 것입니다.(히브리서 9:16) … 주님께서는 그 유덕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간증이 사악하고 불의한 세상에 대한 증거가 되도록 희생을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은 구속주께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훌륭한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요한복음 15:13) 그들은 이 훌륭한 사랑을 성도들과 세상에 나타내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카테지로 출발하기 전부터 죽으러 간다는 확신을 실천하고 나타내 보여 주었습니다.  …

이 순교는 항상 주님의 백성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개인적인 시련을 겪을 때 도움이 되었으며, 의 안에서 길을 추구하고 진리를 알고 그에 따라 생활할 용기를 주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 조셉 스미스를 통해 계시하신 위대한 진리를 알게 된 후기 성도들에게 성스러운 기억으로 영원히 간직될 것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 537~5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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